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06화 (635/686)

20권 26화

제41장 사상누각(沙上樓閣) (3)

양팔을 다 드러낸 이국적인 복색을 하고 술병을 흔들던 한량 같은 모습?

주정뱅이의 나태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섬뜩하리만큼 날카롭게 다듬어진 무형기.

보이지 않는 위압감이 독마검 황갈을 천 근의 압력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큽.”

드드드드―.

황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커다란 맹수 한 마리가 얼굴 앞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듯했다.

조서인이 사실은 낙일창이라 불리는 청년 고수임을 알게 되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큰 충격이 그를 덮쳤다.

“이, 무슨? 당신은 누구요?”

이만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자가 무명일 리가 없었다.

추룡은 황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오직 조서인만을 보면서 일갈했다.

“너를 잊지 않겠다는구나. 나중에 후환이 있을 거라며 협박까지 했어. 저따위로 말하는 놈을 그냥 놔둔다고? 살수 놈 따위가 너한테 엄포를 놓는데? 조서인, 너는 네가 누구의 제자인지를 잊은 거냐?”

추룡이 누구던가.

적룡기마대의 간부 출신이자 붉은 악귀 장기린의 의동생이다.

강호 무림에서는 장강용왕의 하나뿐인 적자 신분이었으나, 전장에 나가 적룡기마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저 한 명의 병사로서 능력 없는 자들에게 멸시를 당하면서 군역에 종사했었다.

그렇게 가장 낮은 곳에 있어 봤기에 추룡은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명가의 후예들이 왜 명예에 목숨까지 거는지 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추룡이다.

“스스로를 높이고 명예를 지켜야 할 때가 있는 거다. 사람 좋은 얼굴로 헤실거리면 모든 게 다 잘 풀릴 거라 생각하는 거냐?”

“아……!”

“천만에, 저런 버러지들은 그런 예의의 고마움을 모른다. 오히려 만만한 놈 찾았다고 잡아먹으려 들지.”

조서인은 당황하여 얼굴이 타는 것처럼 붉어졌다.

그렇다.

조서인은 이제 주정뱅이 술꾼의 아들. 몰락한 무가의 잊혀진 자손이 아니다.

검선의 계보를 이었으며 붉은 악귀 장기린의 제자다.

지켜야 할 자존심의 크기가 다르다.

조서인의 모욕?

이제는 혼자만의 모욕일 수가 없다. 그가 입는 모욕은 사부 장기린, 그리고 그와 연결된 모든 이들에 대한 모욕이기도 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인데, 어째서 적용이 되질 않는 걸까?

남의 눈치를 살피면서 허허 웃는 것도 타고난 본성처럼 바뀌질 않는 것인가?

“죄송합니다.”

조서인은 결국 고개를 푹 숙이면서 낙담하고 말았다.

추룡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발을 한 번 굴러 말에 박차를 가했다.

히히힝―!

기다렸다는 듯이 펄쩍 앞으로 뛰쳐나오는 거마(巨馬).

그 위에서 추룡의 창날이 제비의 날갯짓 같은 날카로운 호선을 그려 냈다.

서걱―!

“흡!”

“크르륵.”

추룡의 일 수에 가까이 다가왔던 살수 두 사람의 목이 날아갔다.

말이 발을 구르는 것과 동시에 그 힘을 살려 창을 휘두르는 솜씨가 기가 막혔다.

수로맹주 장강용왕의 비전 무공에 서역을 떠돌며 얻은 깨달음이 가미된 무공이다.

그나마 한 명이 벼락처럼 뒤로 몸을 튕겨 살아남은 것이 천운이었을 뿐.

그나마도 오래가진 못했다.

콰직!

“끄아악!”

한 번 더 박차를 가한 추룡이 황룡창을 아래로 휘두르자, 공격을 막으려던 살수는 검날이 박살 나며 그대로 몸이 비스듬히 갈라졌다.

촤아악!

피 분수가 치솟는다.

훅― 하고 진한 혈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섬뜩한 광경.

촌각 만에 잘 단련된 살수 세 명의 목숨이 파리처럼 가볍게 날아가 버렸다.

다그닥― 다그닥―.

둔중한 말발굽 소리가 마치 사신의 발소리와 같다.

황갈은 주춤 물러서며 발작적으로 외쳤다.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 백귀총은 이 일의 진상을 찾아내고, 너희를 쫓을 것이다!”

“끝까지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군.”

“너는 누구냐! 백귀총의 복수를 감당할 수 있는가!”

“시끄럽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이젠 백귀총을 통째로 없애야겠는데.”

추룡의 태연한 대답에 황갈은 혼백이 빠져나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말은 쉽다.

살수 문파 하나를 통째로 없앤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지만 추룡은 허언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뭐, 이런……?”

황갈 또한 나름 살수계에서 사선을 수없이 넘어온 고수다.

