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 12화
제43장 심즉다의(深則多疑) (4)
“이 무슨……. 당신, 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당연히 보통 분이 아니지. 낙일창 조서인 소협의 숙부가 보통 분인 줄 알았어?”
장난스럽게 씩 웃는 모습이 그렇게나 섬뜩할 수가 없다.
공만종은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키면서 고민하다 물었다.
“지금 당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내 수신 호위는 어느 문파를 가든 특급 살수 대접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두렵지 않습니까? 당신 목에 검날이 겨누어져 있어요.”
“그래? 내가 보기엔 칼날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
날카롭게 잘 갈린 칼날은 추룡의 목에서 고작 손가락 한 마디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무공에 문외한인 공만종이 보기엔 이해하기 어려울 만도 했다.
“그게 무슨?”
“이해가 안 되나? 이 정도 거리면 검날이 내 목을 베기 전에, 나는 네 목을 비틀고 나머지 살수 두 놈의 심장을 찢을 수 있어.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연초에 불 정도는 붙일 수 있겠군.”
“……!”
“못 믿겠으면 시험해 봐도 된다.”
잔인한 말보다 그 안에 담긴 담담한 감정이 더 두려웠다.
격앙된 외침은 거짓이 많다.
하지만 담담한 선언은 진실이 많다.
공만종은 사람을 상대해 온 오랜 경험으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제 호위들이 저렇게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군요. 조 소협과 함께 온 소저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을 보니, 으음, 당신의 무력을 믿는 것 같고요. 아마 당신의 말이 맞겠지요.”
“보는 눈은 있군.”
“살려 주십시오. 저는 아직 죽고 싶지 않습니다.”
양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을 표시하는 공만종은 확실히 걸물은 걸물이었다.
인정하고 굽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잘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다.
“그건 너한테 달렸지. 내가 물었잖아. 문 소저 찾아낼래? 아니면 여기서 죽을래?”
“…….”
“죽고 싶은가 보지?”
추룡이 으름장을 놓자 공만종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원래 폭력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당신은 진심이군요. 저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 같아요.”
“잘 아네. 난 상인을 싫어해. 그래서?”
“다만 한 가지만 분명히 해 두고 싶습니다. 저는 이 일과 관련이 없는 겁니다.”
“하.”
추룡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렸다.
“이 동네 인간들은 왜 하나같이 자기 책임 없다는 말만 반복하는 거냐? 다들 말단 관리들이야? 지들 잘못은 모르고 어떻게든 안 엮이려고만 하네.”
“예? 저 말고 또 누가 그랬습니까? 저야 그렇지만, 다른 사람은 책임이 있을 텐데요?”
“그건 나중에 판단해야지. 이 얍삽한 돼지야. 그래서? 이 일과 책임이 없는 너는 문 소저가 어디 있는지 당장 알아낼 수 있는 거겠지?”
“…….”
“왜 말이 없어?”
“만약 문제가 생기더라도 제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 주시면…….”
꽈악.
추룡이 공만종의 두툼한 턱살을 붙잡고 힘을 줬다.
호두도 으깨 버릴 수 있는 악력으로 턱살을 잡고 비트는데 버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끄어억! 폐광산! 그녀는 지금 폐광산에 있습니다아아!”
돼지처럼 꽥꽥대던 공만종이 빨갛게 변한 자신의 턱살을 잡고 눈물을 찔끔 흘렸다.
추룡이 일어서자 그제야 압도적인 무형기에 짓눌려 있던 살수 두 사람이 몸을 비틀거리며 겨우 중심을 잡았다.
“허억. 허억.”
“크윽…….”
그들은 신음을 흘리면서 주춤 뒤로 물러났다.
싸움은 무슨.
그제야 특급 살수 두 사람이 싸우기도 전에 빈사 상태인 것을 확인한 공만종은 자신이 옳은 선택을 했음을 깨닫고 크게 안도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굽니까? 당신 같은 사람이 무명일 리가 없습니다.”
“무명 소졸이다.”
추룡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면서 물러났다.
“저는 주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했던 건 진짜인 줄 알았어요.”
조서인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추룡은 조서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상인 놈들을 믿지 마라. 돈이 되고 이득이 된다면 부모 자식도 팔아먹을 놈들인데, 거짓말 따위가 대수일까.”
공만종은 피멍이 들어서 시커멓게 변해 가는 턱살을 붙잡고 소리쳤다.
“대인! 저희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우린 그냥, 일이 어떻게 되든 조금 기다리려는 것뿐이라고요! 태풍이 불 때 누가 배를 띄웁니까? 당연히 잠시 몸을 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입만 살아서는.”
