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98화 (627/686)

20권 18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18)

“지금과 같은 국난의 때에, 신하가 개인의 은덕을 신경 써서야 되겠는가! 나의 아들만 추천하다니. 그래서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겠냔 말이다! 군공에 있어서 요령을 부리는 건 막아야 한다. 나는 절대로 내 아들이 함부로 군공을 얻도록 놔두지 않겠다!”

그야말로 바람직한 장수의 표상이오, 정의의 일갈이었다.

많은 이가 감탄하였으나, 좋은 뜻으로 우겸을 위하려던 석형 입장에선 모욕을 당한 것과 진배없었다.

그 뒤로 석형이 우겸에게 원한을 가졌다는 말이 공공연히 들릴 정도였다.

“우 상서. 선물이 그렇게 들어오는데도 다 돌려보내고, 아직도 병부시랑 시절의 그 허름한 집 한 칸에서 산다면서요? 나라의 병부상서가 그런 데서 살아서야 되겠는가? 짐이 저택을 한 채 내려 주는 게 어떻겠소?”

“폐하의 자애로운 말씀에 감사하나, 사사로이 저택을 하사하신다면 나쁜 선례를 남기고 신하들의 질시를 받을 것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이 너무 검소해도 안 좋은 것이오. 내가 우 상서에게 적절한 대가를 치를 수가 없지 않소?”

“폐하와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신의 홍복(洪福)이옵니다.”

“거 참, 그러지 마시라니까.”

때론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 더 불편할 때가 있는 법이다.

주기옥이 불만스러워하며 투덜거리는 그때였다.

새로 사례감 태감이 된 조길상이 날 듯이 뛰어와 주기옥의 앞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폐하! 큰일이 났사옵니다.”

“무슨 일이오?”

“선황 폐하께서 포로에서 풀려나 돌아오신다고 합니다!”

커다란 충격이 좌중을 휩쓸었다.

정통제 주기진.

토목의 변으로 오이라트에 잡혀갔던 그가 명나라 황실로 돌아온 것이다.

“에센, 그자가 선황 폐하를 그냥 풀어 주었단 말인가! 자신의 손에 들어온 황금을 순순히 아무 대가도 없이 내놓았다고?”

“북경에서 큰 손해를 본 탓에 이제는 오이라트가 명과는 관계하지 않으려 한답니다. 이쪽에는 이미 새로운 황제 폐하께서도 계시니, 조정을 좌지우지할 수 없게 되어 선황 폐하를 놓아준 것이겠지요.”

“허어.”

주기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불과 일 년이다.

주기옥이 경태제로 즉위한 지 이제 고작 일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나라의 많은 것들이 변했으나, 아직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었다.

주기옥은 당장 눈앞에 엎드려 있는 환관 조길상을 바라보았다.

조길상은 왕진의 심복이었던 자다.

정통제 주기진의 충신이었으나, 시세를 잘 읽고 주기옥을 잘 따르기에 금군과 내정시위를 관장하게 내버려 두었다.

실제로 등무칠과 같은 난을 일으킨 자들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하여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을 뿌듯해하던 차였다.

그런데 주기진이 돌아온다고?

그렇게 된다면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한다.

황실의 혈통이 둘로 나뉘어 이어지는 셈이며, 이는 천지가 격변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분열을 야기한다.

주기옥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만 했다.

조길상은 누구의 신하인가?

원래의 주인인 주기진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살려 두고 은혜를 베푼 주기옥을 계속 따를 것인가?

이런 질문을 조정에 남은 모든 관리에게 던져야만 했다.

주기옥은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위험하구나. 에센. 에센이여! 전쟁에서 졌음에도 일 년이 지난 지금 내게 가장 큰 칼을 던졌구나.’

자칫 잘못하면 나라가 두 쪽이 날 것이고, 반란이 일어나 나라를 혼란케 할 씨앗이 생겼다.

이 모든 게 오이라트 입장에선 아무런 쓸모도 없어진 주기진을 그저 살려서 돌려보낸 덕분에 벌어지는 일이다.

선의를 가장한 포로 해방 뒤에 숨어 있는 음험함.

에센의 악의를 느낀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주기옥의 솔직한 한마디에 섬찟하여 눈을 부릅뜬 것은 우겸이었다.

그는 의심할 바 없는 주기옥의 충신이었다.

그렇기에 냉엄한 눈으로 묻고 있었다.

‘폐하, 조길상을 죽이는 게 좋겠나이까?’

