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 6화
제42장 필마온(弼馬溫) (6)
“그 칼은 얼마나 날카롭고, 그 아래에 있는 돈은 얼마나 큽니까?”
공만종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지만 실처럼 가는 눈은 조금의 빈틈도 없이 문주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만종은 아미파에선 아양을 떨고 못난 사람인 척 연기를 했었다. 힘들어서 죽을 것같이 보채면서 목함 안에 은자를 잔뜩 넣어 바보처럼 매달 갖다 바치기도 했다.
공만종은 정말로 그런 사람인가?
나약하고 줏대가 없어서 아미파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무능력한 상인이던가?
그럴 리가 없다.
치열하고 사납기 짝이 없는 사천의 암흑가에서 일가를 이뤄 낸 상인이 그리 약하겠는가?
목숨의 위협은 매일 있었고, 자칫 모든 것을 잃을 뻔한 경험도 수백 번 경험한 사람이 공만종이었다.
문주희는 뚱뚱하기만 한 줄 알았던 그에게서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다.
‘공가상회 회주, 공만종. 대단한 사람이네. 그런데 아버지보다는 못해. 비교도 안 되지.’
사천 암흑가 최고의 상인?
우습다.
문주희의 아버지는 무에서 유를 이뤄 낸 자.
천하를 들썩이게 하던 금룡상회의 주인이었던 사람이다.
문주희의 웃음은 철벽처럼 단단했다.
그녀는 공만종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가볍게 받아 내며 오히려 배짱까지 부렸다.
“천무련의 칼끝이 얼마나 날카롭냐고요? 간단해요. 천하의 금룡상회를 말 몇 마디에 난도질할 만큼 날카로워요.”
“흡?”
공만종의 평정이 깨졌다.
그는 천지가 개벽한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아 되물었다.
“소저. 위험한 발언이군요. 그 발언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천하를 호령하던 금룡상회가 갑자기 무너진 일은 상계에 큰 충격을 준 사건입니다. 그 일의 배후가 천무련이라니. 허헛, 이건 감당하기 힘들군요.”
공만종은 반신반의하는 듯 보였다. 그의 입술이 고집스럽게 닫혔다.
“소저, 금룡상회에 대한 건 고작 저한테 기 싸움에서 이기겠답시고 괜한 호기로 내뱉을 만한 발언이 아닙니다.”
“호기를 부리는 게 아니에요. 그게 사실일 뿐이죠. 천무련은 말 몇 마디로 금룡상회를 무너뜨렸고, 다시 말 몇 마디로 금룡상회의 회주를 감옥에서 꺼내 살려 주었어요.”
문주희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말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그때의 절망적인 기억이 아직도 손이 떨릴 만큼 생생한데, 어찌 그런 말로 허세를 부릴까.
“소저, 이건……. 으음, 소저,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한들, 그런 사실을 천무련에서 대놓고 알리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소저는 그에 대해 알고 있지요?”
“제가 어떻게 알고 있냐고요?”
문주희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간단해요. 천무련의 말 몇 마디에 무너진 금룡상회의 회주께서 저의 아버지시니까요.”
공만종은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움찔 떨었다.
문갑룡이 누구던가?
등짐을 지고 걸어서 장사하는 보부상에서부터 시작해, 천하를 뒤흔드는 거상(巨商)이 되기까지.
상계에 발을 담가 보기라도 해 본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다.
금룡상회의 회주 문갑룡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의 존재가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보부상에게 얼마나 큰 희망을 주는지 말이다.
그 존재감이 어찌나 컸던지, 세간에는 ‘금룡상회는 미워해도, 문갑룡은 존경할 수밖에 없다.’라는 말까지 돌았다.
그런데 그런 금룡상회의 전설적인 회주.
문갑룡의 딸이 눈앞에 있다니.
공만종이 혼란에 빠져 입을 더듬거렸다.
“그게 정말로…….”
당연히 공만종도 한 명의 상인이었다.
그 역시도 하찮은 일개 보부상에서 시작했고, 지금 공가상회라는 큰 집단을 만들기까지 온갖 고난을 뛰어넘어왔다.
