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 3화
제42장 필마온(弼馬溫) (3)
청죽조의 사내 중에는 방익지의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 있었다.
특히 감광과 장복은 방익지의 왼팔,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다.
감광은 건장한 덩치에 왼손 약지가 잘린 무골이었고, 장복은 키도 작고 마른 쥐상이지만 검 쓰는 기술이 능란한 독종이다.
방익지는 감광의 조부모 두 분의 장례를 사비로 다 치러 줬으며, 최근에 혼인한 장복이 살림을 마련한 것도 팔 할은 방익지가 돈을 보태 준 덕분이었다.
천무련에서 만나 함께 일하는 사이라곤 하나, 이 정도면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방익지의 말이라면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라고 해도 그럴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방익지가 느닷없이 사천에서 험한 일 좀 하자고 제안했을 때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고 수락하는 것도 당연했다.
“흑도랑 사파 놈들을 혼내 주고 기강을 잡아야겠어. 천무련을 위해서도 그렇고, 우릴 위해서도 그게 최선이다.”
방익지는 감광과 장복을 비롯한 십여 명을 데리고 정무관으로 향했다.
사천 정무관.
대륙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수많은 정무관 중에서도 첫 번째.
최초이자 최고의 본관이다.
“정무관 일호가 가장 크다더니, 진짜 크네. 사천 현령이 지내는 관청보다 더 큰 거 아니오?”
“내년에 입관하려고 대기하는 사람만 수백 명이라니 말 다 한 거지. 오히려 더 확장할 준비를 하고 있다던데? 천무련 덕분에 호강하네, 호강해.”
감광과 장복이 부러움 반 비꼬는 마음 반을 담아 투덜거렸다.
방익지는 본인의 집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정무관을 둘러보면서 정무관의 관주인 묘광을 만났다.
“사천 정무관주인 묘광입니다.”
묘광은 암흑가를 주름잡던 비도방 출신답게 온몸에 흉터를 새기고 있는 사내였다.
그런데 몸에 남은 화려한 흉터와는 달리, ‘정무(正武)’라는 두 글자만 쓰여 있는 깨끗하고 소탈한 무복과 묘광의 맑은 눈빛은 그가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보였다.
“타핫!”
“하앗!”
정무관 곳곳에선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정무관의 교관들과 입관생들이 서로 대련을 하며 무공을 수련하기 때문이다.
정무관에 제공된 팔파일방의 기본 공이 곳곳에서 수련되고 있었다.
심지어 관주인 묘광조차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공을 수련 중이었는지 목덜미와 이마에 땀이 범벅이었다.
“방익지라고 하오. 청죽조의 조장을 맡고 있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천무공자의 곁을 든든히 지켜 주는 맹장이시라고 들었습니다.”
“하핫, 맹장이라니. 뭘 그렇게까지.”
“이곳에서 수련하는 아이들의 절반 이상의 꿈이 천무련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방 조장님과 뒤의 분들은 우리 관원들의 꿈을 이미 이룬 분들이지요.”
묘광은 말 몇 마디로 상대방의 호감을 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감광과 장복을 포함한 청죽조의 심복들이 사천 정무관주 묘광을 대하는 태도가 벌써 바뀌었다.
‘암흑가 출신치고는 언변이 상당하군. 정말로 개과천선하여 소탈한 학관 관주가 되었다, 이건가?’
솔직히 말한다면 방익지는 그를 믿지 않는다.
사람이 완전히 뒤바뀌어 개과천선한다는 이야기도 뜬구름 잡는 순진한 소리에 불과하다 여긴다.
“묘 관주가 삼어비검이라 불리던 고수라고 들었소. 오늘은 그 시절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묘광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다가 안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청죽조 수하들이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방익지는 묘광과 두 사람만 남았을 때 물었다.
“사천 암흑가를 통제해야 할 것 같소.”
“과연, 그 이야기셨군요.”
묘광은 방익지와 동년배다.
사십 중반을 넘어 이제는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
근력도 정점을 찍었고 아직 활기도 가득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무공을 익힌 무인으로서는 이제 내리막길만 남았다.
상승의 경지를 뚫지 않는 한, 세월에 따른 노화는 이길 수가 없다.