추룡은 혀를 차면서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돼지. 명심해. 폐광산에 문 소저가 없으면 그땐 내가 칼 들고 다시 찾아온다.”
그간 인간 같지 않은 수많은 낭인이나 파락호들을 상대해 본 공만종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로 모골이 송연해져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맨손으로 들어온 추룡도 무서웠는데 칼을 들고 찾아온다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무서운 일이었다.
추룡과 조서인, 팽자연이 떠나간 후.
공만종은 자신의 쓸모없는 수신 호위 두 사람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너희도 죽기 싫으면 당장 폐광산에 가서 상황을 살펴! 방 조장한테도 일이 이렇게 됐다고 상황을 알리고! 젠장, 이러다 일이 잘못되면 정말로 명줄 끊기겠다! 문 각주 잘못되면 큰일 나겠다고!”
돌아가는 상황을 관망만 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그가 죽기 싫으면 문주희가 잘못되지 않게 지켜야 할 판국이다.
공만종은 그가 태어난 이래로 가장 급하게 뒤뚱뒤뚱 걸음을 옮겼다.
***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폐광산.
광맥을 캐기 위해 뚫어 놓은 구멍들은 이제는 사천 암흑가를 지탱하는 빈민들의 터전이 되었다.
광부들의 먼지를 씻어 주던 수맥은 빈민들의 젖줄이고, 잔뜩 쌓여 있는 수레와 곡괭이는 그들의 성채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관부든 무림이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치외법권.
명나라 속에 있지만 명나라가 아닌 곳이다.
금룡각주 문주희는 그 안에서 홀로 처절한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이 그녀의 턱까지 차올랐다.
내공이 바닥을 보일 만큼 몇 시진이나 싸웠기에 단검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정무관으로 갔어야 했어.’
공가상회에서 일이 틀어졌을 때 그녀에게는 선택권이 있었다.
백귀총의 살수들이 벌 떼처럼 달려드는 와중에 어디로 몸을 피신할 것인가?
급박한 상황에 그녀는 두 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나는 천무련 소속인 정무관.
다른 하나는 ‘돈’만 있으면 어떤 의뢰든 들어주는 폐광산이다.
그때의 그녀는 어째선지 몰라도 폐광산을 택했다.
비도방주였던 묘광과 교관들에게 몸을 의탁하기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왜 폐광산을 택했던 걸까. 내가…… 천무련에 대한 감정이 있어서일까? 아니, 돈만 주면 해결되니까. 쓸데없는 인간관계는 빼고 깔끔하고 확실한 거래를 원했었는데…….’
그녀에게 상인의 피가 흐른다는 점.
그리고 소호를 믿지 않고 천무련을 싫어하는 마음에 무심코 성급하게 이쪽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폐광산의 주민들은 주희에게서 돈을 받고도 그녀를 숨겨 주기는커녕, 오히려 백귀총의 살수들에게 그녀를 팔아 버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온 살수들에게 순식간에 포위되어 지금 이 지경이 되었다.
“후후후, 방익지. 대단하구나. 그 짧은 시간에 사천에 이만큼이나 기반을 단단하게 다지다니. 내가 멍청했네. 이 정도로 암흑가에서 당신을 도울 줄이야.”
극도의 탈진 상태이기에 오히려 머릿속이 맑았다.
절박한 상황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키득키득 웃는 그녀를 주변의 살수들은 기이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뭐야? 미친 건가? 이봐. 난 소저를 인정해. 솔직히 이만큼 잘 싸울 줄은 몰랐어. 그만한 무공이면 나중에 무림 강호에 이름 좀 떨칠 수도 있었겠구만. 그러게 뭐 한다고 이런 시궁창에 발을 들여놓았대?”
젊은 얼굴, 젊은 목소리였다.
새하얀 얼굴에 한쪽으로 긴 머리를 늘어뜨린 모습은 옷만 잘 갖춰 입으면 화화공자로 보일 만큼 상당한 미남이다.
잔화마도(殘畵魔刀).
백귀총의 특급 살수이며 목표가 여성일 경우 얼굴에 칼로 그림을 그려 놓는다고 해서 잔화라는 말이 붙은 악한이었다.
그는 장중한 무공과 잔혹한 손속과 달리 젊고 잘생긴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소저. 이제 발악하지 말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여. 그러면 우리도 쓸데없이 고통을 주지 않고 단박에 죽여 줄게.”
문주희는 단검을 역수로 잡으면서 비웃었다.
