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권 20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20)
한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덩치가 크고 팔뚝이 두꺼우며 머리가 반질반질한 대머리였다. 그는 머리카락이 없듯 눈썹도 없으며 코와 입가에 수염도 없었다. 마치 반질거리는 피부만 남아 있는 사람 같았는데, 눈 밑, 코, 이마, 턱까지 흉터가 없는 곳이 없는 흉악한 인상이었다.
그가 바로 북경 암흑가를 주름잡는 황양문(黃陽門)의 문주 오백양(吳白楊)이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인상을 쓰고 눈앞의 상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성인 남성의 손바닥 두 개만 한 목함 안에는 번쩍거리는 금화가 가득했다.
대단한 액수이긴 하지만, 북경 암흑가의 수장으로서 이 정도 금액이 경악할 만한 액수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북경이 남경이나 항주처럼 상업으로 부유한 동네는 아니다만, 그래도 이곳은 명색이 나라의 수도이지 않던가.
그곳의 암흑가를 주름잡는 조직이 벌어들이는 돈?
이 정도 금액으로는 황양문을 한두 달 운영할 정도의 금액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걸 보낸 게 ‘적양문’이라는 점이다.
“형님, 아직도 금화만 노려보시는 겁니까?”
황양문의 부문주 왕달(王達)이 놀리듯이 물었다.
왕달은 오백양처럼 민머리에 험악한 인상은 아니지만, 그 역시도 얼굴 반쪽에 화상을 입은 흔적이 역력해 기괴한 얼굴이었다.
입가가 비뚤어졌고 화상이 있는 왼쪽 눈은 시력도 잃었는지 죽은 생선처럼 하얗게 백탁으로 뒤덮여 있었다.
왕달은 암흑가에 흔치 않은 이른바 ‘먹물’이었다.
먹물 좀 먹고 붓 좀 써 본 지식인이라는 소리다.
원래는 문주인 오백양의 이름을 따서 백양파라 불리던 그들이 볕 양(陽)자를 넣은 황양문으로 이름을 바꾸고 적양문의 밑으로 들어가자는 생각도 왕달의 머리에서 나왔다.
태양의 심지는 붉으나 그 주변은 노랗지 않던가.
적양문을 태양의 중심처럼 여겨 성심을 다해 보좌하겠다는 뜻이 담긴 왕달의 서신이 전해지자, 적양문주 고흠이 직접 황양문을 칭찬했던 일은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회자된다.
그 덕분에 황양문이 일약 북경 암흑가의 우두머리로 우뚝 솟아올랐으니, 왕달은 황양문주 오백양이 가장 아끼는 신하이자 의동생이 되었다.
“아무래도 불길하다. 씨벌, 이걸 진짜 받아도 되는 거냐?”
“적양문에서 내린 결정입니다. 저희에겐 결정권이 없어요.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안다. 잘 알지. 근데 영 찜찜해서 그런다. 적양문에 그 아미파의 노물(老物)이 다녀가고 결정되었다면서? 씨벌, 그 늙은이.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는데 가만히 보면 속이 시커메서 믿을 수 없는 늙은이야. 그거 알아?”
“예, 몇 번이나 말씀하셨잖습니까?”
오백양은 과거에 아미파 장문인 정허 사태와 얽혔던 일을 떠올리고는 이를 딱딱 부딪쳤다.
초조할 때 이를 갈 듯 딱딱 소리를 내는 건 오백양의 나쁜 버릇이었다.
“그 노물이랑 얽힌 일이 좋은 일일 리가 없어. 근데 적양문이 결정했으니 안 따를 수도 없고. 씨벌, 이걸 어떻게 피하면 좋겠냐고.”
“형님, 나찰마도의 구천지옥도법을 일부 전수해 주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생일대의 기회 아니에요?”
“그러니까 더 문제지!”
나찰마도 정옥상.
전쟁의 난민 고아가 사파 최대 문파의 이인자 자리까지 올라간 그는 오백양이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무인이자 닮고 싶은 인물이었다.
그야말로 밑바닥에서 천산의 꼭대기까지 아득바득 올라간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그런 나찰마도의 무공을 일부라도 배운다?
