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23화 (652/686)

21권 17화

제43장 심즉다의(深則多疑) (9)

“큰 실수를 하는군. 천무련의 조장을 향해 이런 만행이 용납될 것 같은가?”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방익지는 성난 들개 같았다.

상처투성이에 못 먹어서 앙상하게 말랐어도, 알량한 자존심 하나로 사람만 보면 짖어 대는 그런 들개 말이다.

어깨가 뚫려서 피가 나고 있음에도 방익지는 기가 죽지 않으니 그 의지만큼은 인정해 줄 만했다.

“직위가 어떻든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네깟놈이 감히 뭐라고 나를 징죄한단 말…… 큭!”

사납게 짖어 대던 방익지가 신음을 흘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조서인이 창대로 그의 허벅지를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큭, 이런 무례한……!”

“무례?”

서늘한 시선으로 방익지를 노려보는 조서인은 지옥을 지키는 사천왕처럼 완고해 보였다.

“당신을 살려 놓고 있는 게 내게는 무례한 일이야.”

“오만방자하군. 이 일을 책임질 수 있을 것 같나?”

“글쎄.”

“그저 심증만으로 이런 일을 벌이다니. 천무공자와 천무련의 사람들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조서인은 방익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죄를 지어 놓고도 이토록 당당한 이유가 무엇일까?

조서인의 상식으로는 방익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서로 다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은 그만하는 게 어떨까? 서천검으로 주희를 찔렀고, 강뢰각으로 땅을 뭉갰었지. 폐광산에 흔적이 선명했어.”

“하하핫! 우습군. 그저 짐작일 뿐이지 않은가? 천무련으로 가면 무엇을 증명할 것인가? 그래. 하나는 증명할 수 있겠군. 청죽조의 사람들을 알량한 창술로 두들겨 패고 괴롭혔다고 말이다.”

“아니. 난 당신이 사천에서 벌인 일들을 낱낱이 다 밝힐 거야.”

방익지는 비웃었다.

“없었던 일을 밝힐 수 있을까?”

“그럼 순순히 따라오면 되겠네. 지켜보면 알 테니까.”

“충고 하나 하지. 천무련에 가는 건 자살행위다.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게 어떤가? 고작 여인 하나 때문에 인생을 걸 필요가 있나?”

뻐억!

조서인은 그의 다리를 한 번 더 후려친 뒤 창날을 방익지의 목 위에 올렸다.

날카로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으나 방익지는 겁을 먹지 않는다.

당당하게 눈을 치켜뜨고 있는 모습을 보면 당장 죽여 달라고 일부러 화를 돋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조서인은 부글부글 끓는 화를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그 고작 한 여인이 나를 어린 시절부터 도와주었어.”

“크윽, 후우, 후우, 어리석군.”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을 거야. 그건 너무 쉬운 일이거든.”

마지막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았다. 조서인은 다리뼈에 금이 가서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는 방익지를 일으켜 세워 손과 몸을 밧줄로 꼼꼼하게 묶었다.

손끝 하나도 닿기 싫은 인간이었지만, 꾹 참고 들쳐메서 짐짝처럼 수레에 실었다.

***

천무련.

천무공자 장소호가 정도의 무림을 되살리겠다는 기치(旗幟)를 세워 설립한 명실상부한 강호 무림 최대의 연합체였다.

소림, 무당, 청성과 같은 역사가 깊은 거대 문파들이 모두 소속되어 있는 연합이기도 했고, 천무련에 소속되면 천무공자가 직접 여러 가지 무공을 지도해 주어서 훨씬 강해질 수 있다는 걸로 유명하기도 했다.

“낙일창……!”

이미 방익지에 대한 이야기는 다 전해진 듯했다.

천무련의 입구에서부터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푸른빛 장삼을 입은 천무련의 무인들이 서슬 퍼런 시선으로 조서인과 그 뒤에 따라오는 표행을 노려보았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음에도 고요했다.

중압감을 지닌 시선들이 조서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따라붙는다.

천무련의 무인들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을 것처럼 준비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여러분은 상관 없습니다.”

조서인은 팽가의 인맥으로 데려온 표사와 쟁자수들에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들 입장에선 관을 옮겨 달라는 의뢰를 맡아 주었을 뿐인데 갑자기 천무련의 적이 되어 버리니 당황스러울 것이다.

허둥거리는 그들을 진정시킨 뒤, 조서인은 천무련의 현판을 향해 먼저 포권을 취했다.

“상산 출신 조서인이라고 합니다. 천무련주를 뵙고 싶습니다. 그리고 금룡각주의 시신을…… 아니, 금룡각주와 함께 왔습니다.”

문지기들은 당황스러워했다.

“금룡각주?”

“금룡각주가 누구야?”

“왜, 있잖아. 련주님이랑 같은 무산학관 출신. 금룡상회의 여식.”

