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 15화
제43장 심즉다의(深則多疑) (7)
“누구야? 누가 이런……! 이런 짓을……!”
조서인은 문주희가 천무련 내부의 방익지라는 사람을 쫓고 있었다는 것밖에 알지 못한다.
그가 원흉인가?
그가 백귀총이라는 살수 문파를 끌어들여 문주희를 이런 몰골로 만들었는가?
황망한 심정으로 주변을 살피니 주변의 상황은 더욱 처참했다.
서른 구가 넘는 시신이 주변에 즐비하다.
땅을 질퍽하게 적시는 피 때문에 코가 쇠 냄새에 절여져서 머릿속이 아찔할 정도다.
시신들의 복장은 다들 비슷했고 하나같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흉악한 무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살수? 주희는 이들과 혼자서 싸운 거야?’
조서인도 추종술을 배웠기에 남은 흔적만으로 어림짐작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이곳에선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문주희는 그녀가 무릎을 꿇고 있는 이 자리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강인한 전사였고, 수적 열세에도 장렬하게 싸워 결국 승리한 여걸이다.
바닥에 선연하게 남아 있는 족적들과 살수들이 모두 ‘비도에 꿰뚫린 상처’로 죽었다는 점이 그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하나의 무기와 하나의 무공으로 다들 당했다.
경탄이 나올 만큼 놀라운 실력이었다.
“이만한 무공을 지녔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대체 천무련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기에!
어째서 문주희라는 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싸워야 한단 말인가?
문주희는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방익지를 잡으려 했던가?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던 조서인의 내면에 거대한 의문과 분노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상처가…….”
조서인은 차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서 엉거주춤한 상태로 손만 어색하게 허공을 휘저었다.
문주희의 몸 상태는 심각했다.
피륙을 가른 상처만 해도 수십 군데인데, 거기에 목을 찔린 상처와 복부를 관통당한 구멍은 대라신선이 온다 해도 살려 내기 힘들 만큼 치명적이었다.
혈도?
짚을 곳이 없다.
혈도를 짚을 만한 곳에는 이미 찢어지고 갈라진 상처들이 가득하다.
애초에 지금의 그녀는 혈도를 짚는 부담을 이겨 낼 만큼의 체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북……선…….”
“뭐라고? 북선?”
“객잔…….”
“북선객잔?”
문주희는 꺼져 가는 등불 같은 눈빛으로 조서인을 바라보았다.
조서인은 말을 잊었다.
온 세상에 그녀만 남은 듯했다.
짙은 어둠 속에 홀로 빛나는 듯한 그녀.
그녀가 손을 든다.
떨리는 손끝.
피에 젖은 손가락이 가을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조서인의 뺨에 툭― 하고 닿았다.
“오지 말지…….”
희미한 웃음은 기뻐하는 것일까. 슬퍼하는 것일까.
문주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그녀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스르륵 옆으로 쓰러지는 문주희를 향해 조서인은 황급히 손을 뻗었다.
끝내 옅어진 맥박이 완전히 멈추는 그 순간을 자신의 두 손으로 직접 느껴야만 했다.
멍하니 뜬 눈.
믿을 수 없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본다. 너무 고요했다. 문주희의 맥박이 느껴지질 않았다.
“조카야.”
“서인 오라버니.”
입구에서 마주쳤던 살수들을 정리하고 쫓아온 두 사람이 조서인을 조심스레 불렀다.
조서인은 무릎을 꿇은 채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가 끌어안은 여인에게서는 더 이상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살인 사건이다! 모두 붙잡아!”
“여기서 나가지 못하게 해라!”
폐광산의 빈민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조서인 일행들을 둘러쌌다.
시커멓게 탄 데다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자들이었다. 제각각 낫이나 대도 같은 칼날이 크고 무서운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암흑가에서 일하는 사람들답게 흉흉한 기운이 가득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둘러싸인 시점에서 실금을 할 만큼 큰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그렇지만 조서인은 물론이고 추룡과 팽자연 두 사람 역시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시선에는 힘이 있다.
추룡과 팽자연이 폐광산의 주민들을 보지 않고 조서인만 바라보고 있으니, 몰려나와 그들을 포위한 자들 역시도 조서인에게 시선을 모았다.