“저는 아미파가 나설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어쩌다 보니 내가 처리해야 하게 되었소. 두 곳의 관계를 조율해야 하는 입장이라서.”
“……과연.”
“나와 나를 따르는 청죽조 동료들이 통제를 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오. 암흑가에서 어디의 힘이 가장 큰지 묘 관주의 조언을 듣고 싶소.”
집무실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묘광은 잠시 자신의 턱을 쓰다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사천 암흑가에서 어디가 가장 인원이 많은지, 아니면 가장 돈이 많이 흘러 들어가는 곳이 어디인지, 그런 건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없애거나 무너뜨린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그자들을 대체할 새로운 인물이 떠오르겠지요.”
“괜찮소. 무너뜨릴 생각은 없소. 딱 좋군. 그게 어딘지 정보를 알려 주시오.”
“무너뜨릴 생각은 없다고요? 그럼 어떻게 암흑가를 통제하실 생각이십니까?”
“공가상회라는 곳이 암흑가 자금 대부분을 조율한다고 들었소. 그곳의 도움을 받아서 통제해 보려 하오.”
“공가상회?”
묘광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돈놀이에 뛰어나지만 암흑가의 힘의 논리는 전혀 모르는 자들입니다. 통제라면, 앞으로 장기간 시간을 들여 관리하겠다는 말입니까? 방 조장님이 직접이요?”
“그렇소. 무슨 문제라도 있소?”
묘광의 눈빛이 묘했다.
방익지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이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방익지가 인상을 쓰면서 한마디 하려는 찰나, 묘광은 절묘한 시기에 적절하게 물러났다.
그는 서탁에서 두툼한 책자를 꺼내 방익지에게 넘겨주었다.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비도방 시절에 제가 쓰던 장부입니다. 아마 공가상회에서도 비슷한 걸 갖고 있을 테지만 똑같지는 않을 겁니다. 사천 암흑가에서 가장 인원이 많은 곳은 배수(扒手)들이 모여 사는 폐광산의 거지촌이고, 돈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금회루의 도박장입니다. 낭인들이 모이는 사당이 몇 개 있지만, 그놈들은 한곳으로 뭉치지를 않으니 돈만 있으면 통제가 됩니다. 그러니 거지촌과 금회루. 암흑가의 일 대부분은 그 두 곳에서 시작되고 끝납니다.”
“고맙소. 소매치기랑 도박이 핵심이군. 나한테 딱 필요한 정보였소.”
방익지는 감사를 표하면서 장부를 품 안에 넣었다.
“잠시 제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음?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시오.”
“저 밖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교관 놈들이 왜 처음에 비도방의 무인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알게 뭔가?
방익지는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돌려 말했다.
“내가 알 방법이 없구려.”
“대부분이 비슷합니다. 아까 말한 배수들이 사는 폐광산의 거지촌 출신이 대부분이지요. 기녀의 사생아나 돈 몇 푼에 팔려 버린 아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아이들 대부분이 배수가 되고, 그들 중에 무재가 있어서 싸움 좀 한다는 놈들이 거르고 걸러져서 결국엔 비도방의 무인이 됩니다.”
“뭐, 사파나 흑도의 시작은 어딜 가나 다 그런 식이지 않겠소?”
세상에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은 너무 많다.
기녀의 사생아 출신?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놈?
전국 어딜 가나 그 정도 사연은 발에 챌 만큼 많을 것이다. 세상은 잔인하고 치열하다. 남녀노소를 떠나 밥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예, 그렇지요. 제 말은 불행해서 불쌍하다는 게 아니라, 시작이 그런 바람에 흘러흘러 사파의 파락호들이 된 거지, 정말 원해서 그 일을 하는 자는 별로 없다는 소리입니다.”
“어쩌다 보니 암흑가의 무인이 되었다? 다른 일을 할 기회가 없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요?”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교관들이 요즘 인근 마을에 나가면 뭐라고 불리는지 혹시 아십니까?”
“잘 모르겠소. 뭐라고 부르오?”
