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권 23화
제40장 백호마왕(白虎魔王) (23)
‘죽는 건가?’
악취가 진동하는 어유(魚油)를 뒤집어쓰는 순간 소호는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실감했다.
불길 속에서 기름을 뒤집어썼으니 온몸에 불이 옮겨붙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새빨간 불길이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한순간에 번졌다.
“흡!”
소호는 본능적으로 내공을 한순간에 강하게 방출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일시적으로 불길이 일렁거리기는 했다.
단지 그뿐.
단전만 텅 비어 버렸을 뿐이지 지글거리는 열기가 옷과 머리를 태우는 건 매한가지였다.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자연의 법칙을 깨부술 수 있겠는가.
추우면 얼고, 뜨거우면 타는 게 자연의 이치거늘.
극도의 고통에 소호가 입을 쩍 벌리고 몸을 웅크렸다.
이대로 죽는가?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고통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달아오르는 바로 그 순간, 소호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우우웅―.
시작은 작은 떨림이었다.
목에 걸고 있었던 집혼기가 흔들리더니 그 안에서 차디찬 빙백신기가 몸 안으로 스며 들었다.
펄펄 끓는 지옥불 속에서 마주하는 빙백신기는 어둠 속에서 발견한 한 줄기의 빛과 같았다.
소호는 지글지글 끓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 언저리를 내려다보았다.
‘설지 선배?’
그녀의 얼굴이 보이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새하얀 얼굴.
무표정한 듯 아련하게 띄우는 미소.
은어처럼 가늘고 긴 손가락.
손과 손이 맞닿은 채 서로 내공을 단련할 때마다 느끼던 바로 그 기운이 소호의 몸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집혼기에서 쏟아져 나온 빙백신기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단전으로 향하더니 그곳에서 살며시 자리를 잡았다.
세상은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는 법.
단전에 거점을 마련한 빙백신기는 이젠 불에 지글지글 타고 있는 피부를 진화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우우우웅―.
통배권으로 내공을 크게 소모한 데다, 그나마 남아 있던 내공조차 마지막에 모조리 방출해 몸이 텅 비어 있던 것이 소호에게는 천운으로 작용했다.
집혼기의 내력을 거부할 힘이 소호에겐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작은 빙백신기.
곧이어 엄청난 양의 내력이 소호의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콰과과과―!
소호는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온몸으로 맞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집혼기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소호의 단전으로 흘러 내려오고, 그 후엔 전신의 혈도를 따라 움직이며 대주천을 이루는 과정이 소호의 몸이라는 토양 위에 깊고 선명한 물길을 새겨 놓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집혼기에서 시작되는 흐름이 몸 안에서 수없이 반복된다.
드드드드―.
극한의 고통과 정신이 아찔해지는 쾌감이 단편적으로 반복되었다.
소호는 몸을 웅크렸다가 등을 뒤로 활처럼 굽히기를 반복했다.
온몸의 피부가 불에 타서 지글지글 끓다가 빙백신기가 흘러나와 그 열기를 진화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급가열과 급랭.
마치 강철을 단조하듯 사람의 몸을 몰아붙이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소호의 피부가 점점 벗겨지더니 떨어져 내렸다. 처음엔 붉고 징그러웠던 피부가, 아기처럼 새하얀 뽀얀 색에 불이 붙거나 화상을 입지 않는 몸으로 변해 갔다.
반박귀진(返樸歸眞)!
소호는 순식간에 노화순청의 경지를 넘어 한서가 불침하며 내기가 끊임없이 순환하는 높은 경지에 올랐다.
“꺼어어…….”
텅 비어 말라붙은 폐부로 뜨거운 열기가 빨려 들어간다.
우지끈!
콰과광!
만 근이 넘는 거대한 저택의 잔해 속에서 소호는 가만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반복했다.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사람 몸통보다도 더 큰 두께의 대들보가 숯이 되어 활활 타고 있었다.
콰앙!
소호는 불구덩이 속을 헤엄치듯 양팔을 위로 쳐올렸다.
그저 육합권의 기본 권격이었을 뿐인데 만 근의 잔해들이 살얼음 깨지듯 터져 나갔다.