“북선……. 북선객잔.”
잠시 후, 조서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조심스레 문주희의 시신을 내려놓은 그가 다시 은자창을 붙잡고 물었다.
“나는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막을 겁니까?”
차분한 목소리인데 묘한 위압감이 있었다.
폐광산 무리의 두목 격인 중년의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강호인인가? 사천 폐광산은 아무나 드나드는 곳이 아니다! 외지인들끼리 싸움을 했으니 나는 대가를 받아야 하겠……. 헉?”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번쩍! 하고 섬광이 번뜩였다.
서걱!
중년 사내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 ‘무언가’가 단단한 바닥에 꽤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놓았다.
일기관천.
한 사람의 기수가 하늘을 꿰뚫듯, 조서인의 창날이 모두의 만용에 구멍을 뚫었다.
“나는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막을 겁니까?”
아까와 똑같은 어조의 똑같은 질문이었으나 그 안에는 잔뜩 몸을 웅크린 맹수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섬뜩한 위압감이 담겨 있었다.
바닥을 뚫은 구멍은 많은 것을 나타낸다.
그가 지닌 무력.
그가 막는 자를 향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경고.
“열어 드려라.”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민하던 중년 사내가 손짓하자 폐광산의 주민들이 양옆으로 갈라져 길을 열어 주었다.
조서인은 문주희의 시신을 조심스레 양손으로 끌어안은 채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추룡과 팽자연이 묵묵히 뒤를 따른다.
폐광산을 떠나가는 그들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북선객잔은 사천 북부, 아미산 근처에 있는 객잔이었는데 객잔 주인은 문주희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덜덜 떨면서 그녀가 머무르던 방을 안내해 주었다.
대륙에서 손꼽히던 부호의 딸이 머물던 방답지 않게 방 안이 단출했다. 방 안의 물품이라고는 침상과 탁자, 그게 전부다.
문주희의 물건은 작은 봇짐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봇짐 안에 있는 작은 서책에는 문주희의 필체로 보이는 글들이 날짜별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고, 그중 최근의 몇 개가 조서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미파 정허사태와 만남. 공가상회에 대한 정보 제공. 자금 흐름 파악 필요. 방익지와 만남, 사천에 기반 마련 확인, 장원 아미파 소유, 아미파와 연관 있을 가능성 유(有).
―방익지는 위험한 인물이다. 정파의 선을 넘으려는 모습이 포착된다. 나 또한 그렇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하고 있나? 장소호에 대한 복수심인가? 아니면 금룡상회 후계자로서의 증명인가?
백귀총, 독마검의 습격을 받고 살아남음. 조서인, 추룡, 팽자연의 도움을 받음. 독마검과 살수 오인 사망.
―서인이 일행이 도움을 준다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만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다. 어린 시절 연모하던 서인에게는 더욱.
약속 하루 전. 공가상회의 장부를 받겠다 약조함. 배신 가능성 유(有). 은밀히 뒤를 쫓는 자가 있음.
―한계에 달했다. 처음부터 혼자서 할 일은 아니었다. 천무련으로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서인이에게 도움을 청할까? 그래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다.
방익지 고발 위해서는 장부 필요(必要). 공가상회 장부 제공 가능 여부만 확인 후 후퇴.
―필생(必生).
“방익지…….”
반드시 살겠다는 필생, 두 글자가 마음에 와서 박힌다.
어린 시절 연모했던 서인이라는 구절도 눈에 아프게 박혀 든다.
으직―.
조서인이 잡고 있던 탁자가 쪼개질 것처럼 상판이 갈라졌다.
무시무시한 분노를 내재한 조서인이 창을 잡는다.
객잔 주인은 번뜩이는 살기를 눈치채고 도망친 지 오래였다.
추룡이 그런 조서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성급하게 행동하지 마라. 문 소저를 보내 줘야지. 관 짜고, 기본적인 장례 준비는 해 놓고……. 그러고 나서 표국 고용해서 관을 운송하려면 할 일이 많아.”
“방익지가 도망치면 잡기 힘들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놈이 천무련을 버리고 도망친다고? 그럴 놈은 아닌 것 같던데? 그리고 내 생각엔 그놈은 어차피 천무련으로 갈 거야. 일을 수습할 구석은 거기밖에 없거든.”
