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권 22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22)
강호 무림에서 사용되는 화공(火功)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태양염왕의 극양무극도와 같은 양강기공이다.
북해빙궁의 극음진기가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극한의 차가움이라면, 양강기공이라 일컬어지는 극양진기는 공기가 펑펑 터져 나갈 정도로 극도의 열기를 뿜어 내는 기운이었다.
내공심법을 익힐 때부터 양기를 쌓아 실제로 손과 발로 불을 격발시키는 무공이 양강기공이니 그야말로 진정한 화공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엄밀히 따지자면 공(功)이 아니라 술(術)이라고 불러야 할 화술사(火術士)들의 기술을 뜻했다.
기름, 독한 술과 같은 재료를 기가 막히게 사용하고, 은밀하게 화섭자를 통해 불을 일으키는 모습은 마치 도술을 일으키는 선인 같아 보일 지경이다.
화술이라니. 그건 흔히 약장수들이나 쓰는 것 아닌가 싶겠지만, 이 또한 고수의 영역에 들어서면 마치 변검의 고수들처럼 언제 어떻게 불을 사용하는지도 모르게 화공을 펼칠 수 있었다.
북경의 화귀(火鬼), 오백양은 화술사였다.
어린 시절 유랑 극단에서 화술을 배운 그는 잠을 자다가도 숨 쉬듯이 불꽃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불의 묘리를 깨달았다.
불의 모든 것을 이해한 불의 달인.
그게 오백양이 직접 제작한 그의 화룡도가 특별한 이유다. 오백양이 엄지손가락으로 호수구를 딸깍, 소리가 나게 올리는 순간 이미 칼날에 불이 붙어 뜨거운 열기를 뿜어 내고 있었다.
속이 텅 비어 있는 칼등에 가득 채워 둔 고래 기름과 호수구에 숨겨 둔 화섭자의 조화였다.
오백양은 자신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사람 머리통만 한 가죽 주머니를 앞으로 집어 던졌다.
애초에 허술하게 묶여 있었던 가죽 주머니가 퍽 터지면서 악취가 나는 기름이 바닥을 적셨다.
“설마!”
“이 커다란 저택을?”
거기까지 봤는데 그의 의도를 모를 수 있겠는가.
소호와 천무련 무인들의 안색이 급변하는 것을 보면서 오백양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천무공자! 그대 혼자라면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겠지. 나도 내 화공의 한계는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다른 동료들은 어떨까? 강호에 명성이 높은 천무공자는 동료를 버리고 혼자 도망칠 것이오?”
오백양이 불이 붙은 화룡도를 바닥에 내리치는 순간, 악취가 나는 기름에 폭발하듯 불이 붙었다.
마치 작은 태양이 하나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듯했다.
강렬한 빛이 주변의 모습을 지운다.
시야가 명멸했다.
한순간에 뜨겁게 달궈진 공기가 훅― 하고 온몸에 끼쳐들고, 그 후엔 건물 밖에서부터 불꽃을 향해 바람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바람이 등을 떠미는 듯했다.
불꽃 속에 들어가라고.
도망칠 곳은 없다고 말이다.
오백양은 심지어 용의주도하게 바닥에 미리 무언가 장치를 해 둔 모양이었다. 한 마리의 거대한 구렁이가 기어오듯 뜨거운 불꽃이 몸을 길게 늘어뜨리며 엄청난 속도로 소호를 향해 구불구불 다가왔다.
“발밑에 불이 붙는다!”
“물러서!”
화르르르륵―.
파락호들이 술판을 벌였던 자리에 술 냄새가 지독한 것은 단순히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자리 자체가 거대한 덫과 같았다.
펑! 하고 바닥에서부터 치솟은 불꽃이 순식간에 이미 쓰러져 있던 파락호들을 덮쳤다.
“끄아아악!”
“으악!”
이미 소호의 손에 박살 나고 쓰러져 있던 사내들이 어떻게 불을 피하겠는가.
발등이 칼에 꿰인 자, 손목이 부러진 자.
이미 거동도 하기 힘들었던 그들은 불지옥에 떨어진 악귀들처럼 발작적으로 꿈틀거리다가 쓰러진 뒤 미동도 하지 않았다.
뜨거운 불꽃이 그들의 몸을 잡아먹듯 뒤덮었다.
“부하들을 헌신짝처럼 버리는구나!”
“이런 도의도 없는 파락호들……!”
