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15화 (644/686)

21권 9화

제43장 심즉다의(深則多疑) (1)

촉(蜀)의 역사를 간직한 곳.

드넓은 분지와 비옥한 땅을 가졌으나, 검처럼 날카로운 협곡으로 둘러싸여 외부의 침입을 막기 용이한 땅, 사천.

과거 누군가가 사천 땅을 보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전답이 비옥하고 좋으며 백성이 많고 재물이 풍부하다. 만 승의 전차로 떨쳐 일어나면 백만 대군을 일으킬 수 있고, 비옥한 광야가 천 리나 뻗어 있어 축적된 재물이 넉넉하니, 지세 또한 편안하여 가히 천부(天府)라 할 수 있다.

사천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천부의 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할 수 있었던 배경은 사천 땅의 비옥한 곡물을 통해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뿐인가?

삼국시대의 그 유명한 제갈무후는 사천에서 도강언과 각종 수리 시설을 정비했다.

‘사천에서 평년이라 하면 다른 곳의 풍년이오, 사천에서 흉년이라고 해도 다른 곳의 평년’이 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제갈량인 것이다.

사천의 특산물로 비단 제조에 힘쓰도록 만든 사람도 제갈량이고, 그 덕분에 한창 위나라와 촉나라가 전쟁이 격렬했을 때도 위나라에서는 촉에서 생산된 비단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사천에선 무신(武神) 관우를 모신 관제묘보다, 제갈량을 모신 무후사가 더 대접받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다.

역사가 깊은 도시 사천.

커다란 관문을 통과한 조서인은 수많은 인파가 성도로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사람이 정말 많네요.”

“사천은 광동, 하남, 산동만큼이나 큰 곳이니까요. 성도도 사람이 많은 대도시예요.”

“예, 정말 큰 곳 같아요. 사천요리가 그렇게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확실히 드나드는 사람이 많으니까 먹거리도 발전하는가 봅니다.”

“사천요리가 궁금하면 제가 아는 곳으로 한번 가 볼까요? 맵긴 하지만 두부 요리가 일품인 곳이 있어요.”

하북팽가의 여식으로 자라온 팽자연은 늘 풍부한 식견으로 조서인을 이끌어 주곤 했다.

그녀가 소개하는 음식들은 모두 맛있었다. 이번에도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두부 요리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서라, 안 그래도 이제야 붓기가 좀 빠져나가서 사람 같은 얼굴이 되고 있는데 매운 거 먹여서 더 팅팅 붓게 하려고?”

추룡이 껄껄 웃으면서 하는 말에 조서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두부 요리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숙부님?”

“너 어제까지도 발음이 어눌했잖냐. 사천의 마파두부가 얼마나 매운데 그걸 그리 만만히 보는 거야?”

“으음, 매운 것도 맛있을 것 같은데……. 매운 것 먹고 땀을 빼면 붓기가 더 빠지는 것 아닐까요?”

“헛소리하고 있네. 그럼 세상 사람들이 다쳐서 부었을 때 다들 매운 것만 챙겨 먹겠지. 안 그러냐?”

“그렇네요.”

“이놈은 은근히 식탐이 있다니까? 물욕도 있고. 저번에도 식사 다 끝내고 얼음을 끝까지 챙겨서 들고 가려는 걸 보고 내가 기함했었다, 인마.”

“그……. 얼음은 비싸지 않습니까?”

짝!

추룡이 정신 차리라는 뜻으로 등짝을 후려치니 조서인이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윽! 궁상떨지 않겠습니다!”

“네가 누구 제자인지 잊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그, 그렇죠.”

“알면 빨리 그 웅묘(熊猫)처럼 밤탱이가 된 눈이나 빨리 문질러.”

“이게 문지르고는 있는데 완전히 낫지는 않아서…….”

“소주천은 계속 돌리고 있냐? 호흡의 완성은 밥을 먹고 잠을 잘 때도 계속 내공을 순환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했잖으냐.”

“네. 계속 건곤조화심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소주천을 하고 있어요.”

조서인은 스스로에게 뿌듯해하며 자신 있게 말했다.

처음엔 힘들었었다.

제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정해진 혈도로 정확하게 내공을 움직이는 것이 심법이라 생각했는데, 부운화와 추룡은 그게 잘못된 편견이라고 했다.

“대형께선 숨 쉬는 걸 무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셨어. 너 또한 그렇게 내공심법을 평소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끊임없이 돌려야 해.”

“큰 형님은 이미 우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공심법을 숨 쉬듯이 쓰고 계셨으니, 아마 네게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실 거다.”

말은 쉽지만 원래 온 힘을 다해 집중해서 내공을 다루던 습관 때문에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도 조서인이 누군가?

노력이라는 이름의 신(神)을 숭배하고, 하나에 꽂히면 밤낮없이 집중하여 한길만 파는 사람이 그였다.

그 결과 이제는 평소에 숨을 쉴 때마다 흡기와 축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뿌듯한 일이고, 조서인의 무공을 한 차원 올려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서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소주천을 이뤄 내며 내공으로 온몸에 쌓인 피로와 독기를 흩어내고 있었다.

“잘하고 있다. 몸에 파고든 침투경도 다 흡수한 것이냐?”

“예. 이제 큰 숙부님이 사용하신 침투경을 좀 파악했어요.”

“……어떻게 파악했냐? 다루는 법을 안 거야?”

“음양의 기운을 번갈아 가면서 이용하면 조금씩 침투경의 겉면이 녹는 것처럼 부드러워지는데, 그때 건곤조화신공으로 감싸듯이 움켜쥔 다음에 한쪽으로 이끌면 묵묵히 침투경도 따라와요.”

