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 7화
제42장 필마온(弼馬溫) (7)
‘사교성이 좋고 처세술도 갖고 있어. 사람들이 따르는 이유를 알겠네. 거기에 뒷돈으로 든든한 자금까지 생겼으니 호랑이한테 날개를 달아 준 격이야.’
어찌 보면 천무련주 장소호가 너무 신임하고 권한을 준 것이 오히려 방익지를 날뛰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천무공자 장소호의 신뢰를 이용해 중간에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방익지.
금룡각주의 자리를 받자마자 방익지의 뒤를 캐고 있는 문주희.
두 사람의 만남은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긴장이 흘렀다.
“금룡각주라고 해 봤자 이름뿐인걸요. 아직 제대로 된 조직도 없는 이름뿐인 직책에 불과해요. 저는 방 조장님이 천무련에서 가장 인망이 깊은 분이라 들었어요. 반갑습니다.”
문주희는 마주 포권을 취하면서 방익지 뒤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뒤의 두 분은 누구시죠? 저랑 같은 천무련 분인가요?”
감광과 장복이 방익지의 허락을 얻은 뒤 인사했다.
“청죽조원 감광입니다.”
“청죽조원 장복입니다.”
두 사람은 목소리가 냉랭했다. 겉으로나마 친근하게 대하는 방익지와는 달리, 언제든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 수 있다는 듯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풍겼다.
‘단순하네. 내가 밉다 이거지?’
문주희는 차라리 저렇게 대놓고 미워하는 게 대응하기는 편하다고 생각했다.
방익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웃으면서 적을 대할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말이다.
“허헛, 조직이 없으면 만들면 되는 것이지요. 뭐든지 이름이 가장 중요한 법입니다. 제가 처음 천무련에 왔을 때는 애초에 련주님과 총군사님밖에 없었어요.”
방익지가 슬쩍 자신의 ‘역사’를 말하는 모습에 문주희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네. 이야기 들었어요. 천무련을 나라라고 치면 방 조장님은 개국공신이라면서요?”
“어이쿠, 개국공신이라니. 제가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도 초창기부터 궂은일 다하면서 고생을 좀 하긴 했지요. 다행히도 알고 지낸 지 오래된 덕분에 련주님께서 저를 신뢰해 주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대신 그 신뢰에 부응하기 위해 이렇게 타지에서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어야 하고요.”
방익지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너스레를 떨었다.
천무공자 장소호를 향한 방익지의 충성심은 진짜다.
다만 신하로서 지켜야 할 선을 아슬아슬하게 늘 넘어다닐 뿐.
“그러시군요. 다행이네요. 원래 역사를 보면 개국공신은 늘 숙청당하잖아요? 방 조장님은 이렇게 열심히 하시니 천무련주도 알아줄 거라 생각해요.”
세 치 혀로 내뱉는 말 몇 마디의 힘이 이렇게나 크다.
숙청을 논하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는다.
감광이 눈을 부릅뜨면서 나서려는 것을 장복이 옆에서 뜯어말렸다.
방익지는 잠시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오히려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하하하핫!”
방익지는 문주희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숙청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무서운 말입니다. 예, 그렇지요. 개국공신은 늘 숙청당하더군요. 그러니 더 열심히 해서 련주님께 뭔가를 보여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정말 열심히 살고 계신 것 같아요. 특히 사천에서요. 집도 사천에 갖고 계시고, 따르는 사람들도 많고. 이러다 나중에는 아예 사천에 자리를 잡으시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시가 돋혀있다.
방익지는 여전히 웃어넘겼다.
“우리 천무련이 아미파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저라도 나서서 중간 역할을 좀 해야지 어쩌겠습니까? 계속 안휘와 사천을 왕복하며 지내다 보니 저도 요즘은 힘이 듭니다. 그냥 련주님 하나 보고 일하는 거예요.”
“그렇군요. 그렇게 열심히 하시니 개국공신 대우를 받는 거겠죠?”
“허헛, 정말로 개국공신의 대우를 받았다면, 아무리 이름뿐인 각주 자리라도 문 각주가 아니라 제가 그 자리에 앉아 있지 않겠습니까?”
방익지가 처음으로 천무련에 대한 불만을 토해 냈다.
문주희는 그의 불만이 ‘자리’라는 것에 주목했다.
“원래 제 자리를 바라셨나 보죠?”
“그럼요. 천무련 최초의 ‘각주’자리인데요. 게다가 천무련 내부를 감찰하는 막강한 권위가 있는 일이잖습니까. 허헛, 금룡각이라는 곳이 생긴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저는 당연히 제가 갈 줄 알았어요.”