그건 오백양에게 있어서 평생의 소원을 성취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씨벌, 그렇게 좋은 조건이 어딨겠냔 말이야. 씨벌, 당연히 목숨 걸고 힘든 일이니까 어르고 달래려고 그런 미친 조건까지 내거는 거겠지. 씨벌. 씨벌!”
불같은 성정으로 욕지거리를 내뱉는 오백양을 왕달이 차분하게 달랬다.
“형님, 그만 씨벌거리시구요.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항상 남들이 힘들다는 거 다 해내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황산방 새끼들 제끼고, 유씨세가 놈들 애새끼까지 다 죽이고, 온갖 인간 같지 않은 놈들 다 죽이면서 바득바득 기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니까 이번에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잘 할 수 있어요.”
“씨벌, 씨벌!”
오백양은 금화가 담긴 목함의 뚜껑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아 버렸다.
“그래. 해 봐야지. 구천지옥도법인데. 내가 그것만 배우면 이젠 적양문에서도 입지를 세울 수가 있을 것 아냐?”
오백양의 사나운 눈매가 야망으로 섬뜩하게 빛났다.
무인이란 다들 그렇다.
목함 가득한 금화보다는 자신을 초절정의 경지로 이끌어 줄 수 있을 무공이 더 탐나는 법이다.
“물론이죠. 적어도 대주 자리 하나는 내줄 겁니다. 형님, 이번 일만 성공하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요.”
“그래. 해 보자고 씨벌! 애들 다 불러와!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한다!”
오백양의 일갈에 북경 암흑가에서 일하는 수백 명의 파락호와 낭인들이 반 시진 안에 모두 집결했다.
다음 날부터 북경에는 충격적인 소문이 돌았다.
“정무관 출신은 북경에서 발 뻗고 잘 수 없다.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고, 객잔에서 술을 한 잔 마실 수도 없을 것이다!”
황양문주 오백양.
그는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유명했다.
누가 들어도 충격적인 이 소문에 북경에 사는 모든 호사가가 들떠서 수군거렸다.
정무관의 뒷배에 누가 있던가? 천무련이다.
당금의 천하제일 연합.
하늘이 내려 준 무력이라는 오만방자한 기치 아래 모든 정파 무림 문파들을 모은 희대의 기린아가 련주로 있는 천무련.
북경의 일개 암흑가 문파인 황양문이 미친 것인가?
아니면 그들도 믿는 뒷배가 있는 것인가?
끝없는 궁금증이 북경 사람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소문은 퍼져 나갔고, 머지않아 모두의 시선은 안휘에 있는 천무련의 본파로 향했다.
***
북경 정무관주 이남성은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넘기고 의관을 정제한 뒤, 정무관의 현판 앞에 죄인처럼 무릎을 꿇었다.
정무관의 교관 십여 명과 일대 제자 백 명이 그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시립해 있었다.
관주가 무릎을 꿇는다면 그 휘하에 있는 그들도 무릎을 꿇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이남성은 그들이 무릎 꿇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이건 천무련의 무인으로서 나 혼자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나의 탓이다. 너희의 탓이 아니니 북경 정무관의 사람들은 무릎을 꿇지 말아라. 주변에 보는 눈이 많다. 너희는 북경 정무관의 자존심이다.”
정무관을 세운 지 불과 몇 달이 되지도 않았으나 사람들끼리의 유대감은 마치 가족처럼 끈끈해져 있었다.
정무관의 사람들은 너무나 분해서 이를 악물고 화를 참아야만 했다.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던가?
모든 잘못은 북경 암흑가를 지배하는 황양문에게 있었다.
객잔에 밥을 먹으러 갔던 정무관 일대 제자들 십여 명이 사경을 헤맬 정도로 몰매를 맞고 돌아오고, 북경에 본가가 있는 일대 제자들은 자신의 가족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 모든 것은 황양문의 탓이었다.
암흑가의 파락호들은 철저하게 비겁했고, 반드시 정면 대결을 피했다.
화가 난 이남성과 열 명의 교관들이 직접 나섰으나 그들의 능력으론 일대 제자들에게 몰매를 가한 흉수들을 찾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북경 암흑가가 똘똘 뭉쳐서 행방을 불지 않는데 이남성 한 사람과 십여 명의 교관만으로는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련주님을 뵙습니다.”