그런 그였기에 문주희의 아버지가 금룡상회의 회주라는 사실에 좀처럼 평정을 되찾지 못했다.
문갑룡은 그가 닮고 싶은 우상이자 진정한 상인이었던 탓이다.
“정말로, 아니, 진실로, 소저의 아버지가……. 아니, 부친께서 금룡상회의 회주, 천하에 이름 높은 금귀 문갑룡이라고요?”
“네. 믿기 힘드세요?”
“…….”
“저는 문주희라고 하고, 아버님의 하나뿐인 딸입니다. 무산학관을 다니다가 얼마 전에 상회로 복귀했었죠.”
“허!”
공만종은 헛웃음을 흘렸다.
“분명, 금룡상회의 회주께서 딸을 무산학관에 입관시켰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만…….”
“충격을 받으신 것 같네요.”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충격적이군요.”
처음에는 충격.
그다음에는 커다란 절망과 공포감, 그리고 문주희에 대한 연민이 피어올랐다.
“그게 정녕 사실이라면, 소저는, 소저의 본가를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뜨린 천무련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말이군요.”
“네, 그렇게 되네요.”
“도대체 거기서 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만종의 얼굴에서 이젠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금룡상회를 없앤 천무련.
그런 천무련을 위해서 일하는 문주희.
그리고 그녀가 직접 공가상회로 찾아온 이유는 이젠 웃으면서 다루기엔 심각하기 짝이 없는 사안이 되었다.
“이유는 특별한 게 없어요. 칼이 너무 크고 날카로우니까. 얻어맞는 쪽보다는 휘두르는 쪽이 되기로 한 거죠.”
“으음.”
“조금 더 첨언하자면, 아까 말했듯이 가장 위험한 곳에 가장 큰돈이 있기도 하고요.”
그녀의 말은 안타깝기도 했고, 가장 상인답기도 했다.
공만종은 문주희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대는 여장부였군요.”
“상인이라면 누구나 저랑 똑같은 결정을 했을 거예요.”
“천하의 금룡상회를 갈가리 찢어 버린 칼이니, 저 같은 사천 땅 한구석의 상회는 쉽게 베어 버리겠지요. 잘 알겠습니다. 문 소저의 결단에는 다시 한 번 찬사를 보냅니다.”
“고마워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는 한 상회의 주인. 묻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래서 큰 칼 아래에 있는 큰돈이라는 건 어떤 의미지요?”
금룡상회와 문갑룡에 대한 존경은 존경이고, 한 상회의 회주로서 결정할 사안은 또 다른 이야기다.
그는 사천 암흑가에 지은 이 커다란 자신만의 왕국을 지켜야만 했다.
문주희는 그런 공만종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 회주. 방익지 조장은 평소에 돈을 얼마나 가져가죠?”
뜬금없는 질문.
민감한 이름이 담겼다.
“소저,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어차피 서로 다 아는 사실인데 모른 척은 하지 말아요. 세상이 그리 깨끗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저는 천무련의 자금을 ‘감찰’할 뿐이에요. 아시죠?”
공만종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방 조장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사천 암흑가에 질서를 가져온 사람입니다.”
“그렇겠죠. 공 회주한테도 도움이 되고 있을 거고요. 얼마나 가져가나요? 오 할은 너무 많고, 사 할 정도 가져가나요? 공 회주한테는 방 조장이 모르는 수익원도 있을 테니 공가상회 전체의 수익으로 따지면 삼 할 정도 되겠죠?”
“허허헛.”
공만종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대략 비슷하지요. 피는 속일 수 없나 봅니다. 소저. 상재가 보통이 아니시군요?”
“간단한 계산인데요, 뭘. 그런데 삼 할이면 지출이 굉장히 크겠어요. 그걸 다른 이득으로 채워 볼 생각은 없나요?”
은자 세 냥 버는 사람의 삼 할이면 은자 한 냥을 떼 주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 규모가 하나의 성(城)을 통괄하는 수준이 되면 떼어 주는 삼 할의 은자는 거대한 규모의 돈이 된다.
“호오.”
공만종은 흥미를 보였다.
상인의 의리?
물론 있다.
인맥과 체면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상인의 의리는 서로 간에 충분한 이득을 주고받을 때만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이득이라는 게 무슨 뜻이지요?”