선황이 죽었어야 했다는 위험한 발언을 조길상은 듣고 말았다.

반란의 씨앗.

종묘와 사직을 위협할 존재를 살려 두어도 괜찮을 것인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조길상은 간곡히 청했다.

“폐하! 신 조길상, 간곡히 청하옵니다. 선황 폐하께서는 나라에 심대한 피해를 끼쳤으나, 목숨을 빼앗으면 황실의 권위가 손상되고 안 좋은 선례를 남길 것입니다. 상황의 대우는 하되 별궁에 유폐하는 것이 어떠실런지요.”

몇 번을 다시 생각하더라도 적절한, 균형이 잡힌 대답이었다.

냉철하게 국익과 지금 황실의 입장만을 생각한 대응이다.

주기옥은 여전히 안색이 창백했지만, 그래도 황제의 위엄을 살려 냉철하게 조길상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조길상은 목을 쭉 빼고 절을 올리는 자세 그대로,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다.

죽으라면 곧바로 죽을 것 같은 자세.

저런 공손한 태도 때문에 주기옥은 조길상을 살려 주었었고, 지금도 그를 죽일 수 없었다.

“만약 조 태감이 선황을 죽이라 했다면 짐은 조 태감을 처형하라 했을 것이오. 자신이 살고자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을 하는 자는 살려 둘 필요가 없지 않겠소?”

조길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짐은 조 태감의 말대로 하겠소.”

“폐하의 자비로운 마음을 천하 만민이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경하하며 주기옥을 칭송하는 목소리엔 가식이 없었다.

주기옥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조길상을 염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길상이 아니더라도 선황의 복위를 원할 자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결국 이는 앞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게 뻔했다.

앞으로 주기옥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인재들이 모조리 죽어 버린 탓에 그 자리를 메꿔야 하는데, 그 와중에 주기진의 복위를 원하는 파벌은 짓누르고 쳐 내는 걸 동시에 해야만 한다.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황위에 오른 지 고작 일 년 만에 자리가 불안해졌구나.’

황실의 삶을 쉽지 않다.

주기옥은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

자금성의 후문으로 들어간 소호가 주기진을 만났을 때는 이미 해가 져서 하늘이 어스름하게 어두워진 때였다.

환관들이 방 안 곳곳에 불을 피우는 모습을 부루퉁한 얼굴로 지켜보던 주기옥은 소호를 보자마자 불만을 토해 냈다.

“사고 친 형 놈이 돌아온대. 내가 돌아 버리겠어.”

신경질적이고 톡 쏘는 듯한 말투다.

은자촌 시절의 주기옥.

전갈 꼬치를 사 먹으러 함께 마을을 나다니던 시절의 말투였다.

“앵무새를 맨손으로 죽였다던 그 사람?”

“미친놈이야. 옛날부터 그랬어. 약한 사람들을 쥐 잡듯이 잡고 말이야.”

“그러고 보면 옛날부터 네가 싫어하긴 했지.”

“이민족한테 잡혀갔으면 거기서 살던가. 왜 살아서 돌아오는 건지 모르겠네. 낯가죽도 두꺼워. 오십만을 죽여 놓고 혼자 살아 돌아오면 누가 봐도 욕먹을 게 뻔하지 않나? 그런데 돌아오고 싶나?”

신랄하기 짝이 없는 욕설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연등에 불을 붙이던 환관들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서둘러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선황을 욕하는 황제의 대화다.

그들은 아무것도 못 들었다고 스스로 몇 번이고 다짐해야 할 것이다.

황실에선 처신을 잘못하면 한순간에 나락에 떨어지는 건 금방이었다.

“그래도 포로로 잡혀갔으니 정신을 좀 차리지 않았을까?”

“흥, 못 믿지. 미친놈이 정신을 차려 봐야 미친놈이지 않아?”

“너도 우리 마을에 처음 왔을 때는 건방진 밉상 꼬맹이였잖아?”

“그거랑은 다르지!”

주기옥이 억울해서 가슴을 두드렸다.

“내가 이래 봬도 황족이야. 시골 촌 소년한테 투정 좀 부리는 거랑, 열 뻗치면 사람 잡아 죽이는 놈이랑 같아?”

“어쭈? 촌 소년?”

“특이한 곳이긴 해도 촌 소년이 촌 소년이지 그럼 뭐야?”

소호는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라 순순히 긍정했다.

그러고는 장난스레 놀렸다.