“사부라고 부릅니다. 묘 사부, 금 사부, 장 사부. 하핫, 얼마 전까지 사람 등골 빼먹는 파락호 놈들이라면서 모른 척 고개 돌리던 사람들이 이젠 웃는 얼굴로 말을 걸어옵니다. 자기 자식은 잘하고 있냐고 묻는 것부터 시작해서, 잘 부탁한다면서 무슨 절기만 되면 음식을 바리바리 싸서 한 보따리 가져다줍니다. 장에 나가서 물건 좀 사려고 하면 덤으로 냅다 더 넣어 줘서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요.”
방익지는 심드렁하게 듣고 있었다.
갑자기 묘광이 왜 정무관 사부가 되어서 좋은 점을 설파하는지 모르겠으나, 정무관의 무공 사부가 될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는 방익지가 듣기엔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다.
“그렇구만. 묘 관주가 좋아하는 걸 보니 잘된 일인 것 같소.”
“……저희에겐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습니다. 저쪽 암흑가에서 넘어와 보니 그렇게 느껴집니다. 다시 가라고요?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지 않는 한 저희는 절대로 정무관의 사부 자리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야 묘 관주도 그렇고 교관들도 그렇고. 그럴 만한 사람이라서 잘 넘어온 거겠지. 솔직히 나쁜 쪽에 물들어서 쉽게 쉽게 살던 자들이 평범하게 열심히 일해서 벌어먹고 살 수 있겠소?”
“……쉽게 돈 버는 일에 너무 물들어 버린 사람들 말이군요. 분명히 그런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요.”
“련주님께 묘 관주의 그 간절한 마음에 대해서는 잘 전달해 드리겠소. 역시 련주님께서 사람 보는 혜안이 있으셨던 모양이오.”
“방 조장님.”
“왜 그러시오?”
“조장님이 계신 그 자리. 그리고 천무련의 무인 자리는 누군가는 정말 간절히 꿈에 그리면서도 가지 못하는 자리라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하핫, 고맙소. 쑥스럽구만. 정무관의 사람들도 천무련의 사람이니 너무 그리 올려 주지 마시오.”
묘광이 왜 느닷없이 그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끝까지 알아채지 못한 방익지가 평소에 하듯 사무적으로 대화를 끝냈다.
“저는 아무런 문제에도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정무관의 일에만 집중하겠습니다.”
“그러시오. 암흑가 쪽은 내가 관리할 테니.”
암흑가에서 빛으로 빠져나온 자.
그리고 빛에서 암흑가에 발을 딛으려는 자.
두 사람의 운명이 교차한다.
장부를 손에 넣은 방익지가 떠나는 뒷모습을 묘광은 하염없이 바라보며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
온 산이 노랗고 붉은 단풍으로 물들어 갈 때쯤, 아미파의 정허사태는 의외의 방문객을 맞이했다.
피풍의를 뒤집어쓴 여인은 자신을 천무련의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단아한 외모에 무공을 제대로 익힌 여인이며, 그녀는 자신이 천무련에서 ‘금룡각주’라는 직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늙은이의 식견이 좁아 천무련에 금룡각이라는 곳이 있는지 몰랐군요. 그곳의 각주라고요?”
“그렇습니다. 장문인.”
아미파를 찾은 여인.
한때는 금룡상회의 후계자였으나 이제는 천무련 금룡각의 각주 자리를 맡은 문주희는 천무련의 상징인 목걸이를 정허에게 보여 주었다.
“금룡각은 천무련 내부에 잘못된 점은 없는지, 자금의 흐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살피는 곳입니다. 최근에 신설되었어요.”
“호오, 감찰을 하는 곳입니까? 관부의 어사들처럼요?”
“네.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네요.”
문주희는 흘흘 인자하게 웃는 정허에게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천무련과 우리의 사이가 그리 돈독한 것은 아니니 새로 생긴 금룡각의 각주가 인사를 하러 왔을 리는 만무하고, 무슨 일입니까?”
“아미파와 저희의 사이가 좋지 않으니 오히려 더욱더 아미파에 찾아와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요? 어째서요?”
“저희 천무련의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시죠?”
문주희는 당돌하게 여겨질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정허는 흥미를 보였다.
바위틈 속에 꽁꽁 숨어 있던 구렁이가 살며시 머리를 내밀 듯, 정허는 주름진 눈을 부드럽게 반달 모양으로 휘면서 즐거워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한 가지 아는 게 있긴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