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08화 (637/686)

21권 2화

제42장 필마온(弼馬溫) (2)

방익지가 돌아간 후, 금정은 방익지가 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땅문서를 넙죽 받는 것 보셨지요? 기가 찰 만큼 얄팍하고 세속적인 자로군요. 저런 자가 가장 신뢰하는 수하라니. 천무공자의 주변에 믿을 만한 신하가 그리도 없는 모양입니다.”

“흘흘.”

“장문인, 저런 자를 믿을 수 있을까요? 약점도 많던데 차라리 겁을 주고 부리는 게 나았던 것 아닐는지요?”

“아직 멀었구나. 금정아.”

정허는 차갑게 식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렇게 얄팍하고 자기 잇속만 챙기는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천무공자가 신뢰하는 이유가 있단다.”

“어떤 이유인지 짐작이 되질 않습니다.”

“방익지 저자는 뒷돈이나 넙죽넙죽 챙기는 것 같아도 그간 해 온 일들을 잘 살펴보면 천무련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자기 나름의 선을 지키면서 자기 잇속을 챙기는 족속이란 거지.”

“으음, 최소한의 의리는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흘흘, 그렇지. 막상 천무련에 해가 되는 일을 시키려 하면 능글거리면서 발을 뺄 인간이 분명해.”

금정은 황당해했다.

“그렇다면 돈값을 못할 텐데 저희에게는 쓸모없는 것이 아닌지요?”

“아니. 오히려 딱 좋다. 금정아. 채석장에 가면 단단한 대리석을 어떻게 쪼개는 줄 아느냐?”

“잘 모릅니다, 장문인. 힘 좋은 역사들을 고용해서 쪼개는 걸까요?”

“아니. 거대한 돌덩어리에 작은 틈을 만든 뒤 거기에 나무쐐기를 박는단다. 그리고 그 위에 매일같이 물을 붓지.”

“물을 붓는 것만으로 돌이 쪼개진단 말씀이신지요?”

“흘흘, 신기하지? 매일 주는 물이 나무쐐기를 부풀리고, 그 힘이 결국은 쇳덩이처럼 단단한 거대한 돌덩이를 반으로 쪼갠단다. 신기하지 않으냐? 우리가 하는 건 그런 일이다. 방익지라는 나무쐐기에 꾸준히 물만 주면 되는 일이야.”

정허가 백 년의 세월을 지나오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미운 사람일수록 화를 내고 겁박하는 것보다 오히려 잘해 줄 때 더 다루기 쉽다는 점이었다.

“계속 물을 주자꾸나. 그럼 언젠가는 천무련이라는 거대한 돌덩어리에 쩍! 하고 금이 갈테니.”

정허가 여유로운 미소로 숨긴 독심이 천무련을 향한다.

늙은 구렁이 같은 그녀의 마음을 젊은 금정은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

“이거, 엄청나구만.”

아미파에서 준 장원은 입구에서부터 방익지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낙선당(樂善堂)이라 적힌 현판과 대문 너머, 무려 아홉 개의 건물이 정사각형의 장원 안에 각자의 조화를 이루며 붙어 있었다.

“이거 무슨 사당이나 관청 아냐? 잘못 찾아왔나?”

일반 민가로 보기 힘들 만큼 으리으리한 건물이었다.

유서 깊은 학자 가문의 사당이나 나라에 큰 공을 세워 하사받은 대저택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방익지가 잡초 하나 없이 깨끗한 길을 통해 장원 내부로 들어가 보니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한 사람이 인사를 올렸다.

“대인께 인사드립니다. 낙선당에서 대인을 모시게 된 여월이라 합니다.”

붉은색 성장을 갖춰 입은 여인의 모습이 방익지를 당황시켰다.

여월이라는 여인은 단아한 여인이었다.

특출한 미인은 아니지만 피부가 깨끗했고 눈, 코, 입이 오밀조밀하여 매력이 있다.

키는 보통이고 체구는 좀 작은 편이다.

붉은색 성장을 갖춰 입은 것 외에는 그 흔한 비녀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시비처럼 여기면 된다고 말하며 안채로 그를 이끌었다.

“대인, 아미파에서 오신 분이 이걸 대인께 전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건……?”

그리 크지도 않은 손바닥 두 개만 한 목함이라 별 기대 없이 열었는데 그 안에는 햇빛을 반사하는 은자로 가득 차 있었다.

“흡.”

방익지는 깜짝 놀라서 서둘러 목함을 닫았다.

