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권 21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21)
황양문을 단죄하겠다 말하는 소호의 선언은 많은 사람을 흥분시켰다.
“결국 천무련이 황양문을 치는구나!”
“세상에, 북경이 뒤집어지겠어!”
구경꾼들이 흥분해서 떠드는 사이, 군중들 중의 몇 명이 눈에 띄지 않게 자리를 벗어나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소호가 눈짓을 하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방익지가 청죽조의 경험 많은 무인 세 사람과 함께 골목길로 사라졌다.
짝! 짝!
소호는 모두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박수를 두 번 친 뒤에 큰 소리로 외쳤다.
“청죽조와 비학조는 모두 나를 따르세요. 이 관주는 어떻게 할래요? 함께 가실래요?”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간절히 고개를 숙이는 이남성의 분위기가 결연했다.
“알았어요. 나머지 정무관 사람들은……. 물을 필요도 없네요?”
북경 정무관의 교관 십여 명.
그리고 구십여 명의 일대 제자들의 눈빛이 어찌나 간절했던지 귀기(鬼氣)가 흐를 지경이었다.
소호는 마음이 흡족하여 크게 웃었으나, 그래도 지켜야 할 선이 있음을 명확하게 인지시켰다.
“일대 제자들은 아직 제대로 무공을 익히지 못했으니 싸움에 참가하는 것은 금합니다. 단, 구경꾼들과 함께 멀리서 지켜보는 것은 허가하죠.”
“존명!”
정무관의 교관들이 허리를 숙이자, 일대 제자 아이들도 일제히 포권을 취했다.
천무공자 장소호.
추마대 청죽조 이백 명.
비학조 일백 명.
그리고 북경 정무관의 교관 십여 명.
총 삼백 명이 넘는 인원이 북경의 심처로 움직이자, 그 뒤로 수백의 구경꾼들이 따라붙었다.
은밀함과는 거리가 먼 움직임.
북경 암흑가의 판도를 뒤흔드는 싸움의 시작이었다.
“멈추시오! 무슨 일로 왔소?”
“여긴 통정사(通政司)에서 일하시는 우(右) 참의(參議) 강 대인의 집이오. 그 이상 병력을 움직이면 경종을 울리겠소!”
눈에 다 담기 힘들 정도로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대저택은 두 명의 경계병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집 앞에 나타난 수백 명의 무인들을 보고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통정사는 황제에게 전해지는 서신들을 관리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평상시라면 통정사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많은 이들이 긴장하여 자신의 신분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지금 그들에게 다가오는 자들은 그들의 생각과 달랐다.
“그대들은 누구냐고 물었소!”
“이곳 북경에서 그렇게 수백 명이 떼를 지어 움직이다니. 황실에서 사람이 움직일…… 컥?”
파바밧!
퍼벅!
큰 소리로 엄포를 놓으려던 문지기가 몸을 파르르 떨더니 끈 떨어진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다.
대화도 제대로 나누기 전에 소호가 아지랑이처럼 상체가 흔들리는 신법으로 그들의 사각지대로 파고들어 요혈을 짚은 것이다.
그 번개 같은 움직임에 따라온 구경꾼들이 신법이 대단하다며 찬사를 보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번쩍하고 문지기들이 쓰러지더니 그곳에서 소호가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이상하네요. 제가 알아보니 여기 주인은 통정사 우참의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던데요? 이 큰 저택을 관리하고 있는 자는 누구일까요?”
소호는 웃는 얼굴이다.
눈을 멀뚱히 뜬 채 쓰러져 버린 문지기 두 사람을 소호가 뒷짐을 지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문지기의 두 눈에 서서히 공포가 떠올랐다.
“여기가 황양파죠?”
문지기들의 눈빛이 흔들린다.
소호의 웃음이 점점 짙어졌다.
“련주님!”
북경의 골목길로 첩자들을 쫓아갔던 방익지와 청죽조 무인들이 소호에게 급히 다가와 보고했다.
“확실합니다, 련주님. 군중들 사이에서 빠져나간 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곳으로 향하던 와중에 저희에게 잡혔습니다.”
“어? 방 조장, 상처가 있네요? 반항이 심했어요?”
“부끄럽습니다, 련주님. 하핫! 죽기 살기로 덤비더군요. 이쪽은 죽일 생각은 애초에 없었는데 말입니다.”
방익지는 능구렁이처럼 씩 웃으며 자신의 손에 남은 생채기를 보여 주었다.
사람의 이빨 자국이라는 게 선명히 보이는 상처였다.
그리 크지는 않은 상처지만, 온갖 경험을 많이 쌓은 데다 절정의 고수인 방익지가 상처를 입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흥미롭네요. 전령이 강했어요?”