이남성은 무릎을 꿇은 채로 정중하고 절도 있게 포권을 취했다.
쿵. 쿵. 쿵. 쿵.
둔중한 발 울림과 철컹거리는 쇳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수백 명의 건장한 무인들이 정무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근처에 사는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심지어 무기를 소지한 수백 명의 사내의 등장에 깜짝 놀란 관군들이 멀찍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조장. 아니, 이제는 이 관주라고 불러야겠네요. 왜 무릎을 꿇고 있어요? 내가 아끼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죠. 어서 일어나요.”
일대 제자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내는 새하얀 비단 천에 금사로 화려하게 장식한 무복을 입었다.
빛나는 금색의 영웅건이 마치 천인(天人)이 내려온 듯 청년을 빛나게 만든다.
건장하고 잘생긴 청년.
천무공자 장소호가 안타까운 얼굴로 이남성의 손을 잡고 일으키려 했다.
“저를 믿고 북경으로 보내 주셨는데, 불충하게도 련주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죄인입니다. 파락호들조차 감당 못 하고 주군을 번거롭게 만들었으니 그 죄가 큽니다.”
“무슨 말씀을. 이번 일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에요. 오히려 이 관장이 직접 해결하려 했으면 큰일 나는 일이었다니까요?”
“사죄드리겠습니다. 련주님.”
“에이 참, 그럴 일이 아니라니까.”
소호는 몇 번이나 거절하는 이남성을 겨우 달래서 일으켜 세웠다.
그 과정에서 북경 정무관의 일대 제자들과 멀찍이서 구경하는 북경의 거주민들은 두 가지 사실에 크게 놀랐다.
이남성이 천무공자를 향해 보이는 존경 가득한 주군의 예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모두 진심이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천무공자 역시도 이남성을 상당히 아낀다는 점이었다.
“북경 정무관주가 천무공자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구나.”
“정무관주의 충심과 절개가 대단하군. 참으로 강직한 사람이야.”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어 보이던 깐깐한 관주가 저렇게나 무너져 내리며 진심으로 사죄를 하자 많은 이들이 가슴 아파했다.
거짓으로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모두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다.
황양문의 만행을 모르는 사람이 북경에 어디 있으랴.
모든 이들이 황양문을 성토하고 싶지만, 그들의 힘이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방 조장도 왔구려.”
“오랜만이오. 이 관주. 거, 이야기는 다 들었소. 고생이 많았군.”
자신의 나이와 업적에 자부심이 과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넉살 좋고 사람들을 잘 이끌어 가는 방익지가 오랜만에 이남성과 인사를 나눴다.
방익지의 뒤에는 중소규모의 문파들에서 올라온 인재들.
천무련에서 ‘청죽조’라고 부르는 이백 명의 청년 무사들이 제각각 날카로운 기세를 뽐내며 당당하게 서 있었다.
“비학조도 왔군.”
“이 관주님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소호가 안휘를 제압할 때 흡수했던 비학검문 출신의 인재들.
양명기를 조장으로 한 새로운 비학오검(飛鶴五劍)과 비학조 일백 명도 특유의 협봉검을 허리에 찬 채 예기를 뿜어 대고 있었다.
이남성은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사내다.
그는 무표정했지만, 격정을 감추지 못하며 간절한 눈빛으로 소호를 바라보았다.
“련주님, 언제 가시는지요?”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았다.
황제와 자금성이 존재하는 북경에 오면서 이만한 병력을 끌고 왔다.
자칫 역모라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위험한 상황까지 감수한 것은 단 한 가지의 이유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가야죠.”
소호는 멀찍이서 그들을 지켜보는 관군들.
그들 중 관복을 입고 선두에 서 있는 중년의 사내를 힐끗 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북경의 사례교위(司隷校尉)와 이미 이야기를 나눴어요. 황양문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았으니…….”
소호는 환하게 웃었다.
태양처럼 밝은 미소.
하지만 알 수 없는 섬뜩함이 그 미소 너머에 흐른다.
“우리 관도들을 괴롭힌 자들을 당장 박살 내러 가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