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05화 (634/686)

20권 25화

제41장 사상누각(沙上樓閣) (2)

‘둘째 형님을 상대로 그 정도로 싸우다니.’

누군가가 추룡에게 둘째 형님, 부운화에 관해 묻는다면 추룡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검성(劍星).

세상은 아직 그의 진가를 모르지만, 흔히 무림오존이라 불리는 검선 정도를 제외한다면 일대일로 싸웠을 때 부운화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게 추룡의 생각이다.

조서인은 무려 그런 부운화를 상대로 수십 합을 버텼다.

처음에야 살살 초식만 다듬어 주면서 가볍게 대련했다지만, 나중에는 보고 있는 추룡이 섬뜩할 정도로 실전에 가까운 전투가 되어 버리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버티다니, 보통의 재능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조서인의 성장은 눈부셨다.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를 온전히 배우는 재능.

그건 얼핏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재능에 비해 우습게 보이기 쉽지만, 그 작고 확실한 재능이 모래알처럼 결과물들을 쌓아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거대한 산이 되어 있는 법이다.

추룡은 하나의 확실한 무공이, 일백 개의 어설픈 무공을 압도하는 싸움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아직 산은 아니고 언덕 정도지만, 그래도 장하다, 이 녀석아.’

언덕이 높아지다 보면 언젠가는 거악(巨嶽)이 되리라.

조서인을 보고 있노라면 평생 혼인도 안 하고 제자도 거둘 생각이 없었던 추룡조차 제자라도 하나 거둬 볼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조서인은 시간을 함께 보낼수록 정이 가는 성격이었다. 그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값진 재능이다.

“음?”

그때, 추룡은 고개를 돌려 먼 곳을 가만히 응시했다.

곧이어 조서인도 퉁퉁 부은 얼굴로 시선을 돌렸고, 반 각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팽자연도 그들이 무엇을 신경 쓰는지 알아차렸다.

“이음 어오에(지금 저쪽에)…….”

“누가 쫓기고 있네요?”

팽자연의 말대로 멀리 지평선 가까이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망치는 건 한 사람이고, 쫓는 쪽은 다섯 명이다.

미친 듯이 말을 달리는 모습에서 그들의 급박함이 느껴졌다.

팽자연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추룡과 조서인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남의 일에는 함부로 끼어드는 게 아니라곤 하던데.”

팽자연의 질문은 그 자체로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추룡 역시도 술병을 좌우로 흔들었다.

“맞는 말이지. 쫓기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도둑이나 죄인이면 어쩔 거야?”

“그렇죠. 나라에서 쫓긴다거나 흉악범이면요?”

단순히 쫓기는 자가 소수라고 해서 그가 무고한 것은 아니다.

조서인 또한 망설이기는 했으나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두 사람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런데 그들이 의견을 하나로 모으자마자 이변이 벌어졌다.

“어쭈?”

“어어?”

갑자기 쫓기는 쪽의 사람이 우연인지 몰라도 말머리를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돌려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조서인이 앞으로 나섰다.

등 뒤에 비스듬히 매고 있던 창을 붙잡은 채 자연스럽게 정면을 지켰다.

쫓기던 사람은 조서인의 모습을 보자마자 당황하며 옆으로 돌아서 지나가려고 했다.

조서인은 막지 않았다.

옆으로 지나갈 뿐이라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히히힝!

“어?”

그런데 쫓기던 사람은 조서인이 아니라 팽자연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면서 말을 멈춰 세웠다.

그는 갑자기 방향을 더 꺾어 팽자연의 근처로 다가갔다.

“멈춰요. 당신은 누구죠?”

팽자연이 폭이 좁은 협도를 뽑아 상대방을 겨누는 동작은 감탄이 나올 만큼 매끄러웠다.

샛노란 먼지를 온몸에 뒤집어쓴 데다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피풍의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수상한 상대가 가까이 다가온다?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만큼 강호 무림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두두두두―.

그사이, 추적 중이던 다섯 명이 조서인을 사이에 두고 고삐를 당겨 제자리에 멈춰 섰다.

추격자 다섯 명 중 가장 앞에 있던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방수가 있었나?”

조서인, 추룡, 팽자연 세 사람은 모두 무기를 지닌 무인이었다.

