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 16화
제43장 심즉다의(深則多疑) (8)
방익지는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천무련이 코앞에 있는 곳이라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는 진퇴양난에 빠진 사람처럼 난감해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비무라니! 나는 천무련의 조장이오. 아무 데서나 함부로 비무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오.”
“천무련은 강호의 단체이고, 그 소속이면 강호의 무인인데 비무를 마음껏 할 수 없는 것이오?”
“그렇소.”
“비무는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 것인데 그것마저 거절하는군.”
한번 마음을 먹은 조서인은 어떠한 장애물이 나타나도 머뭇거리는 일이 없다.
올곧은 자세.
정명하고 강인한 눈빛으로 방익지를 쏘아본다.
“무기를 들어라! 맨손의 상대를 쓰러뜨리고 싶지 않다!”
“비무는 하지 않겠다지 않소!”
“비무가 싫다면 친구의 복수라고 하지. 마지막 경고다. 무기를 들어라. 그렇지 않으면 쓰러뜨려 포박하겠다.”
문주희의 흉수가 눈앞에 있는 상황이었다.
조서인이 흥분하여 감정을 불태우니 방익지는 기회를 잡은 것처럼 눈을 빛냈다.
“이 오만함! 그냥 넘길 수는 없겠군. 귀하가 어떤 인물이든 천무련을 이리 업신여길 수는 없는 일이오! 모든 일에는 그에 맞는 절차가 있는 법! 천무련의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무사할 것 같은가!”
방익지는 확실히 기회를 놓치지 않는 집념이 있는 사내였다.
실낱같은 틈을 놓치지 않고 일을 키워서 그럴듯한 말을 내뱉는다.
실제로 주변의 구경꾼 중에는 저래도 되는 거냐며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안휘.
남궁세가의 용인 아래 천무련의 터전이 되어 가는 땅이었다.
천무련에 호의적인 사람이 많기에 무작정 조서인의 편을 드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낙일창이 이리도 무례했던가!”
“그 자그마한 명성이 뭐라고 이리 오만한가! 이 땅에서 천무련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다니! 도대체 뭘 믿고 자기가 뭐라도 된다는 듯이 구는 것인가!”
방익지의 부하인 감광과 장복이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나서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두 사람 모두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고 있었다. 언제든 발검해서 조서인을 벨 기회를 노리는 분위기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감광과 장복의 주변에는 천무련 청죽조 소속의 무인들 십여 명이 동행하고 있었다.
만약 싸움이 나면 모두가 합류할 것이다.
조서인에게도 추룡과 팽자연이 포함된 일행이 있지만 그들은 나서지 않는다.
조서인이 홀로 나서겠다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내가 책임진다.’
결국은 다수 대 일인.
홀로 여럿의 앞에 나선 구도가 되었다.
“내가 뭐라도 되냐고?”
주변의 분위기가 변했음에도 조서인은 물러서지 않는다.
오히려 한 걸음을 더 내디디며 기세를 높였다.
“나는 그저 한 사람의 무인이다! 저 관속에 누워 있는 여인의 친구이며, 동료의 등에 칼을 휘두른 부패한 비겁자에 대해 분노하는 한 사람의 사내다!”
어떠한 명성도 필요 없다.
강호의 무림인.
불의를 외치는 데 이름값이 왜 필요하겠는가.
“천무련 사람에겐 의롭지 못하다고 쓴소리도 하지 못하는가! 천무련이 다 뭐라고! 어차피 모두가 똑같은 무림인이지 않은가!”
소속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중요한 건 모두가 똑같은 한 사람의 무인이라는 사실뿐.
모두에게 큰 울림을 준 조서인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간다.
감광과 장복이 방익지의 앞을 지키듯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방익지는 큰 소리로 외쳤다.
“거짓말로 명분을 꾸며내다니! 천무련을 적대시하는 악적인가! 나는 순순히 당하지 않을 것이다! 천무련의 사내들은 외압에 굴하지 않는다!”
불의와 협을 논하는 조서인의 말에 자꾸만 천무련을 들먹이는 방익지는 분명히 졸렬했다.
하지만 그 졸렬하고 뻔뻔한 말에 청죽조 사내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결연한 소속감에 휩싸여 그를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방 조장님을 지켜라!”
“악적이 천무련을 공격한다!”
방익지는 천무련 본단에 사람을 한 명 보내고, 본인은 뒤로 살짝 물러나 향방을 지켜보았다.
조서인이 움직인다.
완연히 그를 적대하는 천무련 청죽조 무인들이 보인다.
