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 14화
제43장 심즉다의(深則多疑) (6)
“사파 놈?”
방익지는 그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며 온갖 욕을 다 들어 본 사람이지만, 사파라는 말에는 역린을 찔린 것처럼 안색이 굳었다.
“난 정정당당한 정파의 종주, 천무련의 조장이다. 감히 누구를 사파라고 부르는 거냐?”
준엄한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했다.
“후후, 후후후.”
문주희는 웃었다.
극도로 탈진하고 목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세상…… 어떤 정파인이, 살수를 고용해서 동료를 죽이지? 넌 사파인이야. 그것도 악질.”
중간중간 쌔액거리는 숨소리가 많이 섞였으나 알아듣기는 어렵지 않았다.
방익지는 눈꼬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충혈된 두 눈에선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끝까지 함부로 입을 놀리는군.”
그는 피에 젖은 땅을 거칠게 철퍽― 밟았다가 냉정을 되찾았다.
살수 서른 명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땅을 질척하게 적셨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땅.
그는 바로 그 땅을 짓밟고 서 있었다.
방익지도 특별하지 않다.
그 역시도 사선(死線)에서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 움직이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더하겠나? 서로 입장은 명확한데. 쓸데없이 흥분할 필요는 없지.”
“후후후후.”
“왜 웃나?”
“그냥, 덤벼. 말을 섞기도 싫으니.”
거친 숨을 내뱉는 상처 입은 맹수.
그게 지금의 문주희다.
목이 찔리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임에도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위압감이 그녀에게 존재했다.
방익지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푸른빛이 감도는 값비싼 청강검을 멋들어지게 뽑았다.
스릉―.
“나를 필마온이라고 불렀던 걸 기억하나?”
문주희는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네 말이 맞다. 난 마구간 문지기였을 뿐이지. 그래서 거기에서 벗어나 보기로 했다. 그러니 나를 원망 마라. 사천을 헤집고 다닌 네 탓이다.”
방익지가 능수능란한 사람 관리로 인정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 역시도 강호 무림의 사람이다.
실력이 없으면 천무련에서 조장 자리를 맡을 수 없다.
방익지가 왼쪽 다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가 강하게 땅을 밟았다.
쿵!
진각을 내디디고 검끝은 중단.
그 자세에서 천천히 오른발로 체중을 옮겨 왼쪽 다리를 쭉 펴며 자세를 낮췄다.
‘서천검문의 서천검!’
문주희는 기수식을 보고 방익지의 검술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왜 모르겠는가.
하남의 십대 무공에 들어가는 무공인데.
게다가 최근에는 천무공자 때문에 유명해진 무공이 서천검이다.
장소호가 하남 무림을 제패하면서 만든 승천무라는 무공이 있으며, 서천검은 바로 그 승천무에 들어간 무공이었다.
‘그래. 천무련의 조장이니 당연히 승천무를 익혔겠지. 강한가? 이 사람은 얼마나 강하지?’
방익지의 강함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늘 동료들과 힘을 합쳐 임무를 수행했을 뿐, 그는 임무에 나설 때 단독으로 강자와 싸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방익지는 홀로 서서 두 손, 두 발로 직접 자신의 강함을 증명했다.
고오오오――.
방익지의 전신에서 강맹한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절도 있는 동작.
완전히 중심이 잡혀 공수 양방에서 치우침이 없는 자세.
바람처럼 뛰쳐나오는 방익지.
그의 청강검이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문주희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쒜에에엑―!
챙!
문주희는 자신의 목에서 손을 떼는 것과 동시에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생각보다 더 강하다!’
머리를 쪼개 오는 청강검을 단검으로 막았으나, 검에 실린 힘이 너무 강해 버텨 낼 수가 없었다.
“큽!”
그녀는 속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삼키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내상은 이미 한계에 도달한 지 오래다.
특급 살수인 잔화마도와 일류 살수 서른 명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
입안은 이미 피범벅이라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인데, 방금 전의 충격으로 거기서 또 한 번 피를 토했다.
퍽!
