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 1화
제42장 필마온(弼馬溫) (1)
정허 사태는 두툼한 보료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늙고 주름진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미지근한 찻물을 담은 다기들은 저렇게나 매끈한데, 자신의 손은 어째서 이리도 주름이 많은지.
“흘흘, 젊어서 화경을 이루어 봤자 무얼 하는가. 그래 봤자 세월엔 이기지 못하는 것을.”
세수 백 세를 바라보는 그녀에게도 젊고 활기 넘치던 시절이 있었다.
원 말기.
명 초.
격동의 시대를 맞은 강호 무림 곳곳을 그녀가 얼마나 휘젓고 다녔던가?
멸진 사태의 사나움?
파불 신니의 강인함?
정허가 한창 젊었던 시절과 비교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젊은 시절의 정허는 훨씬 무모했고, 아미파의 명예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으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목적을 이뤄 내는 독심이 있었다.
세월은 참 야속하다.
젊은 정허 사태에게서 찬란하게 빛나던 미모와 사나움, 열정을 다 빼앗아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혹여 그녀를 이빨 빠진 호랑이라 여긴다면 큰 실수일 것이다.
그녀는 더 ‘효과적인 방식’을 찾았을 뿐 내면의 독심은 이십 대의 정허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멸진이 갔고, 파불도 없고……. 이제는 아미에 아무도 남지 않았구나.’
그 시대를 알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간다.
한때 아미파의 명성이 사천을 진동시켰거늘.
이젠 오로지 그녀 혼자 남아 버린 이 고독함을 누가 알아줄 것인가.
‘그래. 원강이뿐이다. 우리 아미파가 살길은 원강이가 천무련의 맹주가 되는 것뿐이야.’
정허는 정파의 정통을 되찾고, 무림맹의 제대로 된 계보를 잇는다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라 믿었다.
다음 세대의 무신(武神)을 길러 낸 문파.
패원강의 위업에 한 손을 보탠 문파가 된다면 아미파는 다음 세대에 다시 도약할 수 있다.
팔파일방의 공동 전인, 패원강에 대한 믿음은 그처럼 정허에게 절대적이었으며 하나의 종교와도 같았다.
“흘흘.”
정허는 다탁 너머에서 그녀를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손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금정아, 일이 잘 안 풀릴까 봐 걱정이 되느냐?”
“아닙니다, 장문인.”
“괜찮다. 네 나이 때는 항상 조급하고 성급한 법이지. 그게 당연한 것이야.”
혈기 넘치는 젊은이의 눈에는 매사에 느긋한 정허가 돌아가는 세상 물정도 모르고 여유를 부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다 안다.
정허 역시도 금정의 나이를 겪어 보았는데 그 마음을 왜 모를까.
“흘흘, 내가 나이가 들면서 느낀 것은 잠깐의 승리는 중요치 않다는 것이야. 결국엔 마지막의 승자가 중요하지. 어떤 상황에서든 중요한 맥을 잘 짚는 게 중요하단다.”
“예, 장문인.”
팔파일방 명문의 법도를 깍듯하게 배운 금정이 감히 정허의 말에 토를 달 리가 없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지만, 눈빛과 호흡을 잘 들여다보면 숨길 수 없는 초조함과 불안이 가득했다.
그것이 젊음이다.
정허는 자신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추억하며 아련한 그리움을 느꼈다.
‘정무관에 대해 항의를 했지만 아미파만 욕을 먹었고, 관가에도 찍힌 것 같으니 초조할 테지. 다 이해한다, 금정아. 하지만 강해져야 한다. 아미파의 장문인 자리는 끝까지 견디며 싸워서 이기는 독심이 있어야 지켜 나갈 수 있는 것이야.’
정허는 목에 건 염주를 검지와 엄지로 굴렸다.
살짝 내리깐 눈과 주름진 얼굴에서 아미파의 장문인다운 위엄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 아이는 왔느냐?”
“예, 마침 정무관을 살피러 왔다기에 제자를 보내 불러왔습니다.”
“가 보자꾸나.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내 눈으로 봐야겠다.”
금정은 일어나는 정허를 황급히 부축하려 했다.
“괜찮다. 내가 백 살이나 먹긴 했지만 아직 성불하려면 멀었어.”
