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 8화
제42장 필마온(弼馬溫) (8)
“사 할에서 삼 할로 줄이면 돈이 얼마나 줄어드는지 아시오?”
“물론이지요. 이미 다 계산해 보았습니다. 우리 사천 땅 암흑가 전체의 수입이 은으로 십만 냥쯤 되니, 사 할이면 사만 냥, 삼 할이면 삼만 냥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만 냥 정도가 줄어드는군요.”
공만종은 이런 건 주판을 두드릴 필요도 없다는 듯이 앞에 놓인 주판을 그냥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기만 했다.
꿀꺽.
방익지는 마른침을 삼켰다.
십만 냥.
은으로 만 냥 단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은 한 냥이면 쌀을 두 석을 살 수 있다.
보통 부부 한 쌍이 일 년간 쌀 네 석을 먹으니, 은 두 냥으로 일 년간 쌀을 먹을 수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런 게 십만 냥?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다. 명나라 전체의 조세 가 이백만 냥 정도 되고, 강남에서 거둬들이는 일 년 조세가 백만 냥이다.
당장 방익지에게 떨어지는 삼만 냥이라는 돈은 그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삼만 냥…… 삼만 냥이라니. 그냥 참을까? 아니지.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다. 자존심의 문제다.’
방익지는 가슴 깊숙이 묻어 두었던 심지에 불이 붙는 것을 느꼈다.
윗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처세에 능한 사람은 아랫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잘 아는 법이다.
방익지는 얼굴을 내밀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아까보다 공만종과 얼굴이 훨씬 가까워졌다.
숨결이 닿을 만한 거리.
공만종이 슬쩍 얼굴을 뒤로 빼서 거리를 벌리려고 하는데 방익지가 양손으로 그의 멱살을 덥석 붙잡았다.
파라라락―.
스릉―!
아무것도 없었던 천장에서 갑자기 흑의복면을 한 두 사내가 번개처럼 뛰어내려 방익지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대들보 위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내려섰음에도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방익지는 자신의 목덜미에 놓인 검날 두 개를 힐끗 본 뒤 피식 웃었다.
“그래. 암흑가 상인이 호위도 없이 다닐리는 없지. 그런데 공 회주. 나도 혼자가 아니야.”
콰직!
기다렸다는 듯이 나무 문이 양쪽으로 박살 나 뜯겨 나가며 두 사람이 들이닥쳤다.
감광과 장복, 방익지의 심복이자 청죽조의 조원 두 사람이 장내의 상황을 파악하는 순간 검을 뽑아 살수들에게 겨누었다.
“이것들이 감히!”
“우리 조장님께 검을 겨눠?”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사나운 기세에 살수들도 당황하며 검을 들지 않은 손을 들어 다가오지 말라 신호를 보냈다.
“웃기고 있네.”
“당장 그 검 안 떼?”
살수들이 방익지의 목에 구멍을 내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살수들의 목을 치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정작 이 모든 사태의 주범인 방익지는 태연한 안색이다.
그는 양손으로 잡은 멱살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공만종과 코가 맞닿을 만큼 가까웠다.
방익지는 섬뜩한 시선으로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공 회주, 이러면 안 되는 거지. 기껏 내 체면도 내려놓고 암흑가 파락호 잡배 놈들이랑 드잡이질하면서 세력 평정 다 해 줬더니 뭐가 어째? 이제 와서 말이 달라져서 일만 냥을 깎는다고 하면 말이야. 그건 내 돈 일만 냥을 빼앗아 가겠다는 말밖에 더 되냐고?”
“허헛, 진정하세요. 방 조장, 말했듯이 상황이 바뀌었어요. 약속했던 사 할을 다 주면 우리 상회가 운영이 안 된다니까요?”
“개소리. 솔직히 까놓고 좀 이야기해 볼까? 내가 칼질하는 무인이라고 우습게 봤나 본데, 나는 비도문이 옛날에 쓰던 장부를 꼼꼼히 다 살펴본 사람이야. 폐광산에서 사람을 얼마나 보냈고, 공가상회에선 돈을 얼마나 썼는지 한번 읊어 봐?”
“허어, 이번 일을 하면서 신경을 많이 쓰셨군요?”
“십만 냥짜리 일인데. 당연하지. 이번에 장부 정리하면서 나는 옛날에 공가상회가 담당하던 사업체는 건드리지도 않았어. 얼마나 더 남겨 먹든 그건 동업자에 대한 의리라고 생각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크흠!”