문주희는 단검으로 검을 막은 자세 그대로 뒤로 튕겨졌고, 나려타곤의 자세로 바닥을 뒹굴어 다시 일어났다.
일어나서 고개를 들자마자 피에 젖은 발바닥이 보였다.
어느새 따라붙은 방익지가 허공으로 차올렸던 발로 그녀를 내리찍고 있었다.
문주희는 급하게 양손을 십자 모양으로 교차시켰다.
뻐어억!
뇌전처럼 위에서 찍어 내리는 각법이 그녀의 전신을 땅바닥에 처박으려 든다.
지이잉―.
팔목이 부러질 것 같고, 골이 울리는 충격을 겨우 버텨 냈다.
눈앞이 흔들리고 내장이 흔들려 토악질이 나온다.
그녀의 발이 질퍽한 땅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파밧!
땅을 박차고 뒤로 몸을 빼내는 순간, 방익지가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뒤집는 모습이 보였다.
파라라락―.
방익지가 입은 옷의 넓은 소맷자락이 날개처럼 흔들렸다. 방익지가 아까 내리친 발이 왼발이었다면, 오른발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가 번개처럼 내리찍었다.
쾅!
피에 젖은 질퍽한 흙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문주희는 얼굴에 튄 흙을 손으로 닦아 냈다. 사람의 머리통만큼이나 움푹 팬 땅을 보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피한 게 천운이었다.
‘천무련 조장의 실력이 이렇게 뛰어났던가? 돈을 많이 벌더니 영약이라도 먹었나?’
그런 의심이 들 만큼 방익지의 무공은 강했다.
방금의 각법은 제대로 맞는다면 뼈는 물론이고 내장까지 위험할 만큼 파괴적이다.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각법. 강뢰각! 저게 맹자방의 무공이구나!’
승천무가 흡수한 하남 십대 무공 중의 또 한 가지.
각법으로는 천하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맹자방의 강뢰각이 그것이다.
쒜에에엑―――!
파바밧!
뻐억!
문주희가 단검을 던지고, 단검을 역수로 잡은 뒤 연격도 날려 보았으나 방익지는 무난히 막아 냈다.
서천검의 날카로움과 강뢰각의 맹렬함이 잘 섞여서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근거리 싸움에 약한 서천검과 근거리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강뢰각의 조화라니. 그 두 무공이 이렇게 잘 어울린다고? 장소호. 무섭긴 무섭구나.’
장소호라는 청년은 문주희에게 있어 싫은 대상이지만, 무인으로서 보자면 그 능력만큼은 이토록 뛰어나다.
역시 천무공자라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다.
‘그래도 어떻게든…… 여기까지 왔어!’
지금 죽어 버리면 잔화마도와 살수들을 이긴 것이 너무나 아깝지 않겠는가.
문주희는 이를 악물고 마음을 다졌다.
그녀 역시도 본가의 지원으로 온갖 영약들을 물처럼 마시며 무공을 단련한 절정 고수가 아니던가.
문주희는 소매에 손을 넣어, 이제는 많지 않은 단검을 다시금 손에 쥐었다.
지이잉―.
단검이 떨린다.
문주희는 탈진한 육신에서 내공을 모조리 끌어모아 단검에 집중시켰다.
주작비도(朱雀飛刀).
금룡탄(金龍彈).
피이잉―.
아래에서 위로.
온몸의 탄력을 살리는 순간 그 정점에서 쏘아 내는 비도.
그녀가 쓸 수 있는 가장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비도술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문주희는 단검을 내던지자마자 이미 그다음에 이어질 공격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은련환, 금룡탄, 그리고 최후의 기술인 일수팔비까지.
방익지가 자신의 무공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아 낼 계획들을 차례차례 머릿속에 정리했다.
그런데 첫 번째 단계부터 이변이 벌어졌다.
방익지는 첫 번째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퍽!
금룡탄 일격에 살갗이 꿰뚫리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부러?’
정작 단검을 던진 문주희조차 왜 방익지가 순순히 어깨에 맞은 건지 의문을 느낀 그 순간.
뻐어억!
