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16화 (645/686)

21권 10화

제43장 심즉다의(深則多疑) (2)

‘사천 암흑가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고? 설마? 아니겠지?’

묘광은 조서인의 가슴속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불안감을 단박에 해소시켰다.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말이다.

“그녀는 천무련의 사람으로, 금룡각이라는 곳의 각주라고 하였습니다. 혼자 왔고, 동료는 없었지요. 당찬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사천 암흑가를 장악한 자들을 쫓더군요.”

“혹시 그 여인의 이름이, 문주희입니까?”

“맞습니다. 낙일창도 아는 사람이었습니까?”

“예, 알죠. 잘 압니다.”

조서인의 표정이 무거워지는 만큼 그 뒤에 있던 추룡과 팽자연의 얼굴도 진중해졌다.

“금룡각주까지 아는 사이였다니……. 여러분께 말씀드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드는군요.”

“그녀는 위험한 일에 연루되었습니까?”

“…….”

“묘 관주님?”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묘광은 난감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천 암흑가 출신입니다. 비도방이라는 곳의 문주였고, 천무공자를 만나 그분께 거둬져서 지금처럼 주변 사람들한테 무공 사부 소리 들어가며 제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나직한 목소리에 과거에 대한 회한이 묻어 나왔다.

어두운 과거를 지녔지만 소호에게 구원받은 사람이다.

조서인은 동질감을 느꼈다.

“들은 적이 있어요. 소호가 묘 관주를 마음에 들어하여 그 자리에서 결정했다고 하던데요.”

“맞습니다. 그 덕분에 저와 저를 따르는 교관들은 암흑가에서 손을 씻고 밝은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지요. 천무공자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군요. 잘됐네요.”

“아직 떳떳하지는 않습니다. 교관들과 함께 옛날과 완전히 달라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과거라는 건 마치 흉터와 같더군요. 새살이 나면 사라질 것 같지만, 여전히 손끝에 우툴두툴하게 만져집니다.”

묘광은 자신의 팔다리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흉터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저는 사천 암흑가와 완전히 연을 끊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연결된 것들이 있고……. 또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이번 일도 건너건너서 전해 들었습니다.”

묘광은 탁자에 놓인 누런 화선지 위에 붓으로 동그란 원을 하나 그렸다.

“이곳을 사천 성도라고 하고, 이곳을 아미산이라고 하면 여기 중간쯤에 홍등가가 있습니다.”

“아……. 기녀들이 있는 그런 홍등가요?”

“예. 홍등가 바로 옆에 과일 가게가 하나 있는데, 이곳이 사천 암흑가의 자금을 관리하는 공가상회가 있는 곳입니다.”

“과일 가게에서 자금을 관리해요?”

조서인은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아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겉만 과일 가게지, 속은 전혀 딴판인 곳입니다. 비밀 통로로 들어가면 상상도 못했던 커다란 장원이 나오지요. 과일 가게처럼 위장해 놓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구나. 비밀스럽게 숨겨 놨네요.”

묘광은 그 공가상회를 붓끝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미간을 좁혔다.

“공가상회는 사천 암흑가의 온갖 사업에 발을 걸치고 돈을 벌고 있기는 했지만, ‘직접’ 나쁜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는요. 그래서 금룡각주에게도 정보를 얻고 싶으면 가 보라고 했던 건데……. 일이 틀어진 모양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금룡각주는 아마 공가상회가 가지고 있던 장부를 요구했을 것입니다. 공가상회의 장부만 있으면 그녀가 쫓는 사람을 제대로 고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자잘한 협상 내용이야 제가 알 수가 없습니다만 전해 듣기로는 협상은 잘 이루어진 것 같았습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론 그랬는데…….”

묘광이 말을 잇지 못한다.

난감한 얼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문 소저가 쫓는 사람이 천무련 소속인가 보군.”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던 추룡이 툭 던지듯이 말을 내뱉었다.

“문 소저가 누굴 쫓는지를 왜 말하지 않나 싶었는데, 천무련 소속인 모양이야. 천무련의 사람인데도 사천 암흑가에 손을 대고 있는 모양이고, 공가상회도 구워삶은 모양이지? 그래서 마지막에 문 소저한테 장부를 넘기는 과정에서 일이 틀어졌고?”

