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11화 (640/686)

21권 5화

제42장 필마온(弼馬溫) (5)

‘아미파보다 이곳에 먼저 올 걸 그랬어. 여기가 더 중요한 곳이었구나.’

묘광이 정사지간 문파인 비도방의 방주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방익지가 묘광에게 도움을 요청할 경우를 생각하지 못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문주희의 실책이었다.

‘장부를 가져갔다는 건 내 예상이 사실이었다는 소리야. 방익지는 사천 암흑가에 뿌리를 내리고 정말로 지배를 할 생각이란 거지. 천무련이라는 배경을 병풍처럼 둘러놓고 사천에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한다? 이 사람,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방익지의 실체를 알아갈수록 문주희가 생각했던 부패의 선을 훨씬 넘어간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온갖 생각이 번뜩였다.

문주희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면서 물었다.

“묘 관주, 공가상회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요. 알려 줄 수 있나요?”

“내가 아는 한도 안에서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묘광은 떨떠름해했지만, 그가 아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공가상회가 일하는 방식은 문주희의 흥미를 끌었다. 도박장에서 큰돈을 굴리고, 그걸 기반으로 여러 가지 밀매에도 손을 대면서 영역을 넓혀 나간다. 묘광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흑도나 사파 무림인들에게는 공가상회가 이득을 아낌없이 넉넉히 나눠 준다는 평판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엔 엄청나게 이득을 취하고 있는데?’

정상적인 상계와 비교하면 이문을 남기는 비율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인데, 흑도나 사파가 보기엔 그나마도 많이 주는 편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묘 관주의 말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문주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묘광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포권을 취한 채 허리를 깊이 숙이는 진심 어린 인사였다.

묘광이 당황하며 마주 허리를 굽혔다.

“부끄러운 과거의 기억을 몇 개 알려 드렸을 뿐입니다. 이렇게 큰 예를 받을 일은 아닌 듯합니다.”

“아니에요. 사람이 진심으로 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언제나 놀랍고 큰 감동을 주네요. 묘 관주 덕분에 많이 배웠어요.”

“감사한 말씀에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일은 언젠가 꼭 보답할게요. 앞으로도 사천 정무관을 잘 부탁드려요.”

묘광은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문주희에게 크게 감격하여 정무관 입구까지 배웅해 주었다.

문주희는 피풍의를 뒤집어쓴 채 정무관에서 말을 타고 떠났다.

그리고 멀리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한 사람이 문주희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

키가 작고 깡마른 쥐상의 사내가 두꺼운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는 방익지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조장님, 장복입니다.”

“어어, 장복이. 무슨 일이야?”

방익지는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

“천무련 쪽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련에서 사람이야 늘 오잖아? 나 만나러 왔대?”

“아닙니다. 저희에게 오지 않고 아미파에 갔다가 사천 정무관에 들렀습니다.”

움찔.

방익지가 장부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서늘한 시선이 장복을 노려보았다.

“누군데? 몇 명이 왔어?”

“한 명입니다.”

“한 명?”

방익지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설마 이남성 그 인간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스무 살 남짓한 여자인데 자신을 금룡각주라고 소개했답니다.”

“뭐?”

방익지는 황당해졌다.

금룡각이라고 하면 최근에 급격히 몸집이 커진 련에서 ‘감찰’ 활동을 하기 위해 만든다던 단체였다.

‘각주가 내가 아니라고?’

새로운 단체.

조(組)가 아니라 각(閣) 단위의 집단이 만들어진다는 걸 들었을 때 방익지는 당연히 자신이 그 자리에 가는 줄 알고 있었다.

공공연히 방익지가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고, 실제로 천무련 안에서 연배나 인망으로 볼 때 각주의 자리를 맡을 만한 인재는 방익지 말고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를 여자가? 그것도 스무 살 언저리의 어린애로? 금룡각이 창설되었다는 소식도 못 들었는데?’

방익지는 머릿속으로 그가 아는 천무련 안의 모든 여성을 떠올려보았다.

“설마?”

방익지가 깜짝 놀라 입을 벙긋거리다가 물었다.

“혹시 여자치고 키가 크고, 붉은색 장포를 입었다거나 그랬냐?”

방익지의 목소리가 떨린다.

만약 방익지가 생각하는 그녀가 금룡각주의 자리를 채 갔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장복은 쥐처럼 툭 튀어나온 앞니를 들썩이며 손을 내저었다.