“아아, 그 소저?”

“상인 출신이라 자금을 살핀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래. 그러다 무슨 임무 수행한다고 사천에 갔다고 들었는데…….”

사람들은 잠시 문주희에 대해 수군거렸으나, 사실 대부분이 문주희를 직접 만난 적조차 없었다.

당연히 큰 관심은 없었고 그냥 새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일이 꼬였구나 하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문제는 방익지다.

천무련 소속 무인들 중 절반이상이 방익지와 친분이 있었다.

천무련의 개국공신.

오랫동안 사람 좋은 얼굴로 후배들을 이끌어 온 방익지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에게 밥 한 번 얻어먹은 적이 없는 사람은 천무련 사람이 아니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다.

“저 관짝 옆에 있는 사람 방 조장님 아냐?”

“아아! 맞아. 그렇네.”

방익지는 비참한 몰골로 죄인처럼 밧줄에 꽁꽁 묶인 채 수레에 짐짝처럼 실려 있었다.

천무련 무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죄를 지었으면 벌을 내려도 우리가 내려야지!”

천무련의 무인들이 누구던가?

천무공자라는 걸출한 영웅 한 사람만 믿고 련에 들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신념은 종교와 같았으며, 그 안에 소속된 사람들끼리는 가족 같은 유대감도 있었다.

“이런 젠장!”

“빨리 풀어 드려!”

수레로 다가가려는 무인들을 조서인이 막았다.

“방익지는 죄를 지은 죄인이고, 저런 몰골이 될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천무련주에게 말하겠습니다.”

“믿을 수 없소!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한들 벌을 내려도 우리가 내리는 게 맞소!”

“그래서 만났을 때 안 죽이고 여기까지 데려온 겁니다.”

평소에 순하던 조서인도 문주희의 죽음으로 크게 분노한 상태였다.

당연히 가는 말이 곱지 않았고, 받아들이는 천무련 무인들의 반응 역시도 극적이었다.

“뭐라고? 감히!”

“천무련 사람의 죽음을 논하다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결국 검을 뽑는다.

사방에서 검광이 번뜩였다.

“싸움이 벌어진 바람에 청죽조 무인들 십여 명이 부상을 입어 움직이지도 못한다더군.”

“천무련의 적이다. 낙일창은 천무련의 적이야!”

“방 조장을 당장 구해!”

당장이라도 싸울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 시작되었다.

천무련의 무인들이 검을 들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 우리는 이만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이제 표물은 다 도착한 것 같은데…….”

문주희의 관을 운송해 준 표사와 쟁자수들은 팽자연의 허가를 받자마자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다.

괜히 이 자리에 있다가 천하에서 가장 큰 무림 단체에게 찍히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들을 탓할 수야 없는 일이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천무련은 이야기를 듣지 않는 곳이군.”

조서인이 결국 창을 들었다.

천무련이 싸움을 건다면 끝까지 싸우리라.

후우욱―.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백이 강렬한 기파가 되어 뿜어져 나갔다.

다가오던 청죽조 무인들이 당황하며 조서인을 견제한다.

시끄럽던 노성이 사라졌다.

깊은 정적 속에서 조서인이 발하는 기파만이 큰 울림을 만들어냈다.

“무인은 말로 싸우지 않소. 나는 저 푸른 하늘 아래 당당하니, 불만이 있는 자는 앞으로 나오시오.”

다들 불만은 가득했으나 섣불리 나서는 자는 없다.

마침내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 조서인이다.

그는 강하다.

검선일맥.

붉은 악귀 장기린의 무공을 이은 그는 당당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럴 만한 자격도 갖추고 있었다.

“낙일창……! 명불허전이군.”

분개하여 달려들기 직전이었던 자들조차 단숨에 침묵시키는 힘에 모두가 감탄하였다.

성큼성큼.

조서인이 나아가는 만큼 천무련의 무인들은 물러난다.

마침내 현판이 있는 지점까지 왔다.

천무련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현문을 넘으려는 순간이다.

상징적으로 많은 의미가 있는 일이 벌어지려는 바로 그때.

현문을 넘기 전, 조서인이 걸음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인아.”

한 사람의 존재감이 마치 태양과도 같다.

뒷짐을 진 채 걸어 나오는 모습은 마치 천품을 타고난 고고한 귀족을 보는 듯했다.

기품 있는 자세.

새하얀 비단에 황금색 실로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옷.

길고 윤기가 흐르는 흑발을 한데 묶어 뒤로 늘어뜨리고 이마에는 입은 옷과 똑같이 황금 수실로 장식된 새하얀 영웅건을 썼다.

“련주님을 뵙습니다!”

천무련의 무인들이 황급히 검을 다시 집어넣고 양옆으로 갈라져 길을 열어 줬다.

지금 이곳 천무련에서 장소호는 말 그대로 왕이나 다름없다.

