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권 24화
제41장 사상누각(沙上樓閣) (1)
푸르륵―.
청죽조 조장 방익지는 투레질을 하는 말에서 내리면서 덮어쓰고 있던 피풍의를 살짝 걷어 올렸다.
발밑이 질퍽했다.
다행히 비는 그쳤지만 구름이 많아서 아직 공기가 축축했다. 비 온 뒤의 흙냄새가 사방에서 물씬 피어오르는 걸 맡으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이상한 기분이 든다.
달팽이를 찾아다니고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방익지는 어린 시절이 찢어지게 가난했기에 그리 좋아하지 않는 기억이다.
“염병, 신발이 더러워지겠군.”
방익지는 툴툴거리면서 신발 위를 괜히 맨손으로 닦았다.
황양문과의 싸움 이후 북경 전체에 이틀에 걸쳐 비가 왔었다.
고관대작들이 사는 번화가의 저택 한 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큰불이 난 데다 파락호들 수백 명이 죽어 나갔으니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방익지는 지난 사흘간을 정신없이 보냈다.
황실, 팔파일방, 적양문.
사방에서 다 그를 찾으니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이다.
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면서 북경 정무관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십니까?”
그를 막아 세운 것은 마당을 쓸면서 문밖을 경계하고 있던 정무관의 교관 중 한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눈빛이 날카로운 삼십 대 중반의 사내였는데 빗자루를 비스듬히 잡으면서 노려보는 기세가 전투도 불사할 만큼 날카로웠다.
방익지는 피풍의를 뒤로 젖혀서 얼굴을 드러냈다.
“거 참, 여긴 아이들 무공 가르치는 곳 아닌가? 그렇게 날이 서 있으면 애들이 놀러 오다가 경기 들겠어.”
“아! 방 조장님이셨군요. 실례했습니다.”
“자네도 이번 일로 많이 놀랐을 테지, 이해하네. 그래도 마음을 좀 내려놓게. 애들 가르치는 곳이 분위기가 이래서야 쓰겠나? 우리 천무련 사람들도 여길 지키기 위해 노력 중이라네.”
“아, 예. 주의……하겠습니다.”
방익지는 특유의 언변으로 교관을 위로했으나 여전히 복잡한 표정인 것을 보니 아무래도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했다.
‘충격이 컸겠지. 아직 실전 경험도 없던 사람이 그런 참상을 봤으니.’
“이 조장은 안에 있나?”
“예, 관주님께 기별을 넣겠습니다.”
“그래 주게.”
방익지는 곧바로 정무관의 관주실로 안내되었다.
북경 정무관주 이남성은 겉으로 보기엔 황양문과의 싸움이 일어나기 전과 비교해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늘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사람이기에 그렇다.
방익지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이남성은 그저 고개만 까딱 숙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사람 야박하긴. 이 조장. 우리가 그간 자잘한 일로 티격태격하긴 했어도 똑같이 련주님을 함께 존경하고 모시는 사이지 않은가? 같은 시기에 련에 들어왔으니 우린 동기나 다름없는데. 좀 더 반갑게 맞아 주면 안 되나?”
“이 정도면 반갑게 맞아 주는 것 아니오?”
“이게 반갑게 맞아 주는 거면 불친절하게 맞아 주는 건 어떤 건가?”
이남성은 힐끗 방익지를 본 뒤, 자신이 살펴보고 있던 서류들을 한쪽으로 몰아서 정리했다.
“바쁘다고 다음에 오라고 했을 것이오.”
“……만나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라 이거지? 거 고맙구만그래. 아주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
“용건이 무엇이오?”
방익지가 비꼬면서 너스레를 떨어 봤자 이남성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이남성과 방익지는 그야말로 견원지간이라 해도 좋을 만큼 서로 성격이 다른 사람이었다.
예전에 방익지가 술자리에서 실언을 내뱉은 뒤로 서로 간의 간극은 더욱 멀어지기만 했다.
“좋아. 용건부터 말하지. 안휘로 돌아오게. 어차피 북경 정무관주는 임시로 맡은 일이었지 않은가? 이제 다시 련의 일을 도와주게.”
“상부의 명령인가?”
“아니, 그냥 제안일세. 총군사께서도 한 번 물어보라고만 하시더군. 정무관을 맡긴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자네의 뜻을 존중하겠다고 하셨어.”
