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권 19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19)
정무관 북경 지부에서는 현판을 올린 첫날부터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대체 어떻게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인지 백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온 아이들도 있었다.
지방 촌민의 삶은 평탄하다.
글을 배워 과거시험을 볼 만한 자질이나 여유가 없는 아이에게 몸만 잘 쓰면 배울 수 있는 무공은 자신의 처지를 하루아침에 뒤바꿀 수도 있는 수단처럼 생각되었다.
문제는 북경에 고위관료나 부유한 상인들이 많이 산다는 점이었다.
물론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에선 정무관 같은 곳에 목을 맬 리가 없다.
천무공자를 길러낸 무산학관에 직접 입관을 시키거나, 아니면 팔파일방에서 직접 고수를 초빙하여 무공을 가르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순위를 매기자면 중간 이하에 속하는, 애매하게 권력이 있고 부유한 자들이 문제가 되었다.
무산학관에 입관할 만한 권력이나 재능이 없는데 팔파일방에 연줄을 대기도 애매한 자들.
그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레 정무관이 무산학관의 대용처럼 떠올랐다.
당금의 강호 무림에서 가장 주목받는 집단인 천무련과 줄을 댈 수도 있을 테니 얼마나 좋은가.
당연히 정무관에 입관하려는 자들이 몰리다 보니 그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졌고, 나름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 집안의 자식들은 멀리서 온 어중이떠중이 촌민들을 쫓아내길 바랐다.
그런데 정무관의 대응은 그들의 기대와 달랐다.
천무련에서 직접 파견되었다는 임시 북경 정무관주 이남성은 강직한 인물이었다.
“정무관의 무공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를 차별 없이 가르치라는 지시를 받았소. 단, 오늘 이후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기다리면 한 달 후에 입관할 수 있을 것이오. 입관을 희망하는 자는 모두 들어오시오. 정무관의 연무장은 아주 넓소.”
발걸음이 가볍고 허리가 꼿꼿했다.
건장한 골격에 살짝 마른 체구, 햇볕에 그을린 피부색은 그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몸을 단련하는 무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출신도 다르고 나이대도 다양한 소년, 소녀 들이 이남성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정무관 안으로 줄을 지어 들어왔다.
“오오오!”
“생각보다 더 넓어!”
북경 정무관은 웬만한 고관대작의 저택 두 채를 합친 것만큼이나 컸다.
아이들은 그 짧은 사이에도 친해진 아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정무관의 커다란 규모에 감탄했다.
이남성과 그가 천무련에서 함께 데리고 온 무인들은 수백 명의 입관 희망자들을 각각 오십 명씩 나눠서 정렬시킨 뒤 열 명의 교관과 함께 단상 위에 일렬로 늘어섰다.
그는 모두에게 잘 보이는 위치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소. 정무관은 천무련의 소속이며, 이곳에서 가르치는 승천무는 천무공자께서 하남의 무공을 집대성하여 만든 기본 공이자 양생공이오. 지금부터 시연하는 것을 잘 보고 완벽히 따라 할 수 있기를 바라오.”
이남성은 정중하게 포권을 취한 뒤, 마보 자세를 잡았다.
천무공자의 작품.
승천무 열여덟 초식이 제일 식 기지문천(起止問天)부터 제십팔 식 단각승천(斷角昇天)까지.
차례차례 정확한 동작으로 시연했다.
“오오!”
“이게 승천무구나!”
이남성과 교관들이 승천무 열여덟 초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치는 데는 총 이각의 시각이 걸렸다.
동작들은 어렵지 않았지만, 정확히 시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집중을 필요로 했다.
이남성과 열 명의 교관들이 처음 승천무를 시연했을 때는 연무장에 모인 모든 아이가 숨 쉬는 것조차 잊을 만큼 극도로 집중했다.
모든 시연이 끝나면 이남성은 반각의 휴식을 가진 후 곧바로 다시 승천무를 첫 번째 초식부터 열여덟 번째 초식까지 시연하기 시작했다.
집중해서 보고 있던 아이들은 이번엔 앞서 본 동작들을 형태나마 따라 하기 시작했다.