“련주님과 친한 하오문의 거화신녀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닙니다, 조장님. 저희도 거화신녀는 알아볼 줄 압니다. 왜 이러십니까?”

“아, 그랬지. 미안하다. 요즘 정신이 없어서.”

방익지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거화신녀 대미미가 온 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괜찮다.

최악의 경우엔 싸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뭔데? 천무련에서 스무 살 언저리의 여인? 금룡각주를 맡을 만한? 상상이 안 되는데? 그런 인물이 있나? 새로 들어온 거야?”

“아미파나 사천 정무관의 대응을 보면 가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최근에 같이 다니는 그 거지촌 애들이 그래?”

“예. 폐광산에 있는 소매치기들이 사천 땅 곳곳에 간자처럼 숨어 있어서 모르는 게 없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하는 일 때문에 정무관이랑 아미파를 좀 감시하고 있으라고 해 놨습니다. 알려 주는 정보들도 상당히 정확합니다.”

“그래, 그럴 만하지. 폐광산 출신들이 점소이도 하고 짐도 나르고 사천 땅에서 온갖 일을 다한다면서?”

“안 하는 게 없고, 못하는 건 더 없답니다.”

“그럼 이번에 온 그 계집애가 진짜 금룡각주이긴 하다는 건데…….”

“조장님, 그 여자가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게 왠지 느낌이 좋질 않습니다. 순서도 아미파 다음이 곧바로 사천 정무관입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조장님을 노리는 것 아닙니까?”

“젠장, 알아. 내 생각도 그래.”

“처리할까요?”

천무련의 일은 중요하지만, 방익지와 감광, 장복과 같은 ‘사천 청죽조 패거리’에게는 자신들의 부와 목숨이 더욱 중요했다.

특히 감광과 장복이 보기엔 본파에서 내려온 이 금룡각주라는 여인은 방익지와 자신들을 위협하는 적일 뿐이었다.

방익지는 손을 내저었다.

“위험한 소리하고 있네. 안 돼. 어찌됐든 같은 천무련 사람이야. 함부로 움직이다간 큰일난다. 일단은 속내를 좀 알아봐야지.”

“그냥 두고 봅니까? 그러기엔 행동이 찜찜합니다. 구린내가 나지 않습니까?”

“그래, 구린내도 보통 구린내가 아냐. 축사에 온 것처럼 쾨쾨한 냄새가 나. 안 그래도 우리 천무련이 지금 북경에서 적양문이랑 싸우기 시작했는데 이 중요한 시국에 왜 내 뒤를 캐지? 이거 무슨 일이야? 련주님의 의도인가? 이상한데. 이럴 분이 아닌데. 혹시 총군사님이 알아보나?”

방익지는 중얼거리면서 생각을 정리하다가 탁자를 탁!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장복아.”

“예, 조장님.”

“좀 더 자세히 알아봐. 정말로 그 금룡각주라는 계집애가 내 뒤를 캐서 날 잡으려는 거면……. 나도 똑같이 되갚아 줘야지.”

방익지의 목소리는 냉철했다.

사천에서 그의 입지는 하늘을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감광, 장복과 같은 심복들은 사천에 가정까지 꾸렸다.

으리으리한 저택과 풍족한 돈으로 청죽조원들의 삶의 기반이 천무련 시절과 비교하여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상황이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뜨내기 여인 하나에 잃어버리기엔 그들의 터전은 너무나 소중했다.

“더 알아보고, 그다음에 만난다. 결정은 그때 내려야겠어.”

“알겠습니다.”

감광과 장복에게 방익지는 신과도 같다.

공손히 수긍하는 그에게는 한 점의 의심도 없었다.

***

문주희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사천의 어두운 세계에서 돈을 쓸어담고 있다는 공가상회였다.

사천의 중심가.

고기를 취급하는 반점들과 홍등이 늘어서 있는 청루와 홍루 사창가 사이엔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과일 가게가 하나 있다.

이름은 공과(孔果).

공자를 상징하는 ‘공’ 자와 과일의 ‘과’ 자를 이어붙인 이름인데 거기서 과일을 사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이고, 오늘도 사람이 너무 많네.”

“어쩌겠어. 여기만큼 싼 곳이 없는데. 동전 몇 개에 과일을 살 수 있는 곳이 여기 말고 또 있겠어?”

“공과는 참 신기해. 이렇게 팔아서 뭐가 남긴 하나 모르겠어.”