“명령은 아니라는 소리군.”
이남성은 의심스럽게 방익지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왜? 혹시 얼마 전의 그 일로 이곳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시는 건가? 그래서 나를 불러들이는 것이오?”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긴 한데…….”
방익지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황양문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놨는데, 내가 적양문주라도 보복을 하려면 여기 북경 정무관에 하겠지. 그러니 자네가 괜히 여기에 있다가 자칫 당하기라도 하면 개죽음이 아닌가? 자네는 천무련에 꼭 필요한 인재니 이 기회에 련으로 돌아가시게나.”
“……그렇다면 더더욱 갈 수는 없지.”
“그렇게 반발하지 말고. 일을 대승적으로 보게.”
“크게 볼 필요도 없소. 련에는 인재가 많지만, 여긴 내가 아니라면 더 쉽게 무너질 테니까.”
이남성은 결단력이 대쪽 같았다.
“북경 정무관주로 남겠소.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소.”
“이 조장. 이건 그리 간단히 결정할 일이 아니야. 지금 련은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네. 인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우린 병력의 손실도 거의 없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소. 인재가 왜 부족하단 말이오?”
“모르는 척하지 말게. 겉으로 보기엔 이겼으니 만사형통 같지만 세상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쯤은 아무리 인맥과 담을 쌓은 자네라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사실 이남성도 짐작이 가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이남성은 미간을 좁히며 나직하게 물었다.
“여론이 그 정도로 안 좋소?”
“안 좋은 정도가 아닐세. 적양문에서 우리더러 손속이 잔인하다느니 정파답지 않다느니 하면서 기회라는 듯이 우릴 물어뜯고 있고, 아미파랑 팔파일방 중의 일부에선 옳다구나 하고 똑같이 씹어 댄다네.”
“그걸 사람들이 믿겠소? 북경 파락호들을 좀 혼내 줬을 뿐인데?”
“믿더군. 아주 잘 믿던데?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귀가 얇고 나약한 존재일세.”
이남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영웅이 몰락하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들은 늘 있지.”
“크흠, 그러게 말일세. 그러니까 여러모로 천무련이 할 일이 많다, 이 말일세. 안휘 본단에 자네의 힘이 필요해.”
방익지는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최대한 진심을 담아, 도와주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얼굴로 눈치를 보았다.
이남성은 그런 방익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거절하겠소.”
“그렇지. 당연히 련에 도움이 되어야……. 뭐라고?”
방익지는 설마 또 거절할 줄은 몰랐기에 당황했다.
“아니,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왜 거절을 하는 건가?”
“방 조장. 당신이 나를 알 듯, 나도 당신을 알고 있소.”
“나를 안다고?”
“그렇소. 련의 상황이 그렇다면 당신 같은 사람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겠지. 그런 와중에도 굳이 왜 직접 이곳에 왔는지 이젠 솔직하게 말해 보시오.”
“왜 여기에 왔냐니? 나야 당연히 이 조장의 의견을 물으러 온 걸세.”
“아니, 그런 것 말고. ‘왜’ 이곳에 왔냐는 말이오.”
이남성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거짓말은 용납지 않겠다는 듯 가만히 응시하는 시선이 방익지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방익지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 원칙주의자의 고고하고 잘난 체하는 듯한 시선은 예나 지금이나 방익지를 긴장시킨다.
“뭐 별거 있겠나? 련주님이 아닌 이상 이 조장을 설득할 만한 사람은 나뿐이고. 그리고……. 그리고…….”
“…….”
“……젠장, 염병, 그래. 난 북경에 볼일이 좀 있네. 어차피 좋은 뜻으로 온 건데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묻는 건가?”
방익지는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성질을 부렸다.
“사람이 변하는 게 없군. 변하는 게 없어. 아무튼 난 이 조장이 안휘로 와서 잠깐 내 일을 대신 맡아 줬으면 좋겠네.”
“당신이 하던 일을 내가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앉아만 있으면 되는 걸세. 솔직히 말하지. 안휘에서 내 대신 잠깐 자리에 앉아 있어만 주면 생각보다 꽤나 큰 금액을 만질 수 있을 걸세.”
방익지는 손가락을 모아서 은자처럼 동그란 모양을 만들었다.
그 적나라한 표현에 이남성은 헛웃음을 지었다.