공만종은 부정하지는 못하고 헛기침만 했다.
“그렇게 눈을 감아 줬는데, 정작 나한테는 뒤통수를 쳐? 욕심이 과하다는 걸 모르겠나?”
“방 조장, 삼만 냥은 큰 돈이에요. 심지어 매년 그 돈이 들어오는 건데 이렇게 화낼 일이 아니지요.”
“원래는 사만 냥이었다며!”
“그건 제가 직접 ‘계산’해 주니까 알게 된 금액 아닙니까? 이렇게 화낼 일이 아니죠. 솔직히 전체 매출이 십만 냥인지 지금 알게 된 것 아닙니까?”
“언제 알게 되었냐는게 왜 중요해? 내 돈 일만 냥을 공 회주, 당신이 떼어먹고 가져가겠다는 게 중요하지.”
“허어, 그렇게 꼬아서 생각하지 마세요. 방 조장. 다 같이 잘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천만에, 지금 우리 둘 다 속으로는 아는데 이야기하지 않는 걸 꺼내 볼까? 금룡각주 만났지? 부정할 생각은 말아. 그 여자가 여기 들어갔다 나오는 걸 내가 직접 봤으니까. 그리고 당신은 어떤 제안을 들었어. 그걸 빌미로 나한테 지금 이렇게 뒤통수를 치려는 거고.”
꾸우욱.
공만종의 목깃을 거머쥔 방익지의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전완근이 꿈틀거리며 힘이 들어가니, 자연스레 두툼한 턱살이 조여져서 숨통을 틀어막았다.
“아니, 잠깐. 일단 멱살은 좀 놓고…….”
서걱―.
고용주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는 살수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날카로운 칼날이 방익지의 수염을 살짝 잘라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이 새끼들이!”
감광과 장복이 살수들의 목을 벨 것처럼 칼을 들이민다.
물고 물리는 관계.
그들을 멈춘 것은 공만종이었다.
“잠깐, 잠깐. 켁, 난 괜찮으니, 싸우지는 마시고…… 으음.”
목소리가 메말라서 갈라진다.
공만종은 충혈된 눈으로, 하지만 겁쟁이의 가면은 내던진 채 솔직하고 당당한 눈빛으로 방익지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요. 허헛, 난 당신을 털어먹을 겁니다. 그래서요? 어쩌려고요? 삼만 냥을 안 받고 날릴 겁니까?”
“사만 냥. 원래 약속대로 내놔.”
“그렇게는 못하죠. 내가 그동안…… 으음, 파락호 놈들이랑 하루 이틀…… 장사한 줄 압니까……?”
험한 꼴, 못 볼 꼴은 질릴 만큼 본 사람이 공만종이다.
사천 땅의 소문난 금충(金蟲).
백날 목을 졸라 봐야 공만종에게서는 그럴수록 동전 한 푼도 더 못 받는다.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뚫어져라 노려보던 두 사람은, 이번엔 방익지가 먼저 물러났다.
“후욱, 후욱.”
방익지가 멱살을 잡은 손 중에 하나를 놓고 손을 들어 올렸다.
“쳇.”
“운 좋은 줄 알아라.”
한마디씩 불만스럽게 내뱉은 감광과 장복이 검을 물렸다.
살수들도 방익지의 목에서 칼날을 조금 떼어냈지만 완전히 칼집속에 집어넣지는 않았다.
“그래. 폭력에 굴할 인간은 아니지.”
“쿨럭, 쿨럭. 그렇습니다. 그걸로는 저를 겁주지 못해요.”
“금룡각주가 뭘 약속했지?”
“천무련이 장악하고 있는 각 지역의 암흑가 상권.”
“……!”
“그렇죠. 후후, 방 조장이 절대로 약속할 수 없는 보상이죠.”
천무련의 개국공신이라 자부하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일개 조장의 신분으로 약속할 수 있는 데 한계가 있는 건 당연했다.
방익지는 숨을 씨근거리면서 다탁의 주판을 손바닥으로 쾅! 하고 내리쳤다.
“그럴 리가 있나. 거짓말이로군.”
“저도 의심스럽게 생각해서 알아봤습니다만, 문의했더니 본단에서 직접 답이 왔어요.”
움찔.
방익지의 시선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본단에선 뭐라고……?”
“천무련 총군사께서 보낸 서찰인데, 금룡각주의 보고대로 협조하겠다고 하더군요. 방 조장에 대한 언급은 없더이다.”
“…….”