청죽조와 비학조의 무인들이 크게 놀라 두 눈을 의심했다.
“설마? 그럼 아까 그 술냄새가, 그럼 바닥을 다 술로 적셔 둬서……?”
“멍청아! 그 정도로 저렇게 되겠냐! 당연히 바닥 밑에 뭔가 숨겨 뒀겠지! 빨리 피해라! 후문으로 달려나가! 련주님께 방해가 된다!”
방익지가 사태를 파악하고 지시를 내렸지만 한발 늦어 버렸다.
펑! 펑! 펑!
파락호들이 술판을 벌였던 장소를 중심으로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포위하듯 바닥이 터져 나갔다.
바닥이 한 번 터질 때마다 그 밑에 숨겨 두었던 기름인지 술인지 모를 액체들이 치솟고 그 충격으로 주변에 더 큰 불이 붙었다.
“숨이!”
“콜록! 콜록!”
불꽃은 타오르면서 주변의 공기를 탐욕스럽게 집어삼킨다.
순식간에 매케한 연기가 피어오른 것도 한몫을 했다.
모두가 무공을 익힌 무인임에도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천지사방이 불이었다.
“과연.”
나지막한 한 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소호는 곧바로 전력을 끌어 올렸다.
고오오오―――.
역근경진기.
그 오묘한 불법의 힘이 전신을 휘감는다.
파라라락―.
쿵.
크게 양팔을 벌려 숨을 들이켠 뒤 자세를 낮추고 진각을 밟는다.
고오오오!
몸 안에서 들끓는 내력이 장중한 흐름으로 대주천을 이루고 있었다.
돌고, 돌고, 돈다.
한 번 대주천을 이룰 때마다 내공의 흐름이 점점 빨라졌다.
내공이 온몸의 혈도를 회전할 때마다 발생되는 힘이 소호의 전신 근육과 혈도에 쌓였다.
“스으으으으―――.”
풀피리를 불 듯 숨을 가늘고 길게 내쉰다.
한쪽 발만 앞으로 향한 채, 왼손은 손바닥을 펼치고 오른손으로는 가볍게 계란을 쥔 것처럼 거머쥔 주먹이 거대한 불꽃의 장벽을 겨누었다.
드드드드―.
육체 내부의 압력이 시시각각 거세진다.
소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터지기 직전의 가죽 주머니가 된 것처럼 온몸의 감각들이 아프다며 비명을 질렀으나, 소호는 오히려 웃음을 참고 있었다.
재밌다.
흥미롭다.
파락호들을 때려눕히던 건 얼마나 지루했던가.
생전 처음 해 보려는 경험에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다.
할 수 있을까?
아마 가능할 거다.
소호는 그동안 머릿속에 ‘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생각한 것을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천무련에서 소호에 버금가는 무공광.
패원강이 그 건장한 육체로 선보였던 하나의 초식이다.
“통배권.”
흡기, 진각, 회선, 격발.
극도로 압축된 내공의 힘이 소호가 내뻗는 권격을 따라 한순간에 터져 나갔다.
콰아아아아아!
물이 가득 찼던 둑이 터져 나가듯.
일거에 쏟아져 나간 내공의 힘이 정면을 때렸다. 그러자 불꽃 벽은 거대한 부채꼴의 흔적을 남기며 날아가 버렸다.
콰직!
심지어 저택의 입구가 부서져서 무너져 버릴 정도의 힘이었다.
통배권의 밀어내는 힘이 어찌나 강했던지 입구 쪽에 있었던 이남성 관주와 정무관의 일대 제자들은 해일에 휩쓸린 사람들처럼 무력하게 바닥을 뒹굴었다.
마치 거대한 거인이 초를 입으로 불어서 꺼 버린 듯한 광경이다.
불꽃 벽은 사라졌고, 모두가 들어왔던 저택의 정문까지 길이 열렸다.
소호는 주먹을 내뻗은 자세 그대로 가만히 힘의 여파를 수습했다.
그러면서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지글지글 끓는 땅.
아직 좌우 양쪽과 뒷방향에는 불꽃이 여전하다.
방익지는 소호의 눈짓을 알아듣고 곧바로 몸을 날렸다.
“어서 움직여! 곧바로 저택을 이탈한다!”
방익지가 날 듯이 뛰쳐나가자 비학조와 청죽조도 철새들이 날아오르듯 곧바로 저택 밖으로 우루루 뛰쳐나갔다.
남은 것은 단 한 명.