“간단해요. 선을 넘어 버린 방 조장은 꼭 제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천무련에 제지당하겠죠. 그러고 나면 어쩌죠? 천무련에는 체면과 명예 때문에 차마 직접 손을 대지 못하는 암흑가의 사업들이 여러 가지 있어요. 예를 들면 안휘성의 비학문이라는 곳이 그렇죠.”
“비학문이라. 들어 본 적이 있지요.”
“네, 정파의 탈을 쓰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더러운 문파였어요. 거기도 알고 보니 정사지간의 문파처럼 온갖 일에 엮여 있었는데, 그 비학문을 무너뜨리고 흡수하는 과정에서 그런 사업들은 거의 도외시되었어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그냥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것과 같죠.”
“……소저,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천무련의 전담 흑도 상인이 되라는 그런 소리죠?”
“어차피 삼 할을 나눠 먹을 거라면 크게 나눠 먹어서 이득을 키우자는 이야기예요. 어때요? 괜찮은 이야기죠?”
괜찮은 이야기 정도가 아니다.
방익지라는 천무련의 일개 조장이 지켜 주는 게 아니라, 천무련이라는 거대한 단체가 뒷배가 되는 데다 새로운 시장도 크게 개척해 준다는 소리가 아닌가.
물론 밀월 관계일 뿐이고, 당당히 밖으로 드러낼 수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사천 땅 안에서만 활약하던 공가상회가 전국으로 퍼져 나갈 기회이기도 했다.
“대가는 무엇입니까?”
“방익지 조장과 거래를 할 때 쓰던 장부가 좋겠네요.”
“으음.”
“그걸 갖고 당장 죄를 벌하고 죽이겠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천무련의 입장에서 방 조장을 제어할 무기를 하나 쥐고 있겠다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죠.”
공만종은 진지하게 고민한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워낙 큰일이니 저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군요. 이해해 주시겠지요?”
“물론이죠. 그리고 천무련에 진위 여부도 확인해야 하잖아요? 그렇죠?”
공만종은 부정하지 않았다.
문주희가 아무리 그가 존경하는 금룡상회의 딸이라고 해도, 이 일은 함부로 결정하기엔 너무나 큰일이다.
문주희의 정체, 천무련의 속뜻.
모든 것을 확실히 몇 번씩 짚어 가며 결정해야 했다.
“금룡각주, 지낼 곳은 있으신지요? 손님으로 계실 곳을 알아봐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열흘 후에 제가 다시 찾아올게요. 그 정도면 괜찮겠죠?”
“예, 그럼 그때까지 저도 답변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기대할게요.”
문주희를 정중하게 배웅한 공만종은 그 즉시 자신의 참모진을 불러모아 소리쳤다.
“문주희라는 여인의 정체, 천무련 총군사와 접촉해서 우리랑 정말로 함께 일하고 싶은지 진위 여부를 파악해! 빨리! 시간이 없다!”
그 어느 때보다도 추상같은 명령에 사천 암흑가에서 안주하던 공가상회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공가상회에서 빠져나온 문주희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세 사람과 마주쳤다.
질 좋은 옷을 입고 사람 좋은 인상을 지닌 중년의 사내가 그녀를 향해 웃었다.
문주희는 슬슬 때가 되긴 했다고 생각하며 중년의 사내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힐끗 살폈다.
마치 호위나 직속 수하처럼 두 사람이 조용히 서 있었는데, 한 사람은 건장한 체구에 약지가 없었고 다른 한 사람은 쥐처럼 생긴 얼굴에 왜소하면서도 고집스러운 눈빛을 지녔다.
‘기세가 상당하네.’
두 사람 모두 절정 초입에 다가가는 고수다.
문주희는 그만한 고수 두 사람을 심복처럼 거느리고 있는 중년의 사내와 눈을 마주하고 가만히 서로를 응시했다.
사천에 파랑을 일으키고 있는 청죽조의 조장, 방익지가 문주희에게 먼저 포권을 취했다.
“말로만 듣던 금룡각주를 드디어 만나는군요. 청죽조 조장 방 모(某)입니다.”
“금룡각주 문주희예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