정허는 껄껄 웃으면서 금정의 손을 밀어낸 후 활기찬 걸음으로 지객당을 향했다.
***
“아미파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푸른색 장삼, 최고급은 아니지만 그리 싸지도 않은 적당한 옷감으로 무복을 갖춰 입은 그는 호리호리한 체구의 장년인이었다.
천무(天武)라는 글자가 새겨진 동그란 은 재질의 장신구가 가슴에 매달려 있었다.
눈이 작고 얼굴은 웃는 상이다.
사십 대 후반 정도의 나이.
주변을 살피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움직일 때마다 소맷자락 아래로 드러나는 손목에는 수십 개의 흉터가 훈장처럼 새겨져 있었다.
“흘흘……. 반가워요, 방익지 조장. 이름은 많이 들었어요.”
“아닙니다. 제가 무명소졸인지라 명성이 높으신 아미파 장문인을 뵙게 되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방익지는 아미파의 수많은 비구니들 사이에 혼자 들어와 있음에도 조금도 주눅 든 기색이 아니었다.
방익지는 정허 사태와 인사를 하면서도 지객당의 분위기를 살폈고, 금정 사태에게 눈인사까지 건네는 여유가 있었다.
그에게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 남성 특유의 능글거리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는 천무련이라는 거대한 뒷배를 믿는 것이다. 아미파가 감히 자신에게 해코지할 수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보일 수 있는 태도였다.
“천무련에는 드러나지 않은 인재가 많다더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제야 알겠구려. 방 조장처럼 세상살이에 능한 사람이 있으니 거대한 조직을 운영하는 데 얼마나 편하겠어요?”
방익지는 넙죽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아이고, 장문인.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하핫, 큰 칭찬을 해 주시니 이 방 모(某)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겸손하군요. 깃발을 올린 지 얼마 안 된 조직에, 아직 연륜이 부족한 련주, 거기에 주변에는 세상 경험이 없는 사람들만 잔뜩인데 어떻게 조직이 잘 돌아가겠어요? 다 방 조장처럼 연륜이 있는 사람이 삐걱거리는 것들에 기름칠을 잘해 준 덕분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연배가 있는 사람의 가치는 자신 같은 늙은이만이 안다면서 칭찬을 이어 가는 정허의 말에 방익지는 오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짧은 덤불 같은 턱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닙니다. 련주님께선 희대의 무인이시고, 새로 들어오는 무인들은 뛰어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는 팔파일방의 뛰어난 인재들도 들어온다고 하더군요.”
방익지는 단어 선택에 신중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정허는 주름진 얼굴을 활짝 피면서 웃었다.
“흘흘, 잘됐습니다. 잘됐어요. 정파의 깃발이나 다름없는 천무련에 뛰어난 인재들이 들어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예, 그렇지요.”
맞는 말이긴 하지만 천무련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아미파가 하기엔 어불성설인 칭찬이었다.
방익지의 눈빛이 깊어졌다.
“원강이가 천무련에 합류하길 잘했습니다. 그 아이 덕분에 팔파일방의 제자들도 거리낌 없이 련에 들어갔지요. 그 덕분에 천무련이 한층 더 발전할 것이니 이 늙은이는 마음이 놓입니다.”
허허 웃는 정허의 말속에 뼈가 담겨 있었다.
패원강.
팔파일방의 공동 전인이 천무련에 있기 때문에 팔파일방의 제자들이 천무련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니, 그 말인즉슨 천무공자의 덕이 아니라는 직설이었다.
“으음.”
방익지는 정허의 발언에 대해 반박을 해야 할지, 아니면 부드럽게 흘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장문인, 외람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 천무련과 아미파가 최근 들어 사천에서 의견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었지요. 어째서 저를 아미산에 초대해 주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쉽게 말해 왜 불렀는지 빨리 본심을 밝히라는 소리였다.
정허는 나직하게 웃으며 금정에게 손짓을 보냈다.
금정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찻잔을 꺼내 정허와 방익지에게 각각 한 잔씩을 따라 주었다.
“감사합니다.”
인사는 했지만 방익지는 차를 마시지 않았다.
정허는 그 모습을 웃는 얼굴로 보면서 차를 머금었다.
“방 조장, 내가 그대를 부른 이유는 아까 이미 말했답니다. 천무련에서 모든 일이 술술 풀리도록 매사에 기름칠을 해 주는 건 방 조장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크흠, 예, 저도 그렇게 믿고 있긴 합니다.”