수백 명 아이의 재능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일부는 한 번 봤을 뿐인데도 모든 동작을 외운 데다 제법 비슷하게 따라 하는 아이들이 있었고, 다른 일부는 일 초식조차 헷갈려서 더듬더듬 손발을 어설프게 휘젓는 아이들도 있다.
그래도 공통적인 게 있다면 반복할수록 차츰 동작이 나아진다는 점이다.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눈 것도 아니고, 들어온 아이들 각자의 사정이나 출신을 묻지도 않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작정 가르치기 시작한 무공 수련이 어느새 한 시진이 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시진이 넘어갔다.
“다시 반각을 쉬겠소.”
두 시진 동안 무려 여덟 번이나 승천무를 반복해 놓고도 이남성은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태연한 모습.
차분한 태도에선 승천무 시연을 하루 종일도 할 수 있다는 강철 같은 자신감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교관들이면 몰라도 아이들은 아니다.
모두가 기껏해야 열 살에서 스무 살 사이의 아이들이었다.
불과 몇 시진 전만 하더라도 평범한 촌부나 상인의 자식이었던 아이들은 두 시진 동안 여덟 번이나 반복된 무공 시연을 견디지 못했다.
당장 처음 보는 무공을 눈으로 보고 외워야 한다는 압박감.
거기다가 주변 아이들과 실시간으로 재능이 비교된다는 점이 아이들을 심리적으로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이런 게……. 후우. 후우. 어딨어……?”
“왜 우린 계속 같은 것만 하는 거지?”
차마 이남성이나 교관들에게 직접 따지지는 못하지만 중얼중얼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땀에 젖어 헐떡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이들도 차츰 늘어간다.
이남성과 교관들은 그 후로 한 시진 동안 승천무를 네 번 더 시전한 후에야 오늘의 수련은 이걸로 끝임을 선언했다.
“정무관의 입관자들에게 미리 말하겠소. 우린 내일부터 묘시(卯時)에 모여 승천무를 세 시진 동안 수련하고, 식사를 한 뒤 세 시진 동안 또 승천무를 수련할 것이오. 그러면 하루의 일과가 끝날 것이니. 앞으로의 수련에 참고하도록 하시오.”
이남성은 열 명의 교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인근에 집이 있는 자들은 돌려보내고, 잘 곳이 없는 자들은 미리 준비해 둔 숙소로 안내해 주어라.”
“존명!”
열 명의 교관들은 이남성을 닮아 모두가 강직하고 절도 있는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북경에 집이 있는 아이들은 그대로 돌려보내고, 멀리서 온 아이들은 미리 준비된 정무관의 숙소로 안내해 주었다.
“묘시부터 세 시진, 밥 먹고 나서 또 세 시진……?”
“아니, 묘시면 간신히 해도 뜰락 말락 할 때잖아? 원래 무관에서 수련하는 게 이렇게 힘든 거야? 다들 이런 식으로 하는 건가?”
“다 같이 똑같은 동작만 반복하는 건 처음인데. 이렇게 배우는 게 맞아?”
아이들은 처음 며칠 간은 성실하게 정무관에서 수련하였다.
애초에 혈기왕성하고 참을성 없는 십 대의 아이들이다.
첫날 세 시진을 끈기 있게 배운 것도 대단한 것이었거늘.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똑같이 하루에 여섯 시진씩 수련하는 것은 무리인 게 당연했다.
“이게 뭐야! 이런 게 무공 익히는 거야? 멋진 내공심법도 익히고, 대련도 하고 그러는 거 아니었어?”
“뭐 이래? 승천무는 애저녁에 다 외웠어! 이젠 배울 게 하나도 없어!”
“정무관이래서 대단한 거 가르쳐 줄 줄 알았는데, 이게 다구나! 이럴 거면 이미 다 익혔는데 그냥 집에서 단련하지.”
부유한 집안 출신 아이들부터 흥미와 열정을 잃고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불과 오 일도 지나기 전에 이미 아이들은 대부분 승천무 열여덟 초식을 모조리 외운 상태였다.
더 이상 외울 필요도 없는데, 하루에 여섯 시진씩 똑같은 초식만 반복하라는 건 그야말로 고문이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남성과 교관들은 아이들이 떠나도 되냐고 물어보면 선선히 보내 주었다.