“……그냥 서로 잘하는 분야가 달라서 일이 나눠진 거겠죠.”
“그럴까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역시 무산학관 출신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련주님과 동기라는 것이 그렇게나 중요한 모양입니다. 역시 같은 학관 출신은 좋군요.”
문주희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동안 아미파, 정무관, 공가상회. 세 곳을 들렀고, 그곳의 능력들을 대략적으로 모두 보았었는데 그들 중에 문주희가 무산학관 출신임을 알고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저에 대해 많이 조사하셨네요?”
“당연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임 금룡각주가 부임하자마자 만사 제쳐 두고 사천에 오셨는데.”
여전히 웃는 얼굴이지만 이젠 서로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방익지는 분명히 화를 내고 있었다.
“이해는 합니다. 금룡상회가 련주님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그 딸인 문 각주는 출발부터 단단히 잘못된 셈이고 그러니 천무련에 들어오자마자 어떻게든 큰 공을 세우고 싶겠죠.”
“모든 이들이 그렇게 공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는 않아요.”
“허헛, 농담도. 그럼 왜 그렇게 힘들게 사천을 휘젓고 다니는 겁니까? 피 끓는 정의감 때문에?”
“…….”
“공을 세우려면 큰 인물들부터 감찰을 해서 하나쯤 잡아넣어야 할 텐데, 련주님과 총군사님을 제외한다면 남는 건 이남성이나 저뿐이니……. 뭐, 이남성은 제가 별로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뒷돈을 받거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성격은 아니죠. 결국 남는 건 나 방익지 하나뿐이군요.”
중년의 나이.
어려서는 황산에서 낭인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고생했고, 중년의 나이엔 천무련의 초창기 일원으로 들어와 온갖 일을 다 경험했다.
방익지가 성큼 문주희를 향해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가까워진 거리.
서로 손만 내밀면 닿을 거리에서 방익지가 웃는다.
능수능란한 사내.
방익지가 허물을 벗듯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래도 그렇지. 왜 나냐? 이 어린 계집애야.”
“뭐라고요?”
“내가 누구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내가 천무련을 위해 지금 이 순간도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내 등에 칼을 꽂아? 이게 천무련을 위해 공을 세우는 것 같으냐?”
예의나 가식 따윈 집어던지고 말하는 방익지는 문주희를 섬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제야 가면을 벗으셨네?’
문주희는 지지 않고 따졌다.
“노력했겠죠. 뒷돈도 받고, 그 돈으로 생색내면서 자기 사람들 챙기고, 천무련에 알리지 않은 채 사천 암흑가도 관리하고.”
“그랬지.”
“부정하지 않으시네요?”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 내가 천무련에 피해를 준 게 있나? 난 늘 천무련의 일을 최우선에 두고 항상 열심히 일했어!”
방익지가 속삭이듯 하는 말에는 온갖 감정들이 다 뒤섞여 있으나, 그중에 죄책감은 없었다.
“궤변이군요. 천무련이랑 사이가 안 좋은 아미파에서 돈과 저택을 받고, 천무련이라는 뒷배를 활용해 사천 암흑가를 관리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그게 별일이 아니라고요? 련의 규칙을 뭐로 보는 거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요?”
“모르는 건 너다. 련주님과 총군사님은 모든 것을 크게 보는 분이시지. ‘현지 조달’이다.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현지에서 돈 좀 조달한 게 뭐 대수라고. 나를 질책이나 하실 것 같은가?”
방익지는 문주희를 비웃었다.
“어리석은 계집애야. 넌 아무것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경고하지. 주제넘게 나서지 말고 돌아가서 얌전히 천무련 본단의 장부나 정리해라.”
문주희는 입으로 손을 가리면서 웃었다.
평소에 그러지 않지만, 방익지의 화를 돋우기 위해서다.
“흥미롭네요. 방 조장이 사천에서 번 돈은요? 그건 천무련 장부에 적어서 정리할 돈이 아니고요?”
“아니지.”
“왜죠? 천무련이라는 간판을 이용해 번 돈인데?”
“현지 조달이니까. 여기서 벌어서 임무를 위해 여기서 모조리 쓰고 간다. 장부에 적힐 여지가 없지.”
“정말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질 않네요. 사고방식이 다르군요?”
“다시 말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건 너다.”
비웃는 방익지와 가면을 쓴 것처럼 웃는 문주희가 서로를 노려본다.