“그러게 말이야. 매번 이렇게 싸게 팔아서 뭐가 남긴 하나?”

중년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며 과일 가게를 걱정했다.

온갖 과일들이 그야말로 날개돋힌 듯 팔려 나갔다.

주변 시세의 반값도 안 되는 가격에 내다 파니 안 팔리는 게 이상할 상황이다.

‘그야 과일로 돈을 벌 생각이 없으니 이렇게 장사가 잘될 수 있는 거겠지. 정무관주한테 미리 듣지 않았으면 절대로 몰랐겠어. 어떻게 이런 장사 잘 되는 과일 가게가 공가상회의 본점일 수가 있지?’

암흑가 상회가 다 이런 건지는 몰라도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문주희는 인산인해를 이루는 과일 가게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한창 짐마차에서 과일들을 내리던 인부들이 묘한 눈빛으로 문주희를 힐끔거렸다.

“우리 가게에 볼일이 있으시오?”

“여기 금부처가 있다고 해서 만나러 왔는데요. 안에 계세요?”

금불(金佛).

문주희는 묘광에게 그 밀어(密語)를 처음 들었을 때 크게 웃을 뻔한 것을 꾹 눌러 참았다.

암흑가 상인이 본인을 금부처라 부르다니.

우습지 않은가.

“대인의 손님이셨구려.”

밀어를 들은 인부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는 옮기던 상자들을 내려놓더니 문주희를 가게 뒷문으로 안내했다.

과일 가게의 내부는 특이한 구조였다.

정문에선 과일을 팔고, 뒤에서는 물건을 내려놓고.

뻥 뚫린 구조의 창고처럼 보였는데, 알고 보면 옆에 나 있는 작은 문을 통해 옆건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흐음.”

문주희는 갑자기 눈앞에서 펼쳐지는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보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숨어서 따라오는 사람만 셋이네.’

그 외에도 곳곳에 숨어 있는 경계병이 꽤나 많다.

문주희는 품 안에 있는 단도들의 무게감을 점검하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공가상회의 회주.

공만종은 들은 대로 비대한 몸집에 넉살 좋아 보이는 얼굴을 지닌 중년인이었다.

그는 번쩍거리는 비단 장포를 두른 돼지 같았다. 살에 파묻혀서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문주희를 향해 눈웃음을 쳤다.

“천무련에서 손님이 오셨군요. 환영합니다, 금룡각주.”

“이미 다 알고 계셨어요? 공가상회의 정보력이 생각보다 대단하네요.”

“허헛! 아미파랑 사천 정무관을 연이어 들르셨으니 주목을 안 할 수가 없더군요. 그 두 곳은 저희도 주의 깊게 살피는 곳이라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공만종은 두툼한 턱살을 떨면서 웃었다.

“그나저나 묘광 이 사람, 정무관에 가더니 이제는 완전히 천무련의 사람이 된 모양입니다. 본인만 알고 있으라고 알려 준 밀어를 알려 줘 버리다니. 이제 밀어를 바꿔야겠어요.”

너스레를 떨면서 가볍게 말하지만 밀어를 바꾼다는 말은 앞으로는 만나 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이나 다름없었다.

두 번은 없다.

이번 만남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

문주희는 피풍의를 젖히고 단아한 얼굴을 드러내며 부드러운 ‘상인의 미소’를 지었다.

“바꿀 필요 없어요. 그냥 제가 묘 관주의 밀어를 물려받은 것 뿐이니까요. 저만 아는 것이니 앞으로는 저만 쓰면 되죠.”

“호오.”

공만종은 신기해하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무인과 상인.

둘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가 크게 다르다.

공만종은 문주희에게서 자신과 똑같은 상인의 느낌을 받았다.

“소저는 그냥 무인이 아니셨군요. 장사를 하는 제가 앞으로도 소저를 만날 일이 있을까요?”

“있죠. 천무련의 자금을 감찰하는게 제 일인데요.”

“감찰이라니. 무서운 소릴 하십니다. 저 같은 장사치들은 꿈에서 볼까 무서운 말이라 앞으로는 더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요?”

“원래 칼 바로 아래에 가장 큰돈이 있는 법이죠. 잘 아시는 분이 그러시네요. 위기가 기회가 될 걸요?”

공만종과 문주희가 서로 웃는 얼굴로 가만히 바라봤다.

상인의 기싸움이었다.

먼저 이채를 띄고 호기심을 표현한 것은 공만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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