조서인은 창을 들었고, 추룡은 말 안장에 비스듬하게 언월도를 걸고 있다.

심지어 팽자연은 협도를 뽑아 들고 있는 상태다.

그때 부하 중 한 명이 그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에게 조언했다.

“저 여인은 서로 칼을 겨누고 있습니다. 방수는 아닌 듯합니다.”

사내는 조서인과 추룡을 유심히 살핀 뒤, 그들이 쫓던 자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팽자연을 향해 소리쳤다.

“강호의 은원이 섞인 일이다! 쓸데없이 끼어들지 말고 물러서라! 더 이상 경고하지 않겠다!”

경고라니.

제 딴에는 자비를 베푼다고 여기는 모양이지만, 듣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상당히 건방지고 독선적일 수도 있는 말이었다.

추룡이 헛웃음을 흘렸다.

“어쭈? 경고?”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 후회하게 될 것이다.”

험상궂은 사내가 목소리를 깔고 위협적으로 말할수록 추룡의 입가에서 미소가 짙어졌다.

“조카야. 어찌할 거냐. 네가 정해라.”

추룡은 좀이 쑤신다는 듯이 어깨를 휘적거렸지만, 그래도 결정권을 넘겨주었다.

그 태연한 모습에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도 두 눈에 이채를 띄고 고민했다.

강호에선 원래 여인, 어린아이, 노인을 조심하라고 하지 않던가.

가장 우습게 보이는 상대일수록 가장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조서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소리쳤다.

“잠안(잠깐)!”

얼굴과 입술이 퉁퉁 부어서 발음이 뭉개지는 목소리에 잠시나마 경계하던 사내들의 경계심이 무너져 내렸다.

퉁퉁 부은 얼굴로 가능한 또박또박 말하려 노력하는 조서인의 모습은 암만 봐도 어딘가에서 잔뜩 매라도 맞고 온 샌님이었다.

“누군지…… 설명하헤요.”

조서인은 최대한 발음이 뭉개지지 않게 노력해서 말해 봤지만 사내들은 코웃음만 칠 뿐 설명할 필요를 못 느꼈다.

마침내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가 결정을 내렸다.

“목격자는 필요 없다. 모두 죽여라.”

“존명!”

나머지 네 명이 지체 없이 무기를 뽑고 달려든다.

추룡의 미소가 짙어졌지만, 그가 나설 차례는 없었다.

쒜에에엑―.

쩌저엉!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창을 휘두르는 조서인.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창술이 가장 앞에 있던 세 명의 무기를 번개처럼 창끝으로 후려쳤다.

일격필살.

일연적룡무 제일식.

거창 자세에서 시작되는 찌르기 일섬(一閃)이 세 명의 칼날 한가운데에 구멍을 뻥 뚫어 버렸다.

“흡!”

“허억!”

“큽!”

세 명의 무인이 당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들은 황급히 말고삐를 잡아챘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그들이 타고 있던 말들이 깜짝 놀라 들썩거리면서 발을 구를 지경이다.

칼날에 구멍을 뚫다니.

길에서 우연히 만난 자 중에 가장 우습게 여겼던 청년이 이렇게나 고강한 창술을 쓸 거라고 대체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들은 무작정 달려들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안타깝게도 공격을 받지 않은 나머지 한 명은 그렇지 못했다.

곧바로 추룡을 향해 달려가려던 자는 직접 조서인의 창에 얻어맞았다.

창날이 아니라 창대.

쇠로 만들어진 창대가 사내의 양팔 아래,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위로 올려 쳤다.

퍽!

빠각!

얻어맞은 사내가 공중으로 붕 떴다가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커헉!”

관절에서 양팔이 빠졌는지 사내는 곧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양팔을 허우적거리면서 벌레처럼 꾸물꾸물 바닥을 기었다.

목이 꺾이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사내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스으윽―.

조서인의 시선에 따라 모두의 호흡이 멎는다.

단 일 수에 세 사람의 무기에 구멍을 뚫고, 나머지 한 명이 무력화되었다.

추격자들의 대장이었던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조서인을 노려보았다.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었구나.”

그는 칼을 뽑으면서 위압적으로 소리쳤다.