온갖 더러운 꼴과 잔인한 광경을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보았고, 정면 대결로는 감히 맞상대할 수 없는 자들도 암습으로 죽이고 살아남았다.

그렇게 수십 년간 살수 생활을 하며 다듬어진 그의 생존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위험하다.’

생각은 잠시.

황갈은 생존 본능을 따라 바닥에 독연탄을 던진 후 번개처럼 몸을 날려 도주했다.

펑!

타다닷!

독마검이라는 사나운 별호가 무색했다.

황갈은 말에 올라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정신없이 땅을 박찼다.

일보에 일 장을 펄쩍펄쩍 뛰면서 달려나가니 눈 깜짝할 새에 조서인 일행이 멀어진다.

“됐……!”

탈출에 성공했다는 기쁨에 휩싸일 때쯤, 황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뿌연 독연 너머.

커다란 말 위에서 언월도를 역수로 잡은 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추룡의 그림자가 보인다.

황갈은 깜짝 놀라 바닥으로 엎드리려 했다.

하지만 한 박자 빠르게 번쩍.

쉬익―.

귓가를 살랑거리는 바람 소리가 스치고.

퍼어억!

황갈은 자신의 등을 꿰뚫고 앞으로 튀어나온 칼날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커헉……!”

폐부가 꿰뚫려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멋들어지게 싸워 보기나 할 걸 그랬다는 생각도 잠시.

황갈은 곧 숨이 끊어진 채 의식을 잃었다.

“살수 놈이 상황 판단은 빠르군.”

독마검인지 뭔지 자기 이름을 스스로 말한 놈이 등을 보이며 도망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추룡은 아직 경련하고 있는 시신에서 황룡창을 뽑아 피를 털어 냈다.

다섯 명이 쫓아왔고, 다섯 명이 죽었다.

그 모든 살행을 추룡은 숨 쉬듯 자연스레 행했다.

최근에 활약을 자제하고 있었으나, 그 역시도 전쟁터에서 활약했던 막강한 무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믿기지가 않아. 백귀총 살수들을 저렇게 쉽게……!”

그동안 조서인을 지도하던 모습만 보았지, 제대로 싸우는 모습을 처음 본 팽자연이 숨김없이 감탄을 토해 냈다.

추룡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수수 베듯 살수들을 베어 냈지만, 그게 사실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팽자연도 잘 알고 있었다.

팽가의 강인한 도객들이 나서더라도 잘 훈련된 살수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아마 힘들 것이다.

팽가의 도객들이 살수와 정면대결을 벌이면 오래지 않아 쓰러뜨리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살수들 또한 온갖 방법을 써서 도망치고 후에 암습하는 방식으로 싸울 게 뻔했다.

잔혹한 손속?

팽자연은 명문 팽가, 하북 전체에서 손꼽히는 무가의 여식이었다.

손을 독하게 써야 할 때가 언제인지 오히려 조서인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팽자연이다.

그녀는 이 정도의 살행은 무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조카야, 나는 네가 좀 더 자존심을 세웠으면 좋겠다. 네 어깨에는 여러 사람의 명예가 함께 걸려 있어.”

“예…….”

“백귀총 같은 악질들을 상대로 관용을 베풀 필요는 없다. 심지어 이쪽을 겁박한다? 어불성설이지. 그런 후환 따위. 남겨 놓는 쪽이 어리석은 것이다.”

추룡은 태연하게 가죽 천으로 황룡창 창날을 닦아 낸 뒤 다시 안장에 비스듬히 걸었다.

조서인은 그때까지도 묵묵히 침울한 얼굴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답지 않게 잔소리가 많았다. 인마, 인상 펴. 아직 상황 안 끝났어. 저 아이도 처리해야 하지 않겠냐?”

“예?”

그제야 가장 처음에 도망치고 있던 사람을 떠올린 조서인이 깜짝 놀라 팽자연의 뒤를 쳐다봤다.

팽자연 또한 칼까지 뽑았음에도 백귀총 살수들 때문에 정작 가장 처음에 경계하던 도망자에게선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도망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는 크게 당황하며 포권을 취하더니, 느닷없이 말에 박차를 가해 도망치려 했다.

“그렇게는 안 되지.”

그러나 추룡의 동작이 더 빨랐다.

대체 언제 말에서 내린 건지, 도망치려 할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어느새 추룡이 도망자의 말고삐를 거머쥐고 있었던 것이다.

“……!”

도망자가 소스라치게 놀라 한 마리의 학처럼 안장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시 안장에 내려서는 동작이 상당히 유려했다.

“어?”

특히 조서인은 눈에 익숙한 동작이라 깜짝 놀랐다.

“후우.”

잠시 후, 도망자가 포기한 듯 얼굴을 가리고 있던 피풍의를 뒤로 젖힌다.