“아이고, 그런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정신력이 독했습니다. 많은 정보를 토해 내진 않았는데, 그래도 이곳이 중요한 거점이라는 건 알아냈지요.”
방익지가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은 칭찬을 바라는 덩치 큰 개와 같았다.
소호는 방익지에게 고생했다고 말해 준 뒤 검집에 손을 댄 채 살기를 피워올리는 청죽조와 비학조 무인들을 보면서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제가 먼저 들어갑니다. 그 후에 다 같이 쓸어버리죠.”
“존명!”
콰앙!
소호가 내뻗은 단파각 일격이 커다란 대문의 빗장을 부쉈다.
이미 저택 내부에는 험상궂은 인상의 파락호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숫자는 스무 명쯤 될까.
술판을 벌였는지 각종 음식이 가운데 있고, 그 옆엔 다 먹은 걸로 보이는 술병들이 가득했다.
“술 냄새가 독하네요.”
얼마나 독한 화주를 먹어 댔는지 저택 내부가 술냄새로 찌들어 있었다.
소호는 혀를 찼다. 저택은 크고 고풍스러웠으며 넓었다. 이토록 큰 저택을 파락호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큰 손해다.
“황양문 문주 오백양은 어디에 있어요?”
스릉―.
저택 내부에 있는 파락호들은 확실히 문지기와는 달랐다.
그들은 가타부타 적아를 판별하는 쓸데없는 대화 대신, 사람 팔뚝만 한 직도를 뽑아 싸움을 준비했다.
“내가 누군지는 알아요?”
대답은 없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한 눈빛.
파락호들 주제에 결연한 투사라도 되는 듯한 저 얼굴은 소호가 어떤 인물인지 분명히 아는 듯한 분위기다.
“하하핫!”
재미있다.
소호는 가슴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도 술판을 벌였고?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정무관 관도들을 반죽음으로 만들어 놓고 술판을 벌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하지만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이기에 파락호로 사는 것이리라.
소호는 백색 교어 가죽으로 감싼 박도 손잡이를 툭툭 두드렸지만 결국 칼을 뽑지는 않았다.
파락호들의 수준은 한눈에 알 수 있다.
일류 수준.
북경이라는 대도시의 파락호들인 만큼 제법 뛰어난 사람들이지만 천무공자의 상대는 아니다.
“한 놈만 남겨 두면 되겠죠?”
문주인 오백양을 불러올 놈만 남아 있으면 되리라.
전의에 불이 붙은 소호는 순속의 움직임으로 파락호들의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캬하앗!”
“우와악!”
제각각 기묘한 기합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파락호들의 기세가 살벌했다.
신묘한 초식은 아니지만 일격에 치명적인 요혈만 노려오는 동작은 사파의 무공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소호는 선인지로(仙人之路)처럼 팔을 쭉 뻗어오는 파락호의 앞발을 발끝으로 툭 걸어서 끌어당겼다.
사람이 걸음을 걸을 때는 오른발에서 왼발, 왼발에서 오른발로 체중을 뒤에서 앞으로 옮기는 과정이 반복된다.
특히 무기를 휘두르는 순간!
적절한 순간에 내딛으려는 발을 끌어당기면, 그는 중심을 완전히 잃고 다리가 쩍 벌어지는 법이다.
“헉!”
소호는 빙판에 미끄러지듯 다리가 찢어진 파락호의 손목을 붙잡고 칼을 빙글 돌려 발등에 꽂아 넣어 버렸다.
“끄아악!”
그 상태에서 곧바로 양발을 띄워 허벅지 안쪽을 걷어차고 턱을 발로 밀어 버리니 덤벼들던 파락호가 덜컥 멈춰선 채 신음만 흘리며 무력화된다.
쉬이익―.
그사이 등 뒤에서 찔러 오는 칼이 매섭다.
소호는 허리를 숙이며 뒤쪽으로 진각을 밟았다.
쿵!
몸은 반회전.
절도 있게 몸을 튕기며 팔꿈치로 명치를 찌르는 이문정주.
쾅!
기습을 노리던 파락호가 뒤로 일 장이나 튕겨나가 피를 토하며 바닥을 뒹군다.
쉬익!
목을 노리는 단도를 고개만 젖혀 피해 낸 뒤 태극권의 수법으로 추수를 하듯이 손목을 휘감았다.
툭.
소호의 손 안으로 상대의 단도가 빨려들 듯 들어온다.
소호는 손 끝에 생겨난 와류를 그대로 살려 작은 반원을 커다란 반원으로 키웠다.
우두둑!
“끄아악!”
손목이 꺾이고, 팔꿈치가 들리면서 몸이 뒤틀린다.