“촌 소년이 맞긴 하네. 근데 네가 그 촌 소년의 정강이를 걷어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데? 그거 엄청 아팠다고. 보통 꼬맹이들은 그렇게까지 악에 차서 발길질을 하진 않아.”

“어이구, 그 인간을 못 봤으니 형이 나한테 이런 말을 하지.”

주기옥은 울화가 치미는 얼굴로 다탁에 놓인 고급 다과들을 집어서 우적우적 씹었다.

“그거 맛있어?”

“그냥 되는 대로 씹는 거야.”

“그렇게 한꺼번에 먹으면 맛이 다 섞이겠다. 너 살이 좀 찐 것 같아.”

“형도 노회한 관리들 상대로 매일 일해 봐. 열받아서 자꾸 뭘 씹게 된다니까?”

“그런 거로 네 화가 풀리면 다행이긴 하네. 다음에 너 좋아하던 심태연 좀 싸 올까?”

“……강 숙수님 걸로?”

“당연히 운찬 삼촌 거지.”

달콤한 대추 안에 밀떡을 채워 기름에 구운 심태연은 주기옥이 은자촌에서 가장 좋아하던 간식이었다.

기분이 좋아졌던 주기옥은 또 금방 우울해졌다.

지금부터 해야 할 말이 꽤 심각한 주제였던 탓이다.

“형, 요즘 들려오는 말이 너무 많아. 천무련은 잘 굴러가고 있어?”

“잘 굴러가지. 그 어느 때보다 잘 되고 있어.”

“그런 것 같더라. 너무 잘나가는 거 아냐?”

툭 던지는 말이 무게를 갖는 것은, 지금 주기옥의 위치가 예전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소호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왜? 누가 내가 너무 잘 나가는 것 같아서 싫대?”

“싫다고는 안 하는데, 걱정된다는 말은 하나같이 많이 하더라.”

“누가 그래?”

“누군지까지 이르면 내가 너무 없어 보이지. 그냥 그런 말이 많이 나와.”

“정무관을 많이 세우는 게 관리님들의 심기를 많이 건드리나 보네.”

“형도 예상은 했던 일이잖아?”

물론 소호도 반쯤은 예상하긴 했다.

생각보다 반응이 빨라서 놀랍기는 하지만 말이다.

주기옥은 다과를 들고 우적우적 씹으면서 씁쓸하게 말했다.

“주변에서 재잘거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 다들 똑같은 말을 많이 하더라. 불안하다고, 조심해야 한다고. 내가 아는 소호 형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전해지는 말만 듣고 있으면 형은 역모를 준비하는 무서운 사람이야.”

“내가 그렇지 않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알지. 문제는 내가 이제부턴 좀 혼란스러운 상황이 될 것 같아서 그래.”

주기진의 귀환에 대한 이야기다.

황실 안에서 주기옥의 기반이 불안정해지고 있는데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는 주기옥의 투정이었다.

“기옥이가 많이 힘든가 보네. 그럼 내가 좀 도와줄까?”

“어떻게?”

“선황이 없어지면 되는 건가?”

악의 없는 질문.

진심으로 돕고 싶어서 한 말이었지만 주기옥은 깜짝 놀란 것처럼 몸을 움찔했다.

소호는 웃고 있었다.

태양처럼 환하게.

순수하고 밝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다.

“그건, 아냐. 죽으면 안 돼. 이미 오이라트에서 순순히 보내 준 건데, 오다가 죽기라도 하면 누구든지 내가 사주한 거라 생각할 거라고.”

주기옥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소호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죽인다는 건 아냐. 그냥 어디 데려가서 숨겨 둬도 되는 거잖아?”

주기옥이 주기진의 마수를 피해 은자촌에 숨었던 것처럼, 주기진도 어딘가에 숨겨 두면 되리라.

막상 황실로 복귀하려던 주기진이 겁이 나서 숨어 버렸다고 하면 이야기도 완벽해진다.

그런데 그 말이 주기옥에게 무서운 느낌을 준 모양이었다.

주기옥은 들고 있던 다과를 내려놓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거절의 뜻을 밝혔다.

“괜찮아. 황실의 피는 신성하니까. 본인이 숨고 싶은 게 아니라면 함부로 다뤄서는 안 돼. 내가……,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해 볼게.”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도움이 필요하면 알려 줘.”

“……그럴게.”

소호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주기옥은 그 이후에 말을 아끼다가 대화가 끝이 나 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