“호오.”

추룡은 감탄했다.

“잘했다. 음양의 조화. 태극의 원리. 그게 결국 무당 무공의 정수지.”

“네.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로는 안 돼. 결과를 내야지. 습관처럼 강해져라.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몸이 강해질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갖춰 놔.”

추룡은 항상 이런 식으로 엄격하게 윽박지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조서인의 성취를 기뻐해 주는 사람이었다.

조서인은 그 투박한 애정 표현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서인 오라버니.”

추룡이 앞장서서 정무관으로 향하는 사이에, 팽자연이 말머리를 옆에 붙이고 조서인에게 슬며시 가까이 다가왔다.

하나로 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타고 있는 말이랑 참으로 잘 어울렸다.

“서인 오라버니. 무슨 생각해요?”

“예? 저야, 마파두부를 못 먹어서 아쉽다는 생각을 하죠.”

팽자연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런 것 말고요. 마파두부가 그렇게 먹고 싶었어요? 그건 멍든 것 좀 나으면 나랑 나중에 같이 먹어요. 이제 얼마 안 남았네요.”

“그렇죠? 제 생각에도 많이 나은 것 같아요.”

조서인은 붓기는 빠졌지만 아직 거뭇하게 멍이 든 눈두덩이를 쑥스러워하면서 문질렀다.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팽자연은 먼 산을 바라보며 슬쩍 물어 왔다.

“서인 오라버니. 문 소저 생각하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잖아요? 뭔가 위험해 보이기도 했고. 백귀총이 쫓는 걸 포기하긴 했을까요? 계속 쫓는다면 어쩌죠?”

“……생각하지 않고 있다면 거짓말이긴 한데. 그렇다고 제가 뭘 할 수 있나 싶어요. 그녀가 알아서 할 거라 생각합니다.”

조서인은 언제나처럼 솔직했다.

그는 담담했고, 차분했다.

오히려 팽자연이 크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생각보다 걱정을 안 하네요?”

“주희는 굉장히 강한 친구였어요.”

첫사랑?

풋내나는 애정?

무산학관 시절에 그런 감정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의 조서인은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는다.

최대의 관심사는 오직 무공이다.

당장 부운화가 전수해 준 침투경과 깨달음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다른 일을 신경을 쓸까.

“저는 학관에서 주희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주희가 남들의 눈치를 보던 꼴찌 소년을 이끌고 여기저기 다녔거든요. 소호를 제외하고 학관에서 저에게 도움을 가장 많이 준 사람을 꼽자면 그건 문주희일 겁니다.”

“문 소저가 학관에서 서인 오라버니를 많이 도와줬군요?”

“예. 결국 주작방이라는 기숙사 방장도 하고, 학관에서 많은 활약을 했어요. 강한 친구예요. 과감하고 머리가 좋아요. 지난번에는 아버지가 잡혀간 일 때문에 무기력해 보였지만……. 사실 돌이켜보면 우리한테 부탁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잖습니까? 그녀는 그때도 과감하게 살길을 찾은 거였어요.”

“그러고 보니 그랬네요.”

“그런 친구가 이번엔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건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믿고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을 믿는다.

조서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문주희가 그를 필요로 한다면 도울 것이다.

하지만 청하지 않는다면 그럴만한 이유도 있을 거라는 게 조서인의 생각이다.

“그 정도로 믿는다는 게 부럽기도 하네요. 그런데 혹시 저 때문에 생각이…….”

“……?”

“으음, 아니에요. 서인 오라버니 말이 맞아요. 필요하다면 도움을 청했겠죠?”

팽자연은 조서인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그 후 정무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

“사천 정무관주 묘광입니다.”

묘광은 건장한 사람이었다.

온몸에 남아 있는 흉터를 보면 거칠게 살아온 것은 분명한데, 그를 뛰어넘는 온화함이 분명히 존재했다.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는데, 그는 어째선지 조서인 일행을 맞이하면서도 안색이 어두웠다.

“조서인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조서인은 절도 있고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낙일창 소협이셨군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장강에서의 활약을 전해 듣고 흠모하였는데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예? 아, 아니에요. 이야기엔 원래 과장이 많은 거죠.”

“백검회의 청계는 수백 명의 무인을 참살한 대살성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자를 단신으로 해가 질 때까지 막겠다고 선언하다니. 그 의기에 감탄하지 않는 사내는 없을 것입니다.”

“크흠! 아닙니다. 너무 저를 높여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조서인은 침투경의 붓기는 이제 많이 빠졌지만 여전히 눈이 웅묘처럼 까맣게 멍이 들어 있는 몰골인지라 상대가 높여 주니 부끄럽고 민망했다.

팽자연과 추룡도 가볍게 묘광과 인사를 나눈 뒤, 조서인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아는 분께서 소호를 돕기 위해 사천 정무관으로 가 보라고 하셔서 찾아왔습니다. 저희가 도울 일이 있는지요?”

“아…….”

사천 정무관주 묘광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신음을 흘렸다.

묘광은 잠시 고민하다 조서인에게 되물었다.

“낙일창께서는 천무공자님과 친분이 깊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맞습니까?”

“네. 소호는 제 인생의 둘도 없는 벗입니다.”

그것만큼은 조서인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묘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에 띄게 안심했다.

“천무련에 소속된 분이 아니라서 말씀드리기가 곤란했습니다만, 그러시다면 사실 저희가 처한 난감한 상황 때문에 부탁할 일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어떤 일입니까?”

묘광은 관주실 근처에 아무도 없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조심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사천 암흑가와 관련된 일입니다. 얼마 전에 한 여인이 찾아왔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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