목함 안의 은자는 어림잡아도 오십 개는 넘어 보였다.

그 정도면 평범한 농가에서 다섯 명의 일가족이 사, 오 년은 먹을 쌀을 살 수 있는 돈이다.

‘이렇게 큰돈을 이 여인에게 맡겼다고?’

아무리 아미파라도 돈을 이리 허술히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방익지는 여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여월, 그대는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소?”

“네, 대인께서 사천에서 지내는 데 필요한 돈이 아닌지요?”

방익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되물었다.

“그대는 아미파와 어떤 관계요? 이렇게 큰돈을 믿고 맡길 만한 사이라니. 상상하기가 어렵소.”

“저희 부모님께서 두 분 다 아미파의 속가 제자셨어요. 지금은 두 분 다 돌아가셨지만, 큰 은혜를 받아 제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답니다. 대인을 모시게 된 건 그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였어요.”

차분하게 대답하는 그녀에게서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실례하겠소.”

방익지는 방심하지 않고 그녀의 맥문을 잡았다.

여월은 방익지가 그럴 거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차분하게 손목을 내주었다.

‘깨끗하군. 마치 갓 태어난 아이처럼 심맥이 깨끗해. 심공은 익혔으나 무공은 익히지 않았어.’

굳이 따지자면 양생공과 같은 기초 심법만 익힌 여인이었다.

방익지는 슬그머니 손목에서 손을 떼며 헛기침을 했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구려. 부모님과 달리 아미파의 속가 제자가 아니었던 것이오?”

“네. 저는 그저 아미산에서 본산의 일을 도우며 살아왔답니다. 제자로 들어가진 않았어요.”

“그랬군. 갑자기 그, 손목을 잡아서 미안하오.”

방익지는 여인도 겪어 볼 만큼 겪어 본 사내인데도 부끄러워졌다.

상대가 이렇게나 티끌 하나 없이 맑은 여인인데 무엇을 의심했던가.

‘첩자나 살수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너무 과한 생각을 한 건가?’

그간 너무 어두운 일만 반복하다 보니 아무래도 마음속까지 어둡게 물든 모양이었다.

방익지는 조금 반성하면서 정식으로 인사했다.

“내 이름은 방익지라고 하오. 천무련에서 일하고 있소. 앞으로 잘 부탁하겠소. 천무련의 일이 많아서 왔다 갔다 하겠지만, 앞으로도 사천에서 지내는 일이 종종 있을 것이오.”

“저는 항상 낙선당에 있을 테니 그저 시비처럼 편하게 부리시면 됩니다. 대인을 돕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니까요.”

방익지는 그렇게 여월과 만나 함께 지내게 되었다.

사람이 자꾸 보다 보면 정이 든다고 하지 않던가?

심지어 여월은 차분하면서도 집안을 가꾸는 능력이 있는 여인이었다.

청소도 잘하고 요리도 곧잘 했다.

청죽조에서 그를 따르는 무인들이 놀러 왔을 때도 연회를 위한 요리까지 만들어 내올 줄 알았다.

“우리 방 조장님이 갑자기 사천에 살림을 차렸다고 해서 뭔 소린가 싶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이만한 집을 구한 데다 현숙하고 아름다운 여인까지 얻었으니 당연히 가정을 꾸리고 싶겠지요!”

“이런 조건이면 나라도 눌러살겠다!”

괄괄한 사내놈들이 가감 없이 내뱉는 말에 방익지는 부정하지 않으면서 여월의 눈치를 살폈다.

여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거대한 집.

두어 달에 한 번씩 보내오는 은자가 가득한 목함.

모든 것이 여유로웠다.

천무련의 봉급이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큰 저택에서 시비를 부리면서 살 만큼 큰돈을 주진 않는다.

한 번 삶의 질이 크게 높아지니 이제 다시 예전처럼 동가식서가숙하며 사는 생활로 돌아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청죽조의 조원들을 불러서 거하게 좋은 음식과 술을 먹이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항상 주변에 사람이 들끓었고, 돈을 아낌없이 쓰면서 베푸니 천무련 안에서의 평판도 좋아졌다.

이제 이남성 조장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방익지는 자신이 인생 최고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확신했다.

“방 조장, 내가 고민거리가 있어요.”

아미파가 그를 다시 부른 것은 방익지가 그런 생활에 완전히 젖어들었을 때쯤이었다.

정허는 주름진 손으로 쪼글쪼글한 얼굴을 가리면서 나직하게 웃었다.