남장을 하려 했는지 별로 길지도 않은 머리를 정수리에서 상투를 틀어 묶었다. 갸름한 얼굴형에 여성적인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코가 오뚝하고 눈은 옆으로 가늘고 길다. 전체적으로 깨끗한 인상이지만 도톰한 입술은 부르터서 몇 군데 찢어진 채다.

“문 소저?”

팽자연이 가장 먼저 상대를 알아보고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조서인은 어찌나 놀랐던지 퉁퉁 부은 얼굴로도 입을 쩍하고 벌렸다.

금룡상회의 외동딸 문주희.

얼마 전에 아버지와 함께 천무련에 의탁하겠다며 떠났던 그녀가 초췌한 얼굴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오랜만이네.”

목소리가 땅에 꺼져 사라질 것처럼 나지막하다.

비스듬히 고개를 모로 꺾어 시선을 피하는 그녀에게선 어쩔 줄 몰라 하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송구함, 부끄러움, 난감함.

온갖 감정들이 그녀의 얼굴에 뒤섞여 있었다.

“백귀총 살수들에게 쫓기는 사람이 문 소저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네요. 무슨 일이에요? 금룡회주와 함께 천무련에 의탁한 것 아니었어요?”

팽자연은 문주희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물었다.

문주희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난감해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천무련에 들어갔어요. 지금도 천무련의 일을 하는 중이에요.”

“……천무련의 일이 백귀총 살수들에게 쫓기는 일이에요? 아무런 지원도 없이?”

“그건 아닌데 업무를 하다 보니 일이 좀 꼬여서…….”

“뭐야, 그러면 천무련이 도와야지. 지원도 없이 이런 상황으로 만들어요? 그런 게 어딨어? 내가 천무련에 따져 줄까요? 혹시 찍힌 거 있다고 저 위에서 위험한 일만 시키는 거 아냐?”

팽자연이 자기 일처럼 흥분해서 따져 물었다.

문주희는 그녀의 진심을 느낀 듯 복잡한 눈빛으로 팽자연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걱정해 줘서. 팽 소저는 날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나 참.”

팽자연은 스스로도 흥분했던 것을 자각하고 심호흡을 크게 했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죠. 팽가 사람들은 이미 지나간 일을 담아두지 않아요. 우리가 북경에서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내가 그렇게 소심해 보였어요?”

“팽 소저…….”

“그리고 도망은 왜 가려고 해요? 마음 아프게.”

팽자연이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자 문주희도 감동을 받아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크흠!”

여인들끼리 서로 공감하는 상황에 제동을 건 것은 추룡이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여 두 사람의 관심을 끈 뒤,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만이네. 소저.”

“아,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면목이 너무 없어서……. 이번에도 폐만 끼치게 되어서 너무 죄송해요.”

“그건 됐어. 별일도 아니었으니.”

백귀총의 독마검과 살수들 따윈 추룡은 이미 잊은 지 오래다.

그는 그보다는 더 궁금한 게 있다는 듯 장난스레 웃으며 물었다.

“근데 아까 서인이는 보고도 그냥 옆으로 지나치려 했으면서 팽 소저는 보고 나서 멈춰 서더군. 왜 그런 거야?”

“아…….”

문주희는 난감해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서인이인 줄, 못 알아봐서…….”

안 그래도 퉁퉁 부어 있던 조서인의 얼굴이 움찔하며 더욱 일그러졌다.

“파핫핫!”

추룡이 웃음을 터뜨리고, 팽자연도 나직하게 웃는다.

조서인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우린 이제 사천 정무관으로 갈 건데. 함께 갈 건가? 아니면 여기서 갈라질 건가?”

“……사천 정무관으로 가신다고요?”

“그래.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소저는 사천에서 도망치던 중이었지? 방향이 딱 그쪽이던데.”

문주희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하나 여기서는 방향을 달리하는 게 옳을 것 같아요.”

“폐를 끼치는 것 같다면 그건 별로 문제가 아냐. 저기 저 얼굴도 알아보기 힘든 못생긴 조카 녀석과 여기 팽 소저도 소저를 도와주고 싶은 것 같고.”

“……아뇨, 거절하겠습니다.”

문주희는 팽자연이 몇 번이나 붙잡았음에도 확고한 태도로 도움을 거절한 뒤 모두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떠나갔다.

피풍의를 다시 뒤집어쓴 뒷모습이 쓸쓸했다.

조서인과 팽자연은 멍하니 서서 문주희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단호하네. 그런데 왠지 몰라도 문 소저를 다시 볼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어에요(그러게요).”

조서인과 팽자연의 예감은 맞았다.

그들 일행이 사천 정무관에 도착한 후.

그들은 최악의 상황에서 다시 문주희를 마주하게 된다.

사천을 뒤흔드는 사건.

천무련의 변혁을 알리는 거대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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