“그러니 나처럼 힘없는 상인은 어쩌겠습니까? 그냥 아이고, 그러시군요, 하고 따라야지. 방 조장,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이건 장사일 뿐이에요. 그리고 내가 말씀드렸듯이, 삼만 냥 받는 거로 협의하면 천무련엔 그냥 잡아뗄 거라니까?”
방익지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끝까지 한 손으로 붙들고 있던 공만종의 멱살마저 내려놓았다.
‘알고 있었구나! 본단에선 내 비리를 다 알고 있었고, 지금 금룡각주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야!’
산사태가 내린다고 한들 이렇게 두려울까?
하늘이 무너진다고 한들 이렇게나 불안할까?
방익지는 그 짧은 시간에 온갖 감정들을 느꼈다.
그간 천무련에서 수행했던 모든 임무들.
천무공자 장소호를 위해 했던 일들이 떠오르고, 그가 직접 지도해 주던 무공 수련의 엄격함이 떠오른다.
천무공자가 늘 환하게 웃으니 세상 좋은 호인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방익지는 그 누구보다도 천무공자가 냉정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밝고 명랑한 천무공자?
우습다.
비학문주와 그 아들들의 참상을 못 봤으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련주님께선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모든 것이 까발려진다고 해도 문주희에게 말했듯, 천무련에선 그를 직접 추궁하진 않을 것이다.
약간의 뒷돈?
아무렇지도 않다.
모든 이들이 다 그러고 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변할 것이다. 방익지는 이제 천무공자와 총군사를 향해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의력을 표현하기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주변에서도 아미파한테 뒷돈 받아서 배나 불린다고 수군거릴 테지.
그렇게 인망을 잃어버리는 건 벌을 받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사천에서의 이 생활을 다 읽는다고 생각하면……?’
사천 저택에 함께 사는 여인.
아미파와의 연결고리가 되어 주는 그녀가 떠오른다.
“후우.”
방익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운명이 그를 자꾸 한쪽으로만 밀어붙이는 듯했다.
자존심을 버리고 바닥에 바짝 붙어서 삼만 냥이라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이뤄 낸 것들을 지켜볼 것인가?
발밑이 사라져 버린 듯한 기분에 방익지가 절망에 빠져 있던 것도 잠시.
“흐흐흐, 필마온. 필마온. 그래, 필마온으로 끝낼 수는 없지. 좋아. 제천대성이 되어 주마.”
방익지는 눈을 번뜩였다.
어찌나 섬뜩한 귀기(鬼氣)가 번뜩이는지, 산전수전 다 겪은 공만종도 마른침을 삼킬 만큼 분위기가 무시무시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내가 사천에 와서 이뤄 놓은 것을 천무련이 빼앗아가려 하는군. 그래. 그런 거였어.”
방익지는 공만종에게 손도 대지 않았으나, 공만종은 오히려 방익지가 멱살을 잡고 있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방익지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그에게서 살기가 번뜩였다.
“공 회주, 두말하지 않겠소. 사 할. 원래 약속했던 대로 사만 냥을 준비하시오.”
“방 조장, 아까 내가 말씀드린 걸 잊었습니까? 천무련 총군사께서 금룡각주의 보고대로 처리하겠다고 했어요. 뭘 어쩌려고 고집을 부리십니까?”
“그 말에 정답이 있소. 금룡각주의 보고? 금룡각주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뜨내기 여인 한 명에 불과하오. 부하도 없고 조직도 없지. 그깟 보고? 안 올라가면 그뿐이오.”
“……!”
공만종이 당황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잠시 혼란스러워했지만, 산전수전 다겪은 몸인 만큼 곧바로 방익지의 위험한 의도를 이해한 듯 보였다.
“막을 것이오?”
방익지가 당당하게 묻는 질문에 대답은 없었다.
고민하던 공만종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분위기로 침묵을 지켰다. 아무리 퉁퉁하고 인상 좋은 얼굴로 살갑게 굴더라도 그의 내면은 암흑가의 잔인하고 냉혹한 상인이었다.
방익지가 가면을 벗은 것처럼, 그 또한 가면을 벗으면 내면은 똑같은 인간이다.
“그럴 줄 알았소.”
방익지는 코웃음 치며 옆에 붙어 있던 살수 두 사람을 손으로 거칠게 밀쳤다.
“필마온 따위. 개나 주라지.”
공가상회 밖으로 나가는 방익지에게서는 광기 가득한 웃음소리만 계속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