방익지가 괴력을 발휘해 문주희의 정면으로 빠르게 파고들었고, 번개처럼 차올린 방익지의 각법이 문주희의 왼쪽 다리를 박살 냈다.
우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몸의 균형이 한쪽으로 급하게 쏠렸다.
그뿐인가?
뻐억!
곧바로 이어진 강뢰각에 그녀의 오른쪽 어깨, 쇄골이 부러졌다.
몸이 비스듬하게 꺾여 버린 것 같았다.
아무리 그녀가 가진바 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있던 철인이라도, 사람인 이상 한계는 있다.
푹―.
서천검의 초식이 그녀의 배를 관통하는 순간 문주희는 운명을 느꼈다.
‘여기까지구나.’
하늘이 내려 준 천의가 함께하지 않으면 단 한 순간의 실수가 승부를 가르는 법이다.
울컥.
목에 입었던 상처에서 피가 다시 흘러내렸다. 이제는 어디서 흐른 피가 가장 많은지 알 수도 없었다.
그녀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들자, 방익지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상처투성이인 여인을 상대로 더 길게 싸울 필요는 없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야.”
자존심이 강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냉철한 전략가라고 해야 할까.
어찌 됐든 방익지의 판단은 옳았다.
그가 과감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여러 가지로 생각해 두었던 문주희의 작전이 일거에 망가져 버렸으니까.
설마 일부러 공격을 맞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막을 거라 가정하고 무공을 쓴 사람과 맞더라도 이기겠다는 사람의 차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으음.”
그래도 문주희에게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일이 있다면 방익지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방익지는 이마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최후의 힘을 실어 던진 금룡탄이 심각한 타격이었는지 방익지는 움찔거리면서 왼손으로 단검을 뽑아내려다가 포기했다.
단검은 손잡이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이 박혀 있었다.
“후후후.”
문주희는 웃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죽기 직전이 되어 오히려 또렷해진 눈빛으로 그녀는 기침을 토해 냈다.
“후회……할 거야. 날 건드린 건…… 실수였어.”
“왜? 련주님의 학관 동기라서 말인가? 친구였다는 말이라도 하려는 거면 우습다. 그만둬라. 네 맘속에 천무련을 위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지 않았나?”
역설적이게도 그런 여인이기에 방익지의 부정을 찾아냈다.
문주희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일섬(一閃).
퍽!
“큭! 끝까지!”
역수로 잡은 단검을 방익지의 눈을 노리고 내리찍었으나, 방익지의 반응은 빨랐다.
그는 맨손으로 단검의 날을 붙잡았다.
손바닥이 찢어져서 피가 나오고 있긴 했지만, 치명상은 막아 냈다.
촤아악―.
“크흑.”
방익지가 보복하듯 청강검을 회수했다.
문주희의 배를 관통하고 있던 청강검이 피부를 길게 찢으면서 빠져나왔다.
문주희는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입술과 눈꺼풀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독하구나. 너 같은 여인은 처음이다.”
방익지는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걸로 끝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없나?”
문주희는 희미하게 웃었다.
“꺼져, 사파 놈……아.”
방익지는 복잡한 표정으로 어깨에 박힌 단검을 매만지다가 물러섰다.
“그래. 꺼져 주지.”
방익지가 등을 돌리고 떠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폐광산의 입구에서 짐승의 포효 같은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채채챙!
무기가 부딪치고 뭔가가 박살 나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런.”
방익지가 안색이 변했다.
그는 서둘러서 폐광산의 입구가 아니라, 안쪽 깊은 굴 쪽으로 달려갔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반각도 안 되는 짧은 시간.
그 시간이 방익지와 문주희의 운명을 교차시켰다.
“이게 무슨!”
비조처럼 날아온 한 사내가 피바다가 되어 있는 공터와, 그 한 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앉은 여인을 보고 경악하였다.
그는 자신의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날 듯이 다가와 문주희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녀의 몸이 버들가지처럼 힘없이 흔들렸다.
“주희야!”
조서인.
깨끗한 인상에 순박한 눈빛을 지닌 청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문주희는 희미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