“나는 백귀총의 독마검(毒魔劍) 황갈이다. 네놈들은 누구냐!”

백귀총의 독마검.

독을 쓰는 악랄한 살수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자였다.

다각― 다각―.

추룡이 탄 커다란 덩치의 서역 말이 성큼성큼 조서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추룡은 여전히 술병을 든 채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통성명을 할 거였으면 아까 했어야지. 대뜸 죽이려 들기에 좋지 않은 놈들인 줄은 알았다만 이제 보니 백귀총의 살수 놈들이었군.”

추룡이 타고 있던 말이 바닥을 기어 다니던 사내의 다리를 밟았다.

우직!

“끄아악!”

수백 근이 넘는 힘에 다리가 수수처럼 부러져 나갔다.

추룡은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눈도 깜짝하지 않은 채 말했다.

“조카야. 백귀총이라 하면 옛날부터 유명한 살수 문파 중에 하나다. 돈이 되면 그 누구든 죽여 준다는 강호의 망종들이지.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마라.”

“살수…….”

조서인은 어눌한 발음을 삼키며 냉정한 시선으로 사내들을 응시했다.

조서인은 창을 꽉 움켜쥐었다.

퉁퉁 부은 양 볼, 눈두덩이가 개구리처럼 툭 튀어나온 웃기는 몰골이지만 이제 조서인을 보면서 웃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난, 조서인!”

조서인은 최소한의 단어로 통성명을 한 뒤 창끝으로 독마검 황갈을 겨누었다.

황갈을 침음성을 흘렸다.

“낙일창……!”

놀랍게도 황갈은 조서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낙일창이 그런 못생긴 얼굴이었다니.”

움찔.

조서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팽자연이 큽, 하고 웃음을 참는다.

하지만 두 사람과는 달리 황갈에게 지금의 사태는 웃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더니 옆에 있는 추룡을 잠시 노려보고, 그 뒤에는 팽자연의 뒤에 숨어 있는 본래 그들의 목표를 응시했다.

“우리 백귀총은 한 번 정한 목표를 절대 놓치는 법이 없다. 지옥 끝까지 쫓을 것이다.”

피풍의를 뒤집어쓴 채 쫓기던 자가 움찔 몸을 떨었다.

독마검 황갈은 안 그래도 눈 밑이 시커멓게 죽어 있어서 험악한 얼굴로 더더욱 섬뜩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는 목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천천히 칼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었다.

“하필 강호에 명성이 높은 낙일창과 마주치다니. 운이 나빴군. 낙일창! 오늘 우리를 방해한 것은 잊지 않겠다. 다들 물러난다!”

“존명!”

황갈의 입장에선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레 마주한 자들 때문에 일을 망쳤으니 속이 쓰린 건 당연했다.

낙일창의 창술이 예상 밖으로 훨씬 더 뛰어난 상황.

백귀총의 살수들 입장에선 굳이 적을 늘려서 낭패를 볼 필요는 전혀 없으니까.

그 와중에 물러나는 입장에 험한 소리 좀 해서 자존심을 세우려는 것 또한 그럴 수는 있다.

조서인 입장에서도 굳이 살수 문파랑 과하게 척을 지지 않으면서 일이 마무리되면 그 또한 괜찮은 마무리다.

조서인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려는 그때였다.

“뭘 고개를 끄덕이고 자빠졌어?”

추룡의 냉랭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조서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칼에 구멍이 뚫린 자들이 황급히 무기를 회수하고, 팔이 빠져 버린 채 추룡의 말에게 밟히고 있는 살수를 구하러 다가오던 그때였다.

대체 언제 안장에서 황룡창을 뽑았는지도 모를 추룡이, 수직으로 세운 창날을 그대로 말이 짓밟고 있던 살수의 등에 꽂아 넣었다.

콰직!

“컥!”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한 생명이 스러진다.

독마검 황갈과 살수들.

조서인과 팽자연.

모두가 숨이 멎었다.

시간조차 멈춘 그 순간, 추룡의 싸늘한 웃음만이 흘러나왔다.

“우리를 방해한 건 잊지 않겠다? 지랄하네.”

추룡의 섬뜩한 안광이 독마검 황갈을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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