방금 전까지 조서인을 적대시하고 있었음에도 이제는 조서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늘에서 내린 무(武)를 지녔기에 천무공자다.

감히 그 앞에서 검을 들고 있는 것이 송구하다는 듯, 모든 무인들이 허리를 굽혔다.

“소호야.”

조서인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화려한 외양.

환하게 빛나는 태양처럼 순수한 웃음.

모든 것이 무산학관에서의 소호와 똑같다.

그의 절친한 친우이자 은인.

그런데 왜 서럽고 억울한 마음만 드는 것일까?

“주희가……. 주희가 죽었어. 금룡각이라고 했지? 천무련의 자금을 감찰하겠다고 조사하다가 당했어. 저 사람이 한 짓이야. 방익지. 저 사람.”

조서인이 손가락으로 수레에 묶여 있는 방익지를 가리켰다.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련주님! 저는 억울합니다!”

방익지가 묶인 채로 목소리를 높여 항변했다.

상처를 입고 초췌해졌음에도 목소리에 집요한 독기가 가득했다.

“저는 그 일과 관계가 없습니다!”

“주희의 시신을 보면 알 거야. 서천검에 몸이 찔렸어. 폐광산의 싸움터에는 강뢰각을 사용한 흔적도 가득했고. 저 사람이야. 문주희는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방익지의 부정을 밝히겠다면서 쫓아다니고 있었으니 그럴 만한 이유도 있어!”

조서인은 한풀이를 하듯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주희는 방익지가 아미파와 내통을 한 증거도 갖고 있었어. 문제가 큰 사람이지. 주희가 진실을 알게 되니 두려워서 죽인 걸 거야. 주희가…… 주희가 죽은 것을 보니 참을 수가 없어. 이건 옳지 않아. 저자가 아무리 천무련의 중요한 사람이라도 죗값을 치러야 해.”

가장 친한 친구가 눈앞에 있기에 내심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분노로 가득 찬 마음.

지금 당장이라도 방익지를 죽이고 싶은 살기를 가감 없이 뿜어냈다.

“서인. 서인아.”

소호는 탄식하듯 말했다.

무슨 생각일까.

골똘히 생각하던 소호가 한 발자국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에게 손짓을 했다. 키가 크고 팔과 손가락이 긴 젊은 사내였다.

“비학조장.”

“예, 련주님. 하명하십시오.”

“수레를 받아서 살펴 주세요. 주희…… 금룡각주가 정말로 서천검에 당했는지 보고 싶습니다. 방 조장의 상태가 어떤지도 알고 싶어요.”

“존명!”

비학문 출신의 청년 고수.

양명기가 자신의 비학조원들을 데리고 수레를 끌고 왔다.

추룡과 팽자연은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방익지를 수레에서 끌어내 밧줄을 풀어 주자 그는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양명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방 조장, 다리뼈가 부러지셨습니까?”

“부러진 건 아니지만……. 으음, 금이 간 것 같군.”

“그렇군요.”

비학조 조원 두 사람이 방익지를 부축했다.

“어깨의 관통상이 치명적일 뿐, 나머지는 타박상입니다.”

“그래요?”

“금룡각주의 사인은 관을 열어봐야 할 것 같은데…….”

“아! 아뇨.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냥 두세요. 금룡각주의 시신입니다. 금룡각주의 아버님이…… 확인할 때까지는 열지 말도록 하죠.”

문주희는 젊은 여인이었다.

아무리 규범에서 자유로운 무림의 여협이라지만, 생각해 보니 시신을 마음대로 살피는 것 또한 부적절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조서인의 미간이 꿈틀 움직였다.

맞는 말이다.

소호는 틀리지 않았다.

문주희의 시신에도 조심스럽게 예를 갖춰 대하는 것이 옳은 일이기는 했다.

“서인아. 너는 내 가장 친한 친구야.”

“……내게도 그래.”

“그런데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는 법이야. 나는 너의 친구이지만, 천무련이라는 곳을 이끄는 련주이기도 해. 그리고 련은, 련에 소속된 무인을 보호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설마?’

조서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럴 리가 없다.

그가 아는 소호라면.

이런 곳에서 불의의 편을 들어줄 리가 없다.

“방익지 조장에 대한 일은 철저히 조사하여 적절한 벌을 내릴 거야.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고쳐야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네가 방익지 조장을 상처입히고, 청죽조의 조원들을 쓰러뜨린 일 또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공명정대한 목소리.

맑은 눈빛으로 외치는 이야기는 얼핏 옳지만 조서인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았다.

“천무련의 이름은 그리 가볍지 않아. 나는 네가 순순히 천무련에 구금되었으면 좋겠다.”

약간의 미안함이 담긴 눈빛이 조서인에게 향한다.

으득―.

조서인은 은자창이 부서질 것처럼 강하게 움켜쥐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