20권 17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17)
“숙부님, 제가…… 제가요?”
조서인의 시선이 풍랑을 맞은 배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어떻게 소호를 막아야 할지……. 아니, 꼭 막아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소호는 잘못한 게 없지 않습니까?”
추룡한테 배운 ‘대범함’은 흔적도 없었다.
조서인은 혼란에 빠졌다.
‘지금 두 분이 모두 정무관이 나쁜 건 아니라고 말하셨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소호를 막아야 하지?’
그런 근본적인 의문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부운화는 그런 조서인의 표정 변화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그래? 서인이 너는 소호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느냐?”
조서인은 즉답했다.
“소호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잘못보다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조서인은 늘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 소호가 지금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때로는 잘못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구하기 위해 쓰러뜨려야 할 때도 있단다.”
“……죄송합니다. 제가 불민하여 구하기 위해 쓰러뜨려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너는 착한 아이다. 곧고 선한 심성을 지녔으니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옳은 듯하구나.”
부운화의 눈빛은 깊었다.
깊은 연못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착하다니……, 저는 착, 착하지는 않은데요.”
부운화는 쑥스러워하는 조서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주춤주춤하는 조서인의 손을 부운화가 양손으로 붙잡았다.
당황하는 조서인에게 부운화는 넌지시 말했다.
“너는 대형의 하나뿐인 제자이다. 무쌍한 무공과 함께 수많은 인연 또한 네게 계승되었지. 오직 너만이 그 아이를 막을 수 있단다.”
부운화는 마치 별처럼 늘 빛나는 사람이다.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진심을 담아 하는 말이 마치 하늘의 진리처럼 머릿속으로 파고든다.
“부족한 저를 높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숙부님. 정말로 감사해요.”
조서인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제가 정말로 소호를 막을 수 있을까요? 물론 소호가 잘못을 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만…….”
“너뿐이다. 네가 아니면 안 돼.”
어째서인가?
부운화는 한 박자를 쉬고 말을 이었다.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소호를 건드린다면, 그땐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니까 말이다.”
“……!”
조서인의 입이 벌어졌다.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면 차를 뿜었을 것이다.
농담인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부운화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하다.
한 치의 부끄러움이나 장난기도 그곳엔 없다.
“그럼. 그럼.”
당황하여 옆을 보니 추룡 또한 비슷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이게 농담이 아니라고?’
진지했다.
부운화도, 추룡도.
“어……, 으음…….”
조서인은 멍청한 신음만 내뱉었다.
“예에, 어, 음, 그래서 저뿐이군요.”
“그래. 너뿐이다.”
툭툭.
부운화는 조서인의 손등을 몇 번 두드렸다. 꽉 잡은 손바닥에서 검사 특유의 단단한 굳은살이 느껴진다.
“팔파일방에선 천무공자과 겨룰 만한 인재는 이 세상에 패원강뿐이라고 말하더구나. 하지만 내가 보기엔 틀렸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순수한 청년이야말로 소호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인재다.”
“저는…….”
조서인은 말문이 막혔다.
크나큰 감동이 몰아친다.
소호와 장기린 이후, 그의 능력을 이렇게나 인정해 준 사람이 또 있었던가?
‘난 정말로 소호와 싸워서 소호를 막아야 하는 걸까?’
추룡과 함께 언젠가 소호를 이기겠다고 생각하며 단련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먼 미래의 일. 언젠가는 그곳에 닿겠다는 조서인의 목표에 불과했다.
막연했던 상상이 현실로 눈앞에 턱 하니 놓인 듯한 기분이었다.
“서인. 네게 부탁을 하나 하겠다. 천무련이 사천에 세운 정무관 본관의 분위기가 요즘 심상치 않다고 하더구나. 네가 한번 가 보는 게 어떻겠느냐?”
정무관을 살피라는 부탁이지만.
실상은 소호에 대해 알아보고, 그를 정말로 막아야 하는지 직접 알아보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조서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정중히 포권을 취해 수긍의 뜻을 알렸다.
“……숙부님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해야지요. 제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조서인을 보며 부운화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가 무공광이라는 소리는 들었다.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네게 선물을 주고 싶구나.”
“선물이라니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당치 않습니다.”
“예의를 차리지 말거라. 숙부가 조카에게 한 수 가르치려는 것뿐이다.”
부운화는 등허리에 차고 있던 두 자루의 장군검 중 하나만 뽑아 들었다.
스릉―.
잘 갈린 검날이 푸른 예기를 뽐낸다.
“서역까지 갔다가 돌아온 동생에게도, 팽가의 철혈을 이어받은 아가씨에게도 작은 선물 정도는 될 테지.”
추룡과 팽자연을 일별한 부운화가 태극신기를 끌어 올리자 차분했던 그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우우웅―.
부운화는 그 순간 북로전쟁의 괴물로 돌아와 있었다.
표풍검 부운화.
붉은 악귀와 함께 몽고 전사들의 경외를 받던 막강한 무인이 이곳에 있다.
어스름한 새벽녘의 공기처럼 서늘한 기세가 조서인을 경직시켰다.
세상을 박살 낼 것 같은 위압감은 없지만, 오히려 자연 그 자체와 동화되어 버린 듯한 무한한 존재감에 조서인은 공포에 질렸다.
광활하게 펼쳐진 대양의 수평선을 어찌 감당할까.
하늘에 닿을 듯 치솟은 태산의 위압감은 또 어찌 당할까.
부운화는 그를 보는 상대에게 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
자연을 상대하는 듯한 느낌.
장군검 검날 너머로 끝을 알 수 없는 저력이 가득했다.
‘대단하다……! 전에도 느꼈지만 이건, 수준이 너무 달라. 선계(仙界)의 무공이 있다면 이런 것 아닐까?’
