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10화 (639/686)

21권 4화

제42장 필마온(弼馬溫) (4)

“어떤 일이죠?”

문주희는 지체 없이 물었다.

새로 생긴 금룡각의 각주로서 문주희는 최대한 큰 성과를 보여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 성과가 강렬하고 충격적일수록 문주희에게는 좋은 일이다.

“흘흘, 내가 그걸 말할 수는 없지요.”

“네?”

알고 있다고 직접 말했으면서 말해 줄 수는 없다니?

정허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주름진 손으로 직접 차를 따라 문주희에게 내밀었다.

문주희는 공손히 받았으나 마시지는 않았다.

“금룡각주. 잘 생각해 보세요. 안 그래도 천무련과 우리의 사이가 그리 친밀하지 않은데, 은밀한 추문에 엮여서야 좋은 꼴을 볼 수 있겠어요? 아이고, 이 늙은이는 그런 거 싫습니다. 둘 사이에 끼어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누가 좋아할까요.”

“……그렇군요. 제가 무리한 요청을 드린 모양이에요. 하지만 장문인께서 곤란해질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상황을 알아낼 증거를 찾아내면 천무련에서 곧바로 조치를 취할 테니까요.”

“흘흘.”

정허는 말없이 한동안 웃기만 했다.

문주희는 정허의 인자한 웃음이 마치 그녀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금룡각주. 내 나이가 곧 백 살이 된답니다. 길게 이야기를 끌다 보면 언제 죽을지를 모르니 솔직히 이야기하지요.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알고 있냐는 게 아니에요. ‘왜’ 그것을 그대에게 말해 주어야 하냐는 게 핵심이지요. 내 말이 이해가 되나요?”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왜 말해야 하냐고? 이젠 아주 대놓고 대가를 요구하는구나. 정허사태가 성정이 요사하다더니 그게 정말인 것 같아.’

너무 싫어서 치가 떨릴 지경이지만, 문주희는 그래도 무사히 표정을 관리했다.

“장문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아미파가 그토록 트집을 잡고 싶어 하던 천무련의 ‘치부’입니다. 그게 공개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요?”

지금 이 순간 천무련의 추문이 터져서 명예가 깎이는 건 아미파가 바라마지 않는 일일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천무공자 장소호를 공격하는 데 쓰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허는 깜짝 놀란 것처럼 태연자약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저런, 누가 듣기라도 하면 아미파가 천무련을 원수처럼 여기는 줄 오해하겠어요.”

정허는 천하의 모두가 아는 사실을 끝까지 모른 척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정말 구렁이 같은 늙은이네. 이야기하는데 답답해 죽겠어.’

정허는 절대로 무언가를 직접 인정하지 않는다.

배배 꼬고, 은유적으로 말하면서 빠져나갈 틈을 항상 엿본다.

“금룡각주. 그대를 보고 있노라면 이 늙은이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요. 젊고, 활기차고, 야망에 휩싸인 여인. 원하는 걸 쟁취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철혈의 심성. 흘흘, 이 늙은이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그랬나요?”

“물론이지요. 이 주름진 얼굴도 한때는 달덩이처럼 뽀얗고 예뻤던 시절이 었었어요.”

정허는 아련한 눈으로 문주희를 바라보며 따스한 찻잔을 주름진 손으로 감싸 쥐었다.

“금룡각주, 우린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 흘흘, 그렇지요?”

“네, 맞아요. 오늘 저랑 처음 보셨죠.”

“그렇다면 처음 본 사람이 천무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도 믿기 힘든데, 내가 왜 지금 이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가는지 아나요?”

“네?”

“흥미로워서예요. 지금 그대의 모습을 한번 보세요. 이미 누가 범인인지도 알고, 그 죄가 뭔지도 아는데 굳이 우릴 찾아온 것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품위 있게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웃는 정허의 앞에서 문주희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대가 정말로 천무련을 위한다면 나를 찾아오지 않았을 테지요. 조용히 처리하는 게 천무련을 위한 최선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나를 찾아왔어요. 왜? 흘흘, 난 그 점이 마음에 드는 겁니다. 금룡각주, 말해 봐요. 사실은 천무련이니 천무공자니. 안중에도 없지요?”