“거짓말하고 있네. 그 신나 보이는 얼굴이라도 어떻게 좀 하지?”
“하핫! 들켰어?”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는 잔화마도.
가늘고 긴 손가락 위로 비틀린 웃음과 생기 없는 기괴한 눈빛이 기묘한 조화를 이룬다.
“솔직히 말하자면 빨리 얼굴에 그림 좀 그리고 싶어. 소저 얼굴은 하얗고 맑아서 그리는 맛이 날 것 같거든?”
“미친놈.”
문주희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
아무리 그녀가 무산학관 출신의 절정 고수라지만, 닳고 닳은 백귀총의 특급 살수를 상대로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천운이 따라 줘서 잔화마도를 이긴다 해도 문제였다.
백귀총의 일급 살수 삼십 명이 주변을 포위한 상태다.
심지어 그들까지 쓰러뜨린다고 한들, 이미 한차례 그녀를 팔아넘긴 폐광산의 빈민들이 순순히 보내 줄지도 의문이었다.
‘여기서 끝이구나. 퇴로를 찾을 길이 없으니 가진바 무공으로 화려하게 싸워나 봐야겠어.’
딸깍―.
문주희는 허리에 차고 있던 철 요대의 비밀 공간을 열었다.
그녀는 붕대와 금창약을 꺼내 양팔과 다리에 입은 상처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어딜 가나 미친놈 소리를 듣는 잔화마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적을 앞에 두고 상처를 치료해? 죽여 달라 이거야?”
“왜? 어차피 천천히 잡을 것 아냐? 급할 것 없는데 치료라도 하면서 싸워야지.”
“이거 순 미친년이네.”
잔화마도가 낄낄대며 웃는 것을 문주희도 마주 웃어 주었다.
“그래. 나 미친년이야.”
툭.
문주희는 금창약 통 안에 숨겨져 있던 산공독을 발로 차서 잔화마도에게 쏘아 보냈다.
따앙!
잔화마도는 톱처럼 삐쭉삐쭉 솟아 있는 칼날을 옆으로 들어서 금창약 통을 막아 냈다.
펑! 하고 터지며 산공독이 그의 몸을 뒤덮는다.
“쿨럭! 이런?”
잔화마도는 특급 살수다.
독술과 암습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는 미리 훈련된 움직임으로 재빨리 열 가지 독에 해독 기능이 있는 해독단을 삼키고, 숨을 조절하면서 독이 뿌려진 전권을 벗어났다.
“쿨럭!”
쒜에에엑――!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문주희가 비조처럼 날아올라 잔화마도를 덮쳤다.
따다다당!
잔화마도가 넓적한 칼날로 몸을 비스듬히 가린 채 방어했고, 문주희는 역수로 거머쥔 단검을 재빠르게 휘둘러 수십 번의 공격을 가했다.
주작비도(朱雀飛刀).
금룡탄(金龍彈).
“하아압!”
문주희의 단도가 한 마리의 용처럼 용틀임을 선보였다.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하단에서 상단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쏟아지는 십연격은 회오리바람처럼 잔화마도의 전신을 난자했다.
후우웅―.
몸을 회전시키면서 상승.
그리고 그 정점에서 포탄처럼 쏘아지는 한 자루의 비도!
쒜에에엑!
까앙!
비스듬히 일직선으로 쏘아진 금룡탄이 잔화마도의 기형도를 휘청 흔들었다.
칼날이 떨리고 공기가 터져 나간다.
문주희의 무공은 강맹했으나, 그 모든 공격을 굳건하게 버텨 내며 기형도를 휘두르는 잔화마도 또한 뛰어난 무인이었다.
채앵!
문주희의 비도를 막아 내고.
서걱!
잔화마도가 기형도를 당겨 베니 문주희의 왼쪽 볼에 비스듬한 자상이 그어졌다.
“큭!”
절체절명의 상황.
문주희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이번엔 각법을 사용해 잔화마도를 걷어찼다.
“컥!”
아직 산공독의 경직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잔화마도가 가슴이 걷어차인 채 비틀비틀 물러선다.
거기서 기세를 올린 것이 실수였다.
한층 더 깊이 들어가며 새로운 비도를 꺼내 금룡탄을 전개하는 문주희.
그녀의 단검이 다시 용틀임을 시작하려는 순간, 잔화마도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왼손을 뻗어 문주희의 소매를 덥석 붙잡았다.
“잡았다.”
씩 웃는 기괴한 웃음이 크게 확대되어 보인다.
촤아악――!
번개처럼 떨어져 내린 기형도가 그녀의 가슴을 비스듬히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