추룡의 직관력은 날카로운 면모가 있었다.

묘광은 급소를 찔린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는 아미파와 천무련 사이를 중재해 주는 사람이고, 천무련에서 지위도 상당히 높은 사람입니다.”

천무련에서 지위가 높다고 한다면 조장급은 된다는 이야기였다.

조서인이 의심스럽게 물었다.

“조장급은 몇 명 안 된다고 들었는데, 누구예요?”

“방익지라는 사람입니다. 청죽조의 조장이라더군요.”

“청죽조의 조장…….”

방익지라는 이름이 익숙했다.

조서인은 자신이 만나 본 적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이 순간도 정확히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는 모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지금은 정무관만 운영하고 있어서……. 일단 제가 아는 건 어제 공가상회 앞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고, 피풍의를 뒤집어쓴 여인이 격렬한 싸움 끝에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일이 잘못된 것 같아 걱정이 큽니다.”

“잠깐만, 어제라고요? 어제 싸움이 있었어요?”

“예.”

조서인은 탄식했다.

백귀총 살수들한테 쫓기던 걸 구해 준 게 불과 이틀 전이었다.

“그럼 그때 우리랑 헤어지고 똑같이 사천으로 온 거야? 그럼 왜 같이 안 온 거야……? 도대체 왜?”

아무리 중얼거리면서 고민해 봐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문주희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를 멀리하고 이 사건에서 배제했을까?

좌우를 돌아보니 팽자연도 무거운 표정이었다. 한편 추룡은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팔짱을 낀 채 눈썹을 꿈틀거렸다.

“잘 알겠소. 그런데 정무관주. 왜 이 일을 그렇게 신경 쓰는 것이지? 솔직히 문 소저랑 친분도 없었을 것 아닌가? 일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는 입장인 것 같은데?”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이 일에 연관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암흑가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괜한 문제에 연루되어서 위험해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흐음, 그런 것치고는 많이 연루된 것 같소?”

이색적인 옷을 입고,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를 지닌 추룡은 인상을 찌푸리면 대단히 위압적인 모습으로 변한다.

초절정의 경지를 넘은 고수의 존재감.

혼자서 일군을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의 위압감이 묘광을 몰아붙였다.

“으음, 처음엔 방 조장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과거를 완전히 청산할 기회라 여기고 비도방에서 쓰던 장부를 주었습니다.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끝이 아니었군?”

“예. 그다음 날 문 소저가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천무련의 자금을 감찰하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암흑가와 연관된 증거를 찾고 있었고, 이미 장부를 내준 저는 공가상회에 장부가 있다는 정보를 알려 주었습니다. 저만 아는 밀어(密語)도 가르쳐 주었지요. 그런데……. 일이 계속 꼬였습니다.”

묘광은 답답해하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의 고민.

어떤 일에도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만 엮여 버리는 상황에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해는 간다.

그라고 일이 이렇게 꼬이길 바랐을까?

방익지든 문주희든, 어느 쪽과도 척을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일을 이 지경까지 끌고 오고 말았다.

추룡은 혀를 차며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렇군. 무슨 말인지는 알겠소. 그런데 실수했군. 차라리 한쪽 편을 들지 그랬소? 그런 식으로 처신하면 중간에서 이간질한 것과 뭐가 다르지?”

“……어려운 일입니다. 제 위치가 그렇습니다.”

“자기 탓이 아니라고 믿고 싶겠지만, 내가 보기엔 정무관주의 잘못이 없지는 않소. 때론 어느 누구에게도 미움받기 싫은 행동이 모두의 미움을 받게 되는 일도 있지. 이제는 방익지가 잘못되든, 문주희가 잘못되든. 묘 관주, 당신은 어느 쪽이 잘못되어도 관련이 없지는 않소.”

이제 더 들을 이야기는 없었다.

추룡은 바지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카야. 가자. 시간이 없는 듯하니 문 소저부터 찾는 게 좋겠다.”

“예, 그게 옳을 듯합니다.”