조서인은 답답함을 느꼈다.
어찌 이리 독단적인가.
어째서 이쪽의 말은 전혀 이해하려 하질 않는가?
“무(武)로 증명하겠다.”
후우웅―.
은자창의 유려한 몸체가 고고한 한 마리의 학처럼 고개를 쳐들고 날개를 펼쳤다.
터어엉!
쒜엑!
일연적룡무 제일식.
공간을 접어 버리는 듯한 일섬(一閃)에 가장 앞에 서 있던 청죽조 조원 한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박살 났다.
쩌어엉!
산산조각 난 검편이 사방으로 튀어나간다.
일제히 달려들려 하던 청죽조 조원들이 움찔하며 동작을 멈췄다.
“끄윽!”
졸지에 검을 잃은 사내가 고통스럽게 자신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손목이 부자연스럽게 꺾여 있었다.
검이 박살 날 만큼의 충격을 몸이 이기지 못한 탓이다.
“합격진을 펼쳐라!”
“절반으로 나뉘어서 좌우를 공략해!”
방익지 휘하의 청죽조원들은 실전 경험도 풍부해서 능숙한 대응을 보였다.
순식간에 주변을 포위하는 모습.
서로 간의 간격을 완벽하게 조절하는 모습에서 평소의 훈련량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조서인은 움직이는 태풍과 같다.
쩌어어엉!
일대 다수의 구도는 조서인에게 무척이나 익숙하다.
장강 백경채에서 싸울 때도 그랬고, 그 이후에 만난 마적 떼도 그랬다.
온갖 싸움에서도 정당한 일대일의 싸움보다는 다수 대 한 사람의 싸움이 더 많았다.
성큼성큼 진각을 밟으며 통짜 쇠로 만들어진 은자창을 휘두르니, 그 앞에서 청죽조가 가진 얇디얇은 협봉검으로는 도저히 버텨 내질 못했다.
일 타로 무기를 부수고, 이 타로는 어깨나 갈비뼈 둘 중 하나를 부러뜨리는 식이다.
후우우웅――!
창이 휘둘러지는 파공음이 무시무시했다.
청죽조 무인들이 피를 뿜는다.
깨지고 박살 난 병장기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창술이라고 하면 찌르는 섬격이 핵심이 될 테지만, 조서인이 사용하는 은자창은 창날부터 창대까지 모두 통짜 쇠로 이어져 있었다.
당연히 휘둘러서 만들어 내는 타격도 웬만한 봉술보다 더 막강했다.
조가창법.
운해참파(雲海斬波).
번쩍이는 은빛이 파도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공기가 갈라진다.
새벽녘 바다에 낀 안개가 쓸려나가듯, 조서인이 휘두른 창격의 기파가 주변 청죽조원들을 일거에 휩쓸어 버렸다.
푸화악!
뻐억!
쩌저정!
어깨와 허벅지를 얻어맞은 조원들이 피를 토하면서 튕겨져 나간다.
파라라락――.
조서인이 입은 무복의 소맷자락이 바람을 맞아 미친 듯이 떨렸다.
그는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
둔중하게.
무게감을 갖고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는데, 주변에 미치는 여파가 태풍과도 같다.
쿠구구구구―.
마치 거대한 맹수가 땅을 긁어 놓은 것처럼, 주변의 무인들은 물론이고 땅바닥에도 깊은 상흔이 남았다.
‘막는 사람도 있어. 과연, 공가상회와는 다르구나.’
공가상회의 파락호와 낭인들을 상대로도 운해참파를 사용했었지만, 그때는 아무도 막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는 있다.
몇 명은 검이 부러지거나 휘었을지언정 여전히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두 사람.
방익지의 심복인 감광과 장복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기는 했으나, 분명 자신에게 날아온 운해참파의 창기(槍氣)를 막아 냈다.
“창의 거리를 조심해라! 장병진(長兵陳)이다! 포위망을 넓혀!”
“창기의 위력이 강하다. 두셋씩 붙어서 함께 막아!”
감광과 장복은 시의적절한 지시까지 내렸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대응방식도 다르단 말인가?’
조서인은 문주희의 복수를 하기 위해 흥분한 상태였으나, 그럼에도불구하고 상당히 인상적인 느낌을 받았다.
마음 같아선 좀 더 살펴보고 싶지만 그럴 여유는 없다.
방익지가 조서인의 무공을 보고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었다.
“그렇겐 안 되지.”
고오오오―――.
조서인의 몸에서 건곤조화신공이 장중하게 흘러넘쳤다.