“규칙은 소중해요. 지키지 않으면 조직은 금방 엉망이 되죠.”
“고상한 척하지 마. 너도 가슴 깊이 진심으로 천무련을 위한다면 북경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이 중요한 순간에 천무련의 핵심 인물인 내 등에 칼을 꽂을 리가 없지.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이건 그저 공을 세우고 싶은 두 사람의 다툼일 뿐이다. 위선을 떠는 건 그만두는 게 어떻겠나?”
방익지의 독설이 문주희를 처음으로 마음속 깊이 흔들어 놓았다.
방익지는 부패했다.
천무련이라는 뒷배를 이용해 활개 치고 다니면서 온갖 이득을 다 보고 다닌다.
그래도, 능력이 없는 바보가 아니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
천무공자에 대한 분노와 증오.
그렇지만 그걸 잊고 살고 싶어서 규칙과 정의감으로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는 문주희의 내면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지 않았는가.
“방 조장, 필마온(弼馬溫)이라는 거 알아요?”
“그게 뭐지?”
“서유기에 나오는 말이에요. 제천대성 손오공이 하도 속세에서 말썽을 피우니까. 결국 옥황상제는 그를 천계로 불러서 필마온이라는 관직을 내려 천계의 말을 관리하게 만들죠.”
“그렇군. 천방지축이라도 관직을 내리면 그에 순종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건가?”
“아뇨, 그 반대예요. 손오공은 한동안 정말 열심히 일해서 천계의 말들을 살찌우죠. 하지만 자기가 하던 일이 휘황찬란한 무장들에게 말을 바치는 ‘아랫것’의 일이라는 걸 깨달은 손오공은 결국 천계에서 난장을 피우고 때려치우고 뛰쳐 나와요.”
“그럴 만도 하군.”
“그래요. 그게 바로 당신이에요.”
방익지가 입을 꾹 다문다.
문주희는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본 방익지에게 통쾌한 한 방을 날렸다.
“아미파가 돈과 저택을 주면서 인정해 줬죠? 사천 암흑가에서도 위세를 떨쳐서 아무도 막지 못하고요? 그럴 수도 있죠. 필마온이니까요. 필마온도 천계의 말들한테는 절대적인 존재였어요. 그런데 아미파한테 당신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하찮은 직위를 준 사람일 뿐입니다. 정신 차려요.”
“다르다. 상황은 내가 통제하고 있어.”
“련주나 총군사나 다들 크게 보는 사람이라 작은 흠은 탓하지 않을 거라고요? 그 말도 맞아요. 그런데 말이죠. 다들 너무 크게 보는 사람이라 오히려 잘라 낼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완전히 썩둑 도려낼 거예요. 날 뒷조사해 봤으니 알죠? 내가 왜 그걸 알고 있는지?”
“…….”
“그걸 속으로는 아니까 내가 조사할 때 그렇게 걱정하고 긴장하는 거잖아요? 정말로 당당했으면 뭐가 문제예요? 내가 어딜 들쑤시고 다니든.”
문주희가 한 걸음 물러선다.
방익지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는 자신이 필마온이라는 말에 크게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나빠진 듯 보였지만, 그래도 자신을 절제할 줄 알았다.
“문 각주, 강호 무림은 냉정한 곳이오. 같은 천무련의 사람으로서 한 번은 넘어가겠소. 하지만 두 번은, 나도 그대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좌시하지 않겠다.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일 거다.
“좋아요. 배려 고마워요.”
이토록 서로 속내를 터놓았음에도 생사결이 곧바로 벌어지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 것이다.
문주희는 굳이 더 싸움을 걸지 않고 묵묵히 물러났다.
‘방익지의 행동이 빠르네. 천무련으로 돌아갈까? 아냐, 한 번만. 공가상회에서 장부만 얻으면 완전히 끝낼 수 있어. 열흘만 버티자.’
문주희는 물러났고, 방익지도 극한의 인내심으로 선을 넘지 않고 버텼다.
그리고 오 일 후.
방익지는 공가상회의 회주 공만종에게 회담을 요청받았다.
“방 조장, 드는 돈을 좀 줄여야겠습니다. 예전처럼 사 할을 줄 수가 없어요.”
“……이유가 무엇이오?”
“그 돈을 주고는 사업이 굴러가질 않으니 그러는 것이지요. 크흠! 방법은 있어요. 받는 돈을 사 할에서 삼 할로 줄여 준다면 우린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직접적인 이유는 말하지 않지만, 원인은 명백했다.
문주희!
금룡각주의 농간!
빠득―.
방익지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