조서인은 지금껏 이러한 느낌을 딱 두 번만 받아 보았다.
하나는 그의 사부인 무쌍귀 장기린.
다른 하나는 잠시 그를 단련시켜 주었었던 천하제일검, 검선이다.
두 사람 다 천하를 논하는 무림오존 수준의 인물들이다.
“서인, 너는 대형과 무공을 가장 많이 겨루고 싸워 본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조서인은 장군검의 검끝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반원과 반원이 끝없이 이어지는 자그마한 움직임조차 매력적이다.
돌고 돌아 태극.
검종(劍宗) 무당파의 정수 태극혜검의 진의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적이었던 몽고의 장수? 쿠빌라이의 정예 호위병들? 아니. 나다. 대형의 무공은 내가 가장 많이 겪어 보았다. 모든 움직임을 속속들이 다 알 정도로 내가 가장 많이 겪어 보았다.”
조서인은 감정적으로 격동하여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연스레 등 뒤에 매고 있던 애창 은자를 꺼내게 되는 것은 무인으로서 당연한 행동이다.
‘사부님을 가장 많이 겪어 본 사람. 무당파의 검술을 전장에서 완성한 희대의 무인!’
그만큼 뛰어난 무인을 앞에 두고 배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그건 무인이 아니다.
은빛으로 빛나는 한 자루 창을 손에 쥐고 전의를 가다듬는 조서인을 보며, 부운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사내답고 거친 느낌의 미소였다.
“그래. 너는 포기하지 않는다. 강자를 보면 배우기 위해 덤벼들지.”
조서인은 일연적룡무의 기수식을 취했다.
양발을 어깨 넓이로 벌려 무겁게 땅을 밟고 허리는 꼿꼿하게, 시선과 창끝은 정면의 상대를 향한다.
검선의 무공, 건곤조화신공이 온몸에 활력을 끌어 올린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선하고 배려가 깊어 매사에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싸워야 할 때는 싸우는 사람이 조서인이다.
그런 조서인의 모습에서 부운화는 젊은 시절의 장기린을 떠올렸다.
“그래. 네 실력을 보여다오.”
태극혜검의 묘리가 펼쳐지고 일연적룡무의 강맹함이 허공을 꿰뚫는다.
고요했던 관성대의 정상에서 두 사람의 무공이 충돌하고 있었다.
***
경태 일 년.
전쟁은 끝났으나 여전히 황실은 어수선하여 예전의 유능한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정통제의 친정.
황제가 직접 오십만 대군을 이끌고 나아간 그 전쟁은 누가 봐도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당연히 손쉽게 공을 세울 기회라 여긴 수많은 문무(文武) 양도의 인재들이 전쟁에 따라나섰다가 참변을 당했다.
그 탓에 명 황실에는 경력 있는 인재가 늘 부족했고, 커다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서류를 산더미처럼 쌓아 둔 채 고심하고 있는 경태제 주기옥의 앞에서, 우겸이 공손히 예를 갖추며 연이어 사람들을 천거하는 것 또한 그런 이유에서였다.
“서유정이라는 사람은 학문과 치수에 능한 자로서 능히 어떤 일이든 해낼 사람입니다. 본인은 국자감 제주 자리를 원하는데 폐하께선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주기옥은 우겸의 의견을 대부분 들어주는 편이었으나 인재를 운용하는 것에 있어서는 보수적으로 행동하며 냉철하게 판단하려 노력했다.
사람을 믿지 말라.
소호가 그에게 해 준 조언이다. 실제로 주기옥에게 있어서는 개국공신이나 다름없는 우겸이 인재 천거에까지 힘을 갖게 된다면 한 신하에게 너무 큰 힘이 주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왕진의 예가 있듯, 한 신하가 너무 많은 권력을 갖게 되면 반드시 부패한다.
주기옥은 제이의 왕진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서유정? 기억이 나는군. 그는 짐이 황실에 왔을 때 싸우지 말고 도망가서 남경으로 천도해야 한다고 외치던 이가 아니오?”
“그렇사옵니다. 폐하.”
“그자는 마음이 바르지 못한 자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내질 않는 자인데, 국자감 제주 자리를 맡아 유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소?”
주기옥의 목소리는 서릿발 같았다.
실제로 그는 북경을 방어하는 일에 회의적이었던 신하들을 대부분 싫어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낼 줄 모르는 자들.
그런 자들을 신하로 믿을 수 있겠는가?
“폐하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무인들과 함께 자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소. 나는, 아니 짐은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자들이 싫소.”
우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무인인 바.
주기옥의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오히려 백번 공감하면서 사리 판별이 명확한 주기옥에게 오히려 감탄했다.
“그자가 치수에 능력이 있다고 하니 그 능력을 쓸 수 있는 자리를 적당히 찾아 주시오. 국자감 제주는 안 되겠군.”
“폐하의 명을 따르겠나이다.”
주기옥은 눈앞에 놓인 서류들에 옥새를 한참 찍다가 문득 얼마 전 사건이 떠올라 물었다.
“아참, 석형과 감정이 상했다던데 그건 괜찮소?”
“공적인 일입니다. 무청후도 이해할 것입니다.”
선봉군에서 도망치는 바람에 패군지장이 되었던 석형.
죄인이 되어 옥에 갇혔던 그는 북경 방어전에서 우겸이 믿고 중임을 맡겨 준 덕분에 큰 공을 세워 무청후(武淸侯)라는 작위까지 받았다.
그 때문에 우겸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는지, 석형은 얼마 전에 주기옥을 향해 상소를 올렸다.
우겸의 아들, 우면에게도 자신처럼 작위를 내려 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상대는 우겸이다.
청렴결백의 화신과도 같은 그는 아들에게 작위를 추천하는 석형의 면전에서 오히려 윽박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