“…….아뇨, 오해세요.”

“자기 자신도 스스로의 마음을 모를 때가 있지요. 그대는 생각이 짧고 성급한 사람이 아니니 무지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에요. 이래 봬도 백 살 먹은 늙은이는 그런 걸 잘 보는 편입니다. 흘흘, 재밌군요. 재밌어요. 하지만 한 가지 말해 둘 것은 그대의 야망에 휘둘려 줄 만큼 아미파와 나는 녹록지 않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범인을 잡는 일에 아미파가 끼어들 생각은 없다는 것만 말해 두지요.”

문주희는 알몸으로 앉아 있는 듯한 수치심을 느꼈다.

‘완전히 간파당했다.’

정허의 말대로다.

그녀는 ‘누가’ 죄를 지었는지.

그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도 짐작을 다 하고 있었다.

이는 금룡상회에서 나고 자라며 갈고닦은 상재(商材)로 천무련의 장부를 살피자 명명백백 드러난 사실이었다.

문제는 증명이다.

이런 류의 부정은 비밀 장부를 찾아 눈앞에 들이밀지 않는 한 그냥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뿐인 일이다.

원래 적의 적은 친구라고 하지 않던가.

아미파를 살살 구슬리면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허라는 구렁이는 그리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눈치채고 아예 문주희까지 잡아먹을 것처럼 몸을 칭칭 감아온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한 말씀 드릴게요. 장문인.”

“말씀해 보세요.”

“비록 련주 자리에 의견이 달라서 천무련과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 해도 팔파일방.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정파를 지탱하는 큰 기둥이죠. 천무련의 간부에게 돈과 향락을 제공하여 끌어들인 뒤 사적으로 이용했다는 이야기는……. 누가 들어도 그리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을까요?”

“흘흘, 억측이로군요.”

“강호의 사람들은 그런 억측을 좋아하더라구요. 그걸 막을 좋은 방법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제게 협조해 주시는 것 아닐까요? 나중에 아미파는 관련이 없다. 사천 흑도에서 알아서 뇌물을 바친 거라고 말할 ‘꺼리’라도 있어야죠. 말 몇 마디면 그게 해결이 되는데 그걸 안 하시려고요?”

문주희는 당찬 태도로 정허와 맞섰다.

아미파는 큰 문파다.

그저 비구니 몇 명이 모여서 무공이나 수련하는 사찰이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

그 무시무시한 사천당가와 동급으로 여겨지며 사천의 패권을 나누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직접 죄목을 언급하면서 아는 척하는 건 무모한 행동이지만, 그렇다 한들 기가 죽어서 끌려다니면 아미파 좋을 대로 이용만 당할 게 분명했다.

문주희는 도박을 걸었다.

아미파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공명정대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천무련의 사람인 그녀에게 직접 해코지를 하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흘흘흘.”

정허는 혀를 차는 건지 알 수 없는 태도로 한참이나 웃었다.

“금룡각주. 아무리 그리 어르고 달래 봐야 아미파가 나서서 공개적으로 그대의 편을 들어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가 보기엔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하지만……!”

“끝까지 들으세요. 그래도 그대의 노력이 가상하니 단서를 하나 드리지요. 앞으로는 전적으로 그대의 선택입니다. 더 깊이 파고들 건지. 아니면 이쯤에서 그만두고 가진 바 능력만으로 천무련 안에서 해결을 볼 것인지 잘, 오랫동안 생각해 보세요.”

정허는 다탁 위에 찻물을 쏟아내더니, 주름진 손가락으로 누구나 알아볼 수 있게 두 개의 글자를 썼다.

―공가(孔家).

문주희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공가상회! 그렇구나. 그쪽 자금 관리를 다 공가상회가 하는구나. 사천 암흑가와 전혀 관련이 없던 사람이 어떻게 그쪽 일을 하는가 했는데, 공가상회가 핵심이라면 말이 돼.’