다시는 승천무를 펼치지 말라고 엄포를 놓거나, 익힌 것을 사용 못하게 근맥을 끊어 놓는다거나 그런 무시무시한 일도 없었다.
그저 지금 나가면 입관일로부터 한 달이 될 때까지 다시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뿐이었다.
이미 승천무를 다 익힌 아이들이 정무관을 떠나 본가로 돌아갔다.
삼백 명이었던 아이들이 절반으로 줄고, 그 절반조차 차츰 줄어들어 백 명 남짓한 숫자로 바뀌는 데는 불과 십여 일이면 충분했다.
그때부터는 숫자가 줄지 않기 시작했다.
일백 명.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확실히 익힌 그들은 대부분이 집이 너무 멀어서 돌아갈 수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정무관에서 기거하면서 이를 악물고 하루에 여섯 시진씩 승천무를 따라 했다. 똑같은 반복조차 재밌어하면서 열심히 하는 아이들투성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한 달을 버텼다.
딱 한 달째 되던 날 단상 위로 올라온 이남성과 교관들은 분위기가 달랐다.
“오늘로서 정무관이 문을 연 지 한 달을 채웠다. 그리고 너희는 그동안 많은 이들이 정무관을 박차고 나갔음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지.”
지금까지 올림말을 쓰던 이남성이 반말을 했다.
위압적이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어딘가 따스한 인정마저 느껴졌다.
짝!
이남성은 박수를 한 번 친 뒤, 교관 십여 명과 함께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당황한 아이들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희의 인내심과 끈기. 그리고 성실함을 칭찬한다. 대단했다!”
바위처럼 딱딱한 사내가 보내는 찬사에 아이들의 마음이 불타올랐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희는 북경 정무관의 일대 제자다. 앞으로 오전에는 똑같이 승천무 수련을 하지만, 오후에는 천무련 무인들이 배우는 정무심공(正武心功)을 습득하고, 소림과 무당의 기본 공들을 차례차례 익혀 나갈 것이다.”
느닷없는 선언에 백 명의 아이들의 얼이 빠졌다.
일대 제자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이들의 대부분은 일대 제자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일대 제자……. 일대 제자가 뭐죠?”
“정말로 소림과 무당의 기본 공을 익히나요?”
“정무심공이라니. 심법을 배우는 거야?”
웅성거리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설렘과 흥분이 가득했다.
왜 아니랴.
대부분이 농민이나 상인 집안 출신.
어떻게든 제대로 된 무공을 익혀 보고 싶은 일념 하나로 열심히 노력해 왔는데, 이젠 정말로 팔파일방, 그것도 그중에서도 수장급이나 다름없는 소림과 무당의 무공을 익힐 수 있다니 말이다.
“내가 한 달간 새로운 입관생을 받지 않겠다고 한 것은 그래서다. 일대 제자들만이 정무심공과 소림, 무당의 기본 공을 익힐 수 있다.”
아이들 사이에서 “아! 그래서!”라는 감탄들이 튀어나왔다.
“오늘 이후에 입관하는 자들은 오전의 승천무 수련에만 참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누구든 참가해 함께 단련할 수 있다. 노인이든 어린아이든 누구나 참가해서 함께 익힐 수 있지. 하지만 천무련의 ‘진짜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건 당분간 너희 일대 제자들 뿐이야.”
그제야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한 아이들이 흥분해서 하나같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세상에 너는 특별하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효과적인 칭찬이 또 있을까?
심지어 교관들은 돌아다니면서 일백 명의 아이들의 목에 ‘북경정무관일대제자(北京正武館一代弟子)’라는 글자가 새겨진 작은 대나무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일대 제자라는 직함의 무게를 아이들이 가슴에 새겨 넣는 순간이었다.
이남성과 교관들은 그런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때? 열심히 할 마음이 드나?”
“예!”
백 명의 아이들이 우렁차게 답했다.
이남성은 주먹을 쥐어 들어 올렸다.
“좋다! 열심히 해서 천무련의 무인이 되는 것이다!”
“존명!”
일대 제자들의 흥분한 함성이 북경 정무관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