검선일맥.
유장한 내력이 조서인의 온몸을 덮어씌웠다.
막아서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조서인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방익지를 향해 일직선.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그의 창끝이 태풍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터어엉!
조서인이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감광과 장복.
청죽조의 조장급에 달하는 무인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동작으로 검을 뻗어 왔다.
승천무에 포함된 하남 십대 무공.
서천검문의 서천검이다.
후우웅―.
재빠른 검격에는 날카로운 검기가 둘러져 있었으나, 조서인의 창격을 둘이서도 막아 내지 못한 채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 나갔다.
쩌어엉!
일격에 한 명씩이다.
운이 좋은 자는 검을 잃으면서 손목만 부러졌고, 운이 없는 자는 갈비뼈와 손발이 부러진 채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다.
조서인의 무공은 단호하고 명확했다.
―막아서지 마라.
순식간에 모든 청죽조의 조원들이 휩쓸려 나갔다.
감광과 장복마저 무릎을 꿇으니 이제 서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큭.”
방익지는 충혈된 눈으로 조서인과 그 반대쪽 퇴로를 번갈아 응시했다.
고민될 것이다.
이곳은 안휘.
천무련의 영역이었다.
도망치는 모습은 그의 체면을 깎아내린다.
결국 방익지 역시도 이를 악물면서 검을 뽑았다.
“이 모든 일은 내 잘못이 아니다! 천무련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아라!”
“헛소리.”
조서인이 드물게 격한 어조로 말했다.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당신이 아닌가?”
“캬아악!”
방익지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방익지의 몸이 빨라졌다.
승천무.
하남 십대 무공을 총집합하여 절공으로 만든 것은 천무공자 장소호.
그 장소호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무공을 가르친 사람이 천무련의 조장인 방익지와 이남성이다.
방익지의 성취는 팔 성이 넘어 있었다.
대성을 하려면 초절정의 경지를 뚫어야 할 만큼 승천무의 수준은 높았다.
그중에서도 발군의 성취를 보이는 사람이 방익지다.
꽈아앙!
강뢰각으로 땅을 내리찍고 복룡권 이십팔 수가 조서인의 움직임을 옥죈다.
번개같이 빈틈을 파고드는 서천검의 날카로움은 조서인조차 방심한다면 부상을 각오해야 할 만큼 쾌속했다.
“그 검으로 문주희를 찌른 건가.”
피차 절정을 넘어선 무인.
조서인은 그의 서천검과 강뢰각을 보자 폐광산에 남아 있던 무공의 흔적들과 일치함을 알아챘다.
‘이자다. 이자가 흉수가 맞아.’
문주희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폐부에 검을 찔러 넣은 자는 분명 방익지다.
스릉―.
조서인의 손끝이 은자창 창날을 쓰다듬자 섬뜩한 예기가 흘러나왔다.
주인의 마음을 아는 병기.
그야말로 신병(神兵)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터어엉!
다시 한 번 내딛는 진각.
발끝에서 시작된 나선의 회전력이 허리와 어깨, 팔꿈치와 손목을 지나 은자창 한 자루에 강력한 힘을 전달했다.
피아아아앙!
은자창이 회전하는 속도는 너무 빨라서 일반 사람이 손을 댔다가는 손 가죽이 뜯겨나갈 정도다.
조서인의 안광이 폭사했다.
일연적룡무 제일식.
공간을 접어 버리는 섬격이 방익지의 목을 향해 쏘아진다.
쩌어어엉!
대경한 방익지가 검을 세워 막으려 했으나 대성하지도 못한 팔 성의 서천검 따위는 창날에 닿자마자 힘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튕겨 나갔다.
방익지의 눈이 절망에 젖는다.
목을 꿰뚫기 직전.
조서인은 창끝의 방향을 바꿔 방익지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퍼어어억!
“쿠헉!”
살수를 자제했으나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파괴력을 지녔다.
방익지의 승모근을 찢으며 구멍을 뻥 뚫어 버렸다. 방익지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죽인다면, 이 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겠지.”
조서인이 사람을 죽일 수 없어서 참은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분노.
여기서 쉽게 죽일 수는 없다는 복수심이 조서인을 자제시켰다.
“죽지 마라. 당신의 행동은 당신이 좋아하는 천무련에 가서 내가 직접 명명백백히 밝히겠다.”
휘돌려 창의 손잡이로 명치를 찌르자 방익지가 신음하며 무너진다.
힘겹게 들어 올린 방익지의 얼굴에서 절망과 증오가 뒤섞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