사천 암흑가에 대해 조사할 때 종종 들려오던 이름이었다.

아미파와 방익지 패거리.

두 곳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의외의 정보를 얻었다.

“고맙습니다. 그쪽을 좀 더 살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마무리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아미파는 천무련 금룡각을 응원하고 협조하겠어요.”

끝에는 서로 간의 덕담을 나누며 대화를 마무리한 문주희가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하고 떠나간다.

정허 홀로 남은 접객당.

문주희를 산문까지 배웅한 금정이 돌아와 정허에게 물었다.

“산 넘어 산이군요. 이야기가 새어 나갈 구석이 없었는데 대체 어디서 알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흘흘, 저런 아이들은 종이에 적힌 글자만 보고도 머릿속으로 천하 곳곳의 짐 마차를 떠올리며 이문을 계산하더구나. 숫자 중에 이상한 게 있었던 것이겠지.”

“주판을 두드리는 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머릿속은 상인인데 무공은 제대로 익혔더구나. 재밌는 아이야.”

정허는 찻잔을 기울이며 끌끌 웃었다.

“그녀가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장문인, 방 조장은 이제 버리시는 건지요?”

“그럴 리가 있겠느냐.”

정허는 공과 사의 구분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문주희의 가치는 방익지만큼 높지 않다.

“쐐기가 두 개가 될지, 아니면 쐐기에 붓는 물이 될지 모르겠구나.”

여전히 그들을 천무련을 반으로 쪼갤 도구로 여기는 정허는 그렇게 선문답 같은 말만 남긴 채 조용히 찻잔을 기울였다.

금정은 더는 묻지 않고 찻잔에 찻물을 채워 주는 일만을 반복했다.

아미파의 정허.

백 살이 다 되어 가면서도 현역에서 물러나지 않는 장문인은, 같은 사문의 제자인 금정이 보기에도 괴물 같은 구석이 있는 노인이었다.

***

아미파에서 나온 문주희에게는 고민하고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사천 정무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사천 정무관주 묘광에게 자신을 소개하자, 그는 담백한 태도로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저는 그저 사천 정무관에서 련주님께서 베푼 은혜를 갚고 싶을 뿐입니다. 복잡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습니다.”

약간 지긋지긋해하는 듯한 기색도 보이는 묘광을 보며 문주희는 두 눈에 이채를 띄었다.

“비슷한 일이 또 있었나요?”

“제 과거를 쫓는 분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었죠? 말해 주세요. 천무련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분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천무련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요.”

묘광은 그 역시도 비도방이라는 하나의 방파를 이끌던 사람이기에 돌아가는 정세를 금방 눈치챈 듯 보였다.

한발 물러선 채 아무 쪽에도 얽히기 싫은 태도를 분명하게 표현했다.

‘부패를 조사하는 일인데, 파벌싸움처럼 느껴지는 모양이구나.’

문주희는 최대한 정중하고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저는 누가 왔었는지는 이미 알고 있어요. 방익지 조장일 테죠. 제가 왜 방익지 조장을 쫓는지 아시나요?”

“모르겠습니다.”

“그가 나라에 비유하면 개국공신이기 때문이에요. 공에 대한 대가를 받아 많은 것을 누리고 있으니 정확하게 조사를 해 보는 중이었는데, 제가 보기엔 장부에 조사해 볼 만한 건수가 꽤 있었어요. 청백리 관료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죠.”

그 말에는 묘광도 이견을 표하지 않았다.

그가 느낀 방익지에 대한 인상도 청백리는 아니라는 점에 동일할 것이었다.

“묘 관주께서는 그때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해 주시기만 하면 되요. 더하거나 덜할 필요도 없어요. 그리고 제가 짐작하건대, 그 사람이 하는 일은 천무련을 위해서 하는 일은 아닐 거예요.”

“…….별거 없었습니다. 아미파와 천무련의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 임무라며, 제가 비도방주였던 시절에 사용하던 장부를 받아 가셨습니다.”

‘아차!’

문주희는 무릎을 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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