두 눈을 의심할 정도의 위력을 선보인 소호 한 사람뿐이었다.
“아차.”
그런데 소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익숙지 않은 무공.
단지 원리만 따와서 사용하다 보니 그 후유증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온몸과 혈도에 극도로 압축했던 내력을 한순간에 내보내자 엄청난 탈력감이 소호의 몸을 짓누르는 것이다.
마치 물 밖으로 끄집어내는 바람에 입만 벙긋거리는 물고기와 같다.
근육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한순간 텅 빈 단전과 혈도에 다시 움직일 정도의 내력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열 번의 호흡과 소주천 일 회가 필요했다.
‘시간이……!’
불꽃 벽이 다시 생겨나는 건 관계없다.
소호의 신법과 무공 실력이면 다시 한 번 벽을 뚫고 탈출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소호가 사용한 강력한 통배권이 저택의 벽면을 일부 부숴서 무리를 줬다는 점이다.
우드득―.
까드드드득!
우지끈!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저택을 지탱하는 대들보 두 개가 두 동강이 나서 바닥으로 떨어진다.
심지어 천장이 무너지며 그 위에서 끈적한 무언가가 소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오백양 문주. 준비 많이 했네.’
적이지만 감탄이 나온다.
소호는 찰나를 수십 번으로 쪼갠 것 같은 짧은 순간, 멀리 일렁거리는 불꽃 벽 너머에서 다급하게 그를 바라보는 이남성 관주와 눈이 마주쳤다.
“안 돼!”
평소에 감정 표현을 절제하던 그답지 않게 극도의 공포와 절망이 담겨 있는 그의 목소리와 동시에.
우르르릉―.
끈적한 기름을 뒤집어쓴 소호의 머리 위로 불타는 건물의 잔해들이 쏟아져 내렸다.
***
“됐어!”
오백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산이나 들에 덫을 놓아 본 적이 있는 자는 안다.
공을 들여 만든 덫에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이 걸려들 때의 그 쾌감.
자신의 지략과 준비성이 상대의 조심성을 압도하는 승리가 얼마나 달콤한지.
심지어 덫에 걸린 상대가 짐승이 아니라 사람.
그중에서도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희대의 인재라면?
그 쾌감이란 가히 말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다.
“크하하하핫! 됐다! 됐다고! 북경의 화귀, 이 오백양 님이 천무공자를 잡았다!”
사실 처음엔 그저 작은 건물에서 천무공자를 위한 덫만 놓으려 했었는데, 이왕 투자하는 거 더 크게 투자하지 않으면 큰 고기를 낚지 못할 거란 부문주 왕달의 조언을 따른 것이 주효했다.
통정사의 고관대작이 머물던 저택을 비싼 돈을 주고 사고, 그걸 통째로 덫으로 쓰는 것이 얼마나 아까웠던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덕에 죽지 않고 사냥에 성공했으니 전혀 아까워할 일이 아니다.
쓸모없는 부하 녀석들 몇 명을 가족으로 협박해서 안에 미끼로 밀어넣은 것도 주효했다.
천무공자뿐만 아니라, 그가 혼자 도망칠 수 없게 부하들도 같이 밀어 넣은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탁월했다.
쿠구구궁!
거대한 저택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굉음이 신나는 북소리처럼 느껴졌다.
오백양은 희열에 가득 차 양팔을 벌렸다.
저택 하나가 통째로 거대한 장작이 되어 거대한 불꽃을 피워 낸다.
“형님! 형님이 천무공자를 잡았습니다!”
“문주님, 축하드립니다!”
“황양문 만세! 문주님 만세!”
주변에 모여 있던 부문주 왕달과 파락호들이 큰 소리로 오백양을 칭송했다.
이제 거대한 명성은 그들의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천무련의 무인들과 최대한 정면으로 싸우지 않으면서 미리 준비한 안가로 피신하면…… 어?”
부문주 왕달이 서둘러 다음 단계를 조언하던 중 말문이 막혀 뻣뻣하게 굳었다.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있었던 오백양도 두 눈을 부릅떴다.
콰드득―!
이미 새빨갛게 달아오른 숯더미가 부자연스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쾅! 하고 건물의 잔해를 터뜨리며 안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랐다.
“설마?”
떨리는 오백양의 시선이 한 곳에 못 박힌다.
온몸이 활활 타고 있는 한 남자.
도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건지 짐작도 되지 않는 천무공자가 불꽃에 휩싸인 채 오백양을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