조서인이 일어서고, 팽자연도 그 뒤를 따랐다.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묘광에게 추룡은 마지막으로 조언을 남겼다.

“과거를 묻어 두고 새 삶을 사는 건 어려운 일이오. 과거의 잘못들이 집요하게 뒤를 쫓아오거든? 그러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바꿔서 완전히 기억을 지워 버리든가, 아니면 차라리 다시 돌아가서 은원을 모조리 청산하고 오는 게 좋을 거요. 이건 경험자의 말이니. 새겨듣기를 바라겠소.”

과거의 잘못이 뒤를 쫓아오는 것에 대해 추룡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대형 장기린이 풍운객잔에서 살아가게 되기까지 얼마나 파란만장한 일들이 있었던가.

조서인과 추룡, 팽자연이 떠나간다.

그들 모두가 떠나가는 동안, 묘광 정무관주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앉아서 하염없이 창밖만을 내다보았다.

***

“이거, 엄청난 싸움이었나 보네요.”

조서인은 커다란 건물 한 채가 포탄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반파된 데다, 불까지 났는지 대들보가 새카맣게 타 버린 광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불이 꺼진 지는 오래된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주변에 탄내가 가득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카만 재가 버석버석 밟혔다.

“아이고, 하여간 무림인들이 문제야.”

“과일 가게가 망했으니 이제 어쩐대? 저만큼 싸게 파는 가게도 없을 텐데?”

“쉿쉿! 무림인이다! 말조심해요.”

과일 가게의 단골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들이 조서인 일행을 보며 수군거렸다.

그러고 보면 과일 가게를 찾아온 듯 보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고 있었다.

다들 과일 가게가 타 버린 것에 분노하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조서인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주변에선 과일 가게를 좋아했나 봐요. 상당히 안타까워하네요.”

“그러게요. 저 사람들은 공가상회가 암흑가의 상인인 걸 알까요?”

“모를 거예요. 알면 저렇게 좋아하긴 힘들 텐데.”

팽자연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니, 건장하고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 몇 명이 벌떡 일어나 그들을 경계했다.

“여긴 우리 공가상회의 건물이오.”

“누굴 찾아오셨소?”

조서인이 대답하려고 입을 벌리는 그 순간이었다.

“저희는……. 어?”

추룡이 터덜터덜 걸어가서 세 명을 순식간에 때려 눕혔다.

퍼퍽!

“컥!”

“억?”

“흡!”

그야말로 전광석화.

아무리 근육이 잔뜩 붙어 한 덩치 하는 사내들이라도 추룡에게는 그저 앞을 가로막는 짐 덩어리들일 뿐이었다.

사내들은 턱과 옆구리를 얻어맞을 때마다 화살 맞은 토끼처럼 픽픽 쓰러져서 파르르 몸만 떨었다.

추룡은 돌멩이를 치우듯 쓰러진 사내들을 한쪽 구석으로 던져 버린 뒤 건물 안을 뒤적거렸다.

“이딴 놈들이랑 실갱이할 시간 없다. 그냥 밀고 들어가 보자.”

“예, 알겠습니다.”

전투 선언이다.

조서인은 등 뒤에 비스듬히 매고 있던 애창 은자를 꺼내 들었다.

팽자연도 허리에서 협도를 뽑아 손에 쥐었다.

파락호들이 앉아 있던 곳 주변을 조사하길 잠시.

병풍으로 가려 둔 곳을 들추니 비밀 통로가 나왔다.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좁은 문인데, 방향을 살펴보니 가게 옆의 커다란 장원으로 연결된 방향이다.

“제가 먼저 갈게요.”

조서인이 앞서 장원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발밑에서 딸깍― 뭔가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장원 전체에서 경종이 울렸다.

딩딩딩―.

조서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팽자연이 어색하게 웃는다.

추룡이 도끼 눈을 뜨고 노려본다.

공가상회 안에서 온갖 흉악한 무기를 들고 뛰쳐나온 사내들이 순식간에 주변을 포위했다.

“하하…… 제가 수습할게요.”

창을 고쳐잡는 조서인.

그에게서 단단하고 날카로운 기세가 선연하게 솟구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