뻥 뚫린 구멍으로 시원한 공기가 빨려 들어온다.
소호는 본능적으로 그곳을 향해 몸을 솟구쳐 올렸다.
화아아아악―!
온몸에 붙어 있던 불길이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일시적으로 더 강하게 타올랐다.
불도 숨을 쉰다.
공기가 들어오면 불길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주변의 공기를 지글지글 끓이기를 잠시.
어느 순간, 거대한 숯가마나 다름없었던 곳에서 견디기 위해 힘을 쓰던 빙백신기의 힘이 지금 소호의 몸을 태우는 불꽃의 힘보다 강해졌다.
따뜻했던 강물이 겨울에 살얼음이 끼며 얼어붙듯.
소호의 몸에서 들끓던 불꽃이 식는다.
그뿐인가?
이젠 아예 살얼음이 끼면서 온몸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스으으―――.”
숨을 내쉬자 새하얀 연기가 흘러나온다.
소호는 멀리, 불타고 있는 건물 너머에서 입을 쩍 벌린 채 굳어 있는 이 사태의 원흉을 발견했다.
황양문 문주 오백양.
눈썹 한 올 없이 매끈한 대머리에 지렁이 같은 흉터가 가득한 험악한 사내가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 그……. 아…….”
소호는 웃었다.
입안이 말라붙은 탓에 아직 말은 나오지 않는다.
‘내가 살아나온 게 놀라워?’
울컥하고 강한 감정이 가슴에서 들끓었다.
소호가 겪어야 했던 고통.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던 그 순간이 얼마나 길었던가.
집혼기가 웅웅 떨린다.
소호의 감정이 격해지자 자연스럽게 집혼기도 반응했다.
몸에 흘러드는 힘이 점점 강해지면서 두 눈에서 핏빛의 광채가 강해졌으나 소호는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했다.
“으아아아!”
커허어어엉!
마치 맹수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소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타타탓!
소호의 발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잠시 꺼졌다가 다시 화르르 타올랐다.
짐승처럼 달려간 소호가 소림오권.
호권(虎拳)의 묘리로 짧은 권격을 내리쳤다.
“문주!”
“피하십쇼!”
그 짧은 순간,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한 파락호 세 사람이 오백양의 앞을 가로막는다.
소호는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번뜩이는 혈광.
소호의 주먹이 콰직! 하고 앞을 가로막은 파락호 한 사람의 양팔을 부러뜨리고 갈비뼈까지 뭉개 버렸다.
“컥.”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 파락호의 눈에서 초점이 흐려진다. 피를 토하며 고꾸라진 그는 회생할 수 없다.
소호는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나머지 두 사람에게 가볍게 발을 딛으며 쌍장을 뻗었다.
똑같은 소림오권.
호랑이가 앞발을 휘두르듯 살짝 손가락을 굽힌 장저(掌低)로 두 사람의 목 옆, 승모근을 내리친다.
콰직!
퍽!
마치 활시위가 끊어지듯 승모근이 터졌다.
엄청난 위력.
쇄골과 어깨뼈가 뭉개졌고, 그걸로도 모자라 전달된 침투경이 두 사람의 내장을 엉망으로 짓이겼다.
“카학!”
“커헉!”
파락호들이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무릎을 꿇는다.
소호는 세 사람을 쓰러뜨린 자신의 양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사람의 목숨이 스러지는 것이 너무나 쉽고 간단했다.
죄책감이 들어야 마땅할 텐데, 이상하게도 소호의 마음속은 길을 걷다 실수로 개미를 밟은 것처럼 차분했다.
‘그랬구나. 별것 아니었구나.’
소호의 두 눈에서 혈광이 짙어진다.
죄책감이 들 필요는 없다.
어차피 파락호들.
소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죽고도 남았을 함정을 준비한 사람들이다.
“챠하앗!”
그때, 오백양은 무릎을 꿇고 쓰러진 부하의 등을 짓밟고 뛰어오르며 소호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러왔다.
화아악!
오백양의 화룡도가 불을 뿜는다.
힘차게 휘두른 도격이 허공에 길고 화려한 잔상을 남겼다.
‘무공은 나쁘지 않네.’