“아직 사천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글쎄다? 만약 여전히 사천에 남아 있다면 그놈부터 잡아도 아무 말 안 하겠다. 그런 멍청한 놈은 잡아야지.”
추룡의 통찰력은 지금까지 틀린 적이 없었고, 이번에도 바로 맞혔다.
방익지와 그 심복들은 사천 땅을 떠난 지 오래였다.
분노에 찬 조서인이 습격했을 때 방익지의 은신처에 남은 것은 텅 빈 장원을 지키는 여월이란 여인 한 사람뿐이었다.
“우리도 빨리 움직여야 해요. 객잔 주인이 관가에 신고도 한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저도 가문의 도움을 받아야겠어요.”
“나는 공가상회에 한번 가 봐야겠다.”
“칼을 들고 가실 건가요?”
“당연히 칼을 들고 가야지.”
황룡창을 든 추룡의 방문을 받은 공가상회는 그야말로 말 그대로 상회가 뒤집어졌다.
사천 땅 암흑가가 하루가 멀다하고 수난을 당하면서 추룡이라는 한 사람의 행보에 벌벌 떨며 피해 다녔으나 속수무책.
결국 추룡에게 붙잡힌 공만종은 자신의 비밀 장부를 힘없이 넘겨주는 수밖에 없었다.
팽자연은 유능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폐광산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관가의 추격을 가문의 도움을 받아 중단시켰다. 천무련으로 향하는 표행까지 직접 꾸렸다.
팽자연이 없었다면 조서인은 문주희의 관을 실은 표행을 한 달이 넘게 기다려도 제대로 꾸리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심지어 그녀는 방익지 일행이 천무련으로 향하고 있는 경로까지 알아냈다.
“팽가의 일을 돕는 사람들이 방익지를 잡아 두려 했는데 막무가내로 천무련의 권위를 이용해 뚫고 도망쳤대요. 지름길이 있으니 배를 타고 움직이는 게 좋겠어요.”
“잡으러 가죠.”
조서인은 말이 없어졌다.
불필요한 말을 줄이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재된 분노를 다스리며 표행을 따라 움직이길 잠시.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조서인 일행은 천무련이 있는 안휘성 인근의 관도에서 방익지 일행을 마주쳤다.
말을 쉬어 가며 달린 자와, 물살과 바람을 타고 끊임없이 움직인 자의 차이였다.
“방익지!”
조서인의 외침은 호랑이와 같았다.
방익지가 눈이 휘둥그레진 채 깜짝 놀라 말에서 떨어질 뻔하였다.
“무고한 동료를 죽여 놓고 어딜 가느냐!”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무고한 동료를 죽였다니!”
“저 관 안에 누가 있는지 아느냐!”
성큼 내딛는 걸음걸이가 당당했다.
수레에 실린 관을 가리키는 조서인에게는 명분과 정의가 함께 한다.
부당한 일을 당한 친구의 복수.
정도(正道)의 길을 따르는 데 두려울 게 무엇이겠는가.
지나가던 행인들이 다들 무슨 일인가 돌아보았다.
조서인은 당황하는 방익지를 향해 다가서며 창을 들어 올렸다.
“천무련의 금룡각주였던 문주희가 저 안에 있다. 부끄러운 줄을 알아라!”
“그 관 안에 문 각주가 들어 있다고?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누구에게 추궁을 받고 있는 것이오?”
“상산 출신 조서인. 그게 내 이름이다.”
“낙일창……!”
방익지 뿐만이 아니라 지나가던 행인들 모두가 조서인을 알고 있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창이 정면에서 방익지를 겨룬다.
방익지는 극구 부인했다.
“오해가 있는 듯하오! 나는 그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소! 문제가 있다면 천무련으로 찾아와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어떻겠소?”
“그녀에게도 그렇게 말해 주지 그랬나? 천무련에서 차분하게 말해 보자고.”
조서인은 물러서지 않는다.
변명과 묘수만을 반복하는 방익지를 정공법으로 사로잡기 위해 포권을 취했다.
“나 조서인, 방익지 조장에게 비무를 청하겠소. 한 수 겨룬 후, 천무련으로 끌고 가 천무공자의 앞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오.”
당당한 조서인의 외침에 방익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