“이 늙은이가 방 조장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떤 일이신지요?”

“천무공자가 아미산 근처에 정무관을 지으면서 이 근방의 흑도와 사파들을 관리하던 비도방을 없앴어요. 들은 적이 있지요?”

정허는 고상한 얼굴로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 예. 비도방 사람들은 대부분 정무관에서 일하고 있다 들었습니다만.”

“바로 그겁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도 인근의 암흑가는 혼란에 빠져 있더군요. 구심점이 없으니 자기들끼리 싸우고 구역 싸움도 벌이고……. 저희에게 관리를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이 늙은이가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아, 예. 그렇군요.”

방익지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걸 왜 나한테 이야기하는 거지?’

천무련이 비도방을 무너뜨린 바람에 벌어진 일이니 방익지도 완전히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익지가 해결할 일은 아니다.

말 그대로 아미파의 일.

사천 땅에서 아미파의 명성을 유지하고 싶다면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곡차입니다.”

방익지는 옆에서 금정이 따라 주는 찻물을 단박에 들이켰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방 조장.”

“예, 장문인.”

“그동안 방 조장에게 전달된 목함이 누가 주던 것인지 알고 있나요?”

“……아미파가 주던 것 아니었습니까?”

“흑도와 사파 쪽에서 장사를 하는 이가 있어요. 공가상회(孔家商會)라 불리는 곳이지요. 그곳에서 주기적으로 찾아와 계속 부탁을 하더군요. 흑도와 사파의 구심점 좀 잡아 달라고.”

“아…….”

“우린 공가상회에서 주는 목함을 방 조장에게 그대로 보내고 있었답니다.”

정허는 야생동물을 덫 안에 몰아넣듯 조금씩 차분하게 방익지를 압박했다.

“나는 방 조장에게 이 일을 부탁하고 싶어요.”

쪼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비어 있는 방익지의 찻잔에 찻물이 다시 채워졌다.

“장문인, 저는 천무련의 사람입니다.”

“잘 알지요. 그래서 방 조장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흘흘, 따지고 보면 이 일이 모두 천무련이 정무관을 짓는 바람에 벌어진 일인데, 그렇다고 해서 천무련에 책임을 물으면 일이 복잡해지지 않겠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허가 부탁하던 게 무엇이던가?

천무련과 아미파의 사이를 중재해 달라고 했다.

그러니 천무련과의 사이가 안 좋아질 수 있는 사건을 대신 처리하거나 중재해야 할 의무도 방익지에게 있는 것이다.

‘이 늙은이. 처음부터 상황을 이렇게 만들려고 작정했구나.’

방익지는 이를 갈았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알고도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방익지 본인인 것을.

“공가상회 회주가 그러더군요. 아무 일도 해 주지 않으면 이제는 목함을 갖고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더 이상 목함은 없다는 소리군요.”

“흘흘, 우리 아미파는 그저 무공이랑 불도밖에 모르니 말입니다.”

방익지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제 그는 목함 가득 은자를 받는 생활에 길들여져 있었다.

큰 저택에 살며 돈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동생들과 좋은 음식과 좋은 술을 먹는 삶은 마약과도 같다.

더군다나 여월.

최근 들어 서로 마음을 터놓고 연인이 되어 가는 그녀 때문에 아미파와는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미파를 위해 흑도에 발을 들인다고?’

그건 방익지가 정한 ‘선’을 넘는 결정이었다.

“흘흘, 방 조장, 이 늙은이가 그리 융통성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허는 방익지가 망설이는 기색을 놓치지 않고 시의적절한 제안을 던졌다.

“난 방 조장을 괴롭히려고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아니에요. 잘 생각해 봐요. 목함은 별것도 아닙니다.”

“으음.”

“공가상회를 도와서 흑도와 사파를 조용히 잠재우면, 거기서 나오는 이득은 다 방 조장의 것이 되지 않겠어요?”

“……!”

“대부분 공가상회가 처리할 테니 별로 어려운 일도 없을 거예요. 그저 처음에 힘만 조금 쓰면 되는 일이죠. 모두가 좋은 일입니다. 잘 되었지요?”

인자하게 웃는 정허의 이야기는 방익지에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처럼 다가왔다.

“저는…….”

목함보다 훨씬 많은 은자.

사천에서의 호화로운 생활을 보장하는 삶.

방익지가 답할 말은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가 들이켠 찻물은 왠지 모르게 달콤하면서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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