“여전하군. 아까 한 말은 취소요. 방 조장은 나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군.”
“왜? 돈은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고? 그렇다면 아직 철이 덜 들었군. 이 사람아. 세상이 바뀌는 난세에 남는 건 돈뿐이야.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은 거의 없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 상인 중에는.”
방익지는 이남성의 반응이 좋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첨언했다.
“잘 생각해 보게. 지금 천무련은 조직도 개편되고 있단 말일세. 패 대협이 나서서 추마대인지 뭔지를 만드는 바람에 청죽 조장 자리가 날아가게 생겼단 말이야.”
“패 대협? 무상 패원강 대협 말이오?”
“그렇네. 잘 아시는군. 나는 새로 만드는 감찰부대의 각주가 될 것 같은데, 젠장 지금처럼 중요한 순간에 자리를 비워선 안 된단 말일세.”
“그럼 비우지 않으면 될 것 아니오?”
“북경에 볼일이 있다니까?”
방익지는 자신도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조장. 당신이 그렇게나 존경하는 련주님 곁에서 일도 돕고, 천무련에서 조장 자리도 지키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은자 수백 냥도 꽁으로 흘러들어 올 텐데. 도대체 왜 싫다는 건가?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도 좋은 일이지 않냐는 말일세.”
“됐소.”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방익지의 말에 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남성은 그런 사리사욕에 흔들리는 남자가 아니다. 그리고 방익지의 사정이 딱하다고 느끼기엔 애초에 그에 대한 친근감이나 공감대가 전혀 없었다.
“방 조장. 분명히 말하지. 거절하겠소. 나는 련주나 총군사께서 내게 옮기라는 명을 하기 전까지는 이곳 북경 정무관을 제대로 유지하고 키워 내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이오.”
쾅!
방익지는 다탁을 내리쳤다.
이만큼이나 사정을 했는데도 들어주지 않는다니.
그도 자존심이 있는 사내였다. 더 이상 부탁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알기에 부탁은 그만두었다.
“이리도 융통성이 없으니! 쯧! 그래! 이런 위험천만한 곳에서 시골 촌부들에게 무공이나 가르치는 자리가 딱 맞군. 잘 알겠네. 잘 알겠어. 이 관주!”
방익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처음으로 이남성을 ‘관주’라고 불렀다.
이제는 더 이상 천무련 본단의 조장이라 생각하지 않겠다는 뜻.
이남성은 배웅조차 하지 않았고, 방익지는 원래 계획했던 북경에서의 일을 다 소화하지 못한 채 안휘로 돌아가야만 했다.
과거가 있는 두 사람의 사소한 엇갈림.
하지만 이때의 두 사람은 이 엇갈림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 전혀 알지 못했다.
***
추룡, 조서인, 팽자연으로 이루어진 일행은 안휘의 천무련으로 향하고 있었다.
원래는 팽자연은 팽가로 돌려보낸 후 두 사람만 이동하려 했으나 팽자연의 반대가 극심했다.
이렇게까지 얽혔는데 나만 버리고 갈 거냐고. 나도 천무련과 천무공자를 만나 보고 싶다고 하는데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서인 오라버니. 얼굴은 좀 괜찮아요?”
“에아으니다(괜찮습니다).”
양 볼이 다람쥐처럼 퉁퉁 부은 몰골. 눈두덩이에도 멍이 잔뜩 들어서 실눈이 된 조서인은 호남형의 인상을 다 잃어버린 상태였다.
말 위에서 팔자 좋게 술 호리병을 입에 물고 있던 추룡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파하핫! 그 얼굴은 볼 때마다 웃기네! 어쩔 수 없다. 둘째 형님의 십단금 침투경은 한 방 얻어맞으면 최소한 사흘은 사라지질 않거든.”
“안 으애도 낫일 않으니다(안 그래도 낫질 않습니다).”
“미련하긴. 그러게 적당히 배우면서 끝냈어야지. 뭘 그렇게 열심히 하겠다고 창을 휘둘러? 둘째 형님도 분위기를 타는 바람에 손속이 매서워졌잖아?”
“너으 흥운에서(너무 흥분해서)…….”
“에라이. 못난 놈. 숨 쉬면서 계속 소주천을 돌려! 그것만이 살길이다!”
계속 내공심법이나 운용하라며 윽박지르긴 했지만 추룡도 내심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