“그러니 아미파와 천무련 사이의 불편한 상황에 방 조장이 기름칠을 좀 해 주면 어떨까, 이 늙은이는 그리 생각하는 것이지요.”
방익지는 들고 있던 찻잔을 다시 내려놓을 만큼 크게 놀랐다.
“혹시 화해를 도와 달라는 말씀이신지……?”
“흘흘, 비슷합니다. 하지만 아미산의 정기가 아직 높고 큰데 화해를 청한다는 말은 그리 맞지 않는 것 같군요.”
“아, 예. 물론이지요.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아미파의 자존심을 세우면서 천무련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만들어 주는 다리가 되어 달라는 이야기였다.
잠시 고민하던 방익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거대한 두 단체의 다리가 되는 일은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그 일은 그에게 큰 이득이 된다.
다리가 하나뿐이라는 소리는, 그 다리의 가치와 통행세도 제법 높다는 뜻이니 말이다.
“장문인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는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천무련에도 아미파에도 좋은 일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흘흘……. 믿음직하군요, 방 조장.”
“다만 제가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간 두 곳 사이에 거리가 꽤 많이 벌어졌는지라, 그리 쉽게 해결될는지…….”
우는소리를 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아미파에서 부탁을 하는 만큼 정성을 좀 보이라는 신호였다.
정허는 세상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고, 당연히 방익지가 원하는 부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탁 아래에 있던 목함에서 비단 천으로 덧댄 고급스러운 서류 하나를 꺼내 방익지에게 건넸다.
“장문인, 이게 무엇입니까?”
“우리 아미산 아래에 있는 장원입니다. 앞으로 사천과 안휘를 오가면서 우릴 위해 많은 일을 해 줄 텐데 방 조장도 지낼 곳은 있어야지요?”
나직하게 웃는 정허에게서는 그 어떤 생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별것 아니라는 듯이 툭 내민 서류였지만, 펼쳐서 내용을 읽어 본 방익지는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천에서도 손꼽히게 번화한 장소의 땅이었다.
장원이 얼마나 크고 으리으리할지는 직접 가서 봐야 알겠으나, 서류에 적힌 것만 봐도 값비싼 땅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과연 아미파.
아무리 세가 기울었다고 한들, 드넓은 사천 땅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떨치는 무파는 역시 그릇의 크기가 달랐다.
“장원 안에는 방 조장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몇 가지 준비해 둔 것이 있지요. 흘흘, 부담 갖지 말고 받으세요. 별것 아니지만 우리 아미파의 마음입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방익지는 얼떨떨해하면서도 그 장원의 가치가 얼마인지를 알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순순히 서류를 받아 들었다.
정허는 방익지가 땅문서를 품 안에 집어넣자 큰 소리로 웃으며 즐거워했다.
“이리 말이 잘 통하다니! 역시 이 늙은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는 모양입니다. 금정아, 네 말대로 이 관주를 불렀다간 어쩔 뻔했느냐?”
“……!”
방익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허는 모르는 척 말을 이어 나갔다.
“천무공자가 련을 일으켜 세울 때 등용했던 인재들 중에 가장 믿는 사람이 딱 두 명이라지요? 지금 북경 정무관주 자리에 있는 이남성 관주와, 청죽조 조장으로 있는 방익지 조장. 이 늙은이가 아는 게 맞습니까?”
“아, 예. 맞습니다. 련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흘흘, 여기 금정은 아직 보는 눈이 미숙해서 처음엔 아미파에 이 관주를 부르자고 했었답니다. 그런데 이 늙은이는 방 조장이야말로 천무련과 우리를 잘 이어 줄 인재임을 한눈에 알아봤어요. 어떻습니까? 제가 틀렸나요?”
“……아닙니다. 잘 고르셨습니다. 이 관주는 완고하여 말이 잘 통하지 않았을 겁니다.”
“역시! 역시! 아직 늙은이도 쓸모가 있는 모양입니다.”
정허는 박장대소를 그치고 조용히 합장을 했다.
“잘 부탁합니다, 방 조장. 앞으로 많이 도와주세요.”
“예, 저도 노력해 보겠습니다.”
방익지는 품 안의 서류에 신경을 쓰면서 포권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