소호는 오백양의 무공을 여유롭게 평가했다.
오백양?
북경 암흑가의 지배자인 만큼 약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천무련의 련주.
천무공자 장소호다.
쩌엉!
쾅!
일격에 오백양의 손가락 세 개가 뭉개지며 화룡도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소림오권 중 호권은 허리의 힘을 중시하는 무공이다.
일권에 백근(百劤)의 공력을 얻기 위해 허리와 등의 힘을 집중하는 것이 무공의 요체다.
양팔의 근골(筋骨)과 양손의 악력(握力)만을 사용했음에도 절정 고수인 오백양의 왼손이 뭉개지며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푸우욱!”
마무리를 위해 소호가 쌍장을 내밀기 직전.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오백양이 입에서 비린내 나는 기름을 소호에게 분수처럼 뿜어냈다.
따닥!
오백양이 오른손을 튕기자 거센 불꽃이 일어나 소호의 전신을 다시 한 번 뒤덮었다.
흥미로운 기술.
하나 인정해 줘야 할 것은 아무리 강한 사람을 상대하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화술을 써먹을 시점을 찾아내는 요령이 기가 막히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무인이었다면 당황하거나 큰 화상을 입기 충분했을 것이다.
‘대단하네. 그런데 내가 숯가마 같은 곳에 있다가 멀쩡하게 나왔는데 그런 게 통하겠어?’
물어볼까 했으나 그만뒀다.
오백양은 표정으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절규, 절망, 공포.
일순간 공기가 훅― 달아오를만큼 강력한 화술이었지만, 소호의 몸은 여전히 서리로 덮여 있었다.
백설지가 넘겨준 빙백신기가 워낙 강력했던 탓이다.
오히려 시시각각 소호의 몸에 뒤덮인 서리가 두꺼워지는 중이니 그깟 불놀이 정도가 소호에게 타격을 줄 리 만무했다.
소호는 맹수처럼 앞발을 휘둘러 오백양을 후려쳤다.
빠각!
오른팔이 부러진 오백양이 바닥을 뒹군다.
“문주를 구해라! 절반은 기름을 더 준비해! 절반은 당장 달려가서 문주를 끌어안고 돌아……!”
급히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부문주인 왕달이다.
황양문의 유일한 지식인.
소호는 그의 존재를 확인한 뒤 쌍궁복호식(雙弓伏虎式)으로 오백양의 목을 꺾어 버렸다.
콰직!
“……!”
명령을 내리던 왕달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침묵이 감돌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가 사방을 잠식하고 있었다.
소호는 펄쩍 뛰어올라 왕달의 곁을 지키는 호위 무인 두 사람을 호학쌍형권(虎鶴雙形拳)으로 박살 내 버렸다.
번개처럼 빠른 소호의 주먹을 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설령 막는다고 한들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이기지 못하고 몸이 부서진다.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는가.
그야말로 괴물.
왕달은 눈앞에서 처참하게 널브러지는 무인들을 보고, 소호의 모습을 멍하니 보면서 중얼거렸다.
“마왕(魔王)……!”
인세에 없을 모습.
사람의 힘으로 당해 낼 수 없는 능력을 지닌 자.
주변에서 지켜보던 파락호들도 왕달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
새하얀 서리에 뒤덮인 몸.
눈에서 뿜어내는 새빨간 혈광.
그리고 호랑이 같은 움직임.
그 모든 게 합쳐지니 지옥에서나 존재할 법한 마왕이 되어 버렸다.
“백호마왕(白虎魔王)……!”
공포에 질린 왕달과 파락호들을 보면서 소호가 웃는다.
후두둑―.
얼굴을 뒤덮었던 서리가 반쯤 떨어져 내리니 그 안에서 맨몸으로 갇혀 있던 매끈한 피부의 청년이 상황에 안 맞게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시를 내리는 당신. 나중에 말을 전달할 사람은 당신 한 명이면 되겠죠?”
질문이지만 질문이 아니다.
왕달의 절규와 함께 파락호들이 달려들고, 수백의 황양문 사내들이 전멸하는 데는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북경 황양문의 멸문.
그리고 백호마왕이라는 이름이 퍼져 나가는 시작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