소호는 그 상태로 태극권 장타 일격으로 상대의 옆구리 아래 기문혈을 올려쳤다.
퍼엉!
얻어맞은 곳은 우측 기문혈인데, 굉음은 왼쪽 등허리 부근에서 터져 나갔다.
“카학!”
상체가 기우뚱하게 기울어져 버린 파락호가 눈에서 초점을 잃은 채 무너져 내린다.
다음은 유난히 커다란 대도를 든 사내였다. 손잡이도 길고 칼날도 크다.
관운장이 사용했다는 청룡언월도에 가까운 생김새다.
어떻게 보더라도 자신의 실력보다 버거운 무기를 지닌 파락호가 일도양단의 기세로 무기를 내리쳤다.
“큰 무기는 싫어하는데.”
소호는 칼날이 떨어지기 전에 이미 상대의 품안에 파고든 뒤 등각에 이은 연환퇴를 펼쳤다.
빠각!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차올린 오른발이 대도를 휘두르던 파락호의 머리를 올려찼다.
덜컥, 파락호의 머리가 부러질 것처럼 뒤로 휘청 꺾였다.
소호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왼손으로 아직도 떨어져 내리고 있는 창을 붙잡고, 오른발로는 이미 정신을 잃어버린 상대의 목을 짓누르듯 아래로 내리찍었다.
콰앙!
대도를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엎드리듯 쓰러진다.
모든 것은 순식간.
선인지로의 초식으로 칼을 휘두르던 파락호부터, 등을 찔러 오던 자, 단도로 목을 노리던 자, 대도를 내리찍던 자가 쓰러지는 것은 불과 두 호흡에 불과했다.
심지어 소호는 내공을 격발하지도 않았다.
오직 육체의 힘만 사용했을 뿐.
그저 초식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적절한 파훼법만으로 쓰러뜨린 셈이다.
“오오오!”
“흐음!”
이미 천무공자의 능력을 잘 알고 있던 천무련 사람들조차 신음을 흘렸으니, 정무관의 일대 제자들의 심정은 어땠겠는가.
그들의 눈에는 덤벼들던 파락호들이 번쩍! 하는 순간 자기들이 알아서 쓰러지는 것처럼 보일 만큼 모든 움직임이 빨랐다.
“천무공자……! 대단하구나……!”
네 명이 덤벼들었지만 서 있는 건 오직 한 사람뿐.
장소호는 단 하나의 생채기도 없이 마치 무신처럼 우뚝 서 있었다.
“한꺼번에 덤비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소호가 태양처럼 환하게 웃는다.
“크아아아!”
스무 명가량의 파락호들이 괴성을 지르며 일제히 달려들자 이번엔 청죽조와 비학조가 날 듯이 뛰어들어 소호의 주변을 둘러쌌다.
“련주님, 잡졸들은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방익지 조장의 손짓에 청죽조 무인들이 파죽지세로 파락호들을 쓰러뜨렸다.
바로 그 때, 그들이 들어온 입구의 정반대 쪽.
저택의 후문에서 커다란 웃음과 함께 수백의 파락호들이 등장했다.
“천무공자! 이렇게 처음 만나게 되는구려!”
온몸에 털이 단 하나도 없는 흉악한 인상의 사내.
황양문 문주 오백양이 한 손에 사람 머리통만 한 가죽 주머니를 하나 든 채 나타나 득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소호는 가만히 그런 오백양의 무위를 짐작해 보았다.
‘절정. 꽤 강하지만 그뿐.’
“오백양?”
“그렇소! 내가 황양문의 문주 오백양이오!”
오백양이 손을 들어 올리자, 갑자기 정문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이남성과 정무관의 교관들, 그리고 일대 제자들 수십 명이 있는 방향이었다.
“파락호들이 몰려듭니다!”
“포위되었습니다!”
북경에 있던 파락호들이 모조리 몰려온 것처럼 엄청난 규모의 인원이 커다란 저택 전체를 둘러쌌다.
오백양은 흉터로 가득한 얼굴을 꿈틀거리면서 소호에게 물었다.
“감히 천무공자의 명성에 비할 바는 아니오만, 나도 북경에선 꽤나 인상적인 별호로 불린다오. 혹시 천무공자께서는 내 별호가 무엇인지 아시는가?”
소호는 저택을 둘러보고, 쓰러져 있는 파락호 스무 명.
그리고 발밑에 널브러진 음식과 술병들을 바라보았다.
“화귀(火鬼)?”
오백양은 자신의 팔뚝을 온통 뒤덮은 흉악한 화상 흉터를 선보이며 웃었다.
“그렇소. 내가 바로 그 불귀신이오.”
화르륵―.
오백양이 등에서 칼을 뽑아 드는 순간 칼날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