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24화 (653/686)

21권 18화

제43장 심즉다의(深則多疑) (10)

“소호야…….”

조서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주희가 죽었어. 우리가 무산학관에서 같이 친하게 지냈던. 학관의 일을 할 때면 주작방이든 백호방이든 상관없이 항상 우리 편을 들어주던 주희가 죽었다고. 항상 나를 위해 나서 주던 그 주희가…… 이제는 없단 말이야.”

“그래. 믿어지지 않네.”

“정말? 그래?”

“…….”

“난 이해가 되질 않아. 심지어 주희는 금룡각주의 일을 하다가 죽었어.”

조서인은 금룡상회가 왜 망했는지. 그 금룡상회의 무남독녀 후계자였던 문주희가 왜 천무련에 들어가서 일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문주희를 홀로 금룡각주 업무를 하라고 내버려 두었다?

동행 한 명 없이 문주희 혼자 사천 땅으로 보내고?

솔직히 말하자면 조서인은 소호가 이 일에 왜 미리 손을 쓰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큰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지금은 직접적이고 악랄한 방익지라는 원수가 있기에 그 문제를 꺼내고 있지 않을 뿐.

“으음.”

소호는 난감하다는 듯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서인아. 나도 안타까워. 그러니 이제부터 이 일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 볼 거야.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말이야.”

“조사해 볼 것도 없어. 내가 흔적을 다 조사했으니까. 분명히 저 사람이 죽였어. 방익지가 주희를 죽였다고!”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는 게 아니고, 저 사람이 죽였어. 소호야.”

소호가 알던 조서인은 이렇게 강한 어조로 말하지 않았다.

항상 조심스럽고 자신감이 없으면서 우물쭈물하는 성격의 소년이 조서인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모습.

강직한 모습으로 소호를 똑바로 마주하는 조서인에게서는 분노와 울분이 가득했다.

“너…….”

소호는 변해 버린 조서인의 모습에 솔직히 놀랐다.

소호는 조서인이 지금 느끼는 ‘소중한 사람을 잃은 기분’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가만히 과거를 더듬듯 먼 곳을 바라보았다. 조서인을 향한 소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문주희가 서인이 네게는 그렇게 소중했구나.”

“맞아. 내게는 소중한 친구였어. 잃고 나서야 이렇게 아픔이 느껴지네.”

조서인은 가슴을 태우는 격정을 억누르듯 손바닥으로 가슴을 때렸다.

“소호야. 난 내 친구에 대한 복수를 할 거야. 방익지를 이곳까지 데려온 건 치료를 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야. 세상 사람 모두에게 저자가 지은 죄를 알리기 위해서지. 그리고 이제 모든 걸 알렸으니. 내가 할 일은 하나뿐이야.”

조서인이 당당한 모습으로 주변을 돌아본다.

당연한 일이지만 천무련 사람들 중 조서인에게 호의 섞인 시선을 보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가재는 게 편이고, 팔은 원래 안으로 굽는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괜찮다.

지금의 조서인은 무산학관을 갓 졸업했을 때 당시의 그 자신감 없고 어리숙했던 상산 조가창의 계승자가 아니다.

검선일맥, 붉은 악귀 장기린의 제자다.

멋지고 닮고 싶은 숙부님들도 있었다.

그간 동행하면서 배운 추룡의 가르침들을 떠올린다.

도박장에 단신으로 들어가고, 마적 떼와 드잡이를 했던 조서인이다.

이 정도로는 주눅이 들 리가 있겠는가?

“거기서 비켜, 소호야. 난 방익지를 단죄하겠어.”

은자창으로 소호의 등 뒤에 있는 방익지를 겨누자 주변의 분위기는 더욱 급격히 나빠졌다.

조서인은 방익지를 겨누었다.

하지만 그 중간에는 소호가 있으니 결국은 소호를 겨눈 셈이다.

“감히!”

“지금 감히 누구에게 무기를 겨누는가!”

차라리 방익지를 눈앞에서 칼로 찔렀어도 이보다는 반응이 약했을 것이다.

천무련의 신(神)이 누구인지는 동네 꼬마 아이들까지도 모두 안다.

하늘이 내린 무예를 지닌 청년.

무에서 유를 창조한 자.

미래에 반드시 무림 강호의 절대자 중 한 명이 될 거라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 천무공자가 바로 천무련의 신이다.

그 신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불손했다.

천무련 무인들은 자신들의 신이 모욕을 당한듯한 지독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소호가 모두의 분위기를 읽고 탄식했다.

“서인아. 이 친구야.”

소호와 서인.

두 사람 모두 젊은 나이다.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기엔 두 사람은 너무 혈기왕성했고, 친했던 만큼 서로에 대한 섭섭함이 컸다.

“대체 왜 이 자리에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소호의 씁쓸한 중얼거림에 조서인이 곧바로 맞받아쳤다.

“내가 할 말이야. 이건 옳지 않은 일이야.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저자를 지키는 거야?”

“경위야 어찌되었든 지금 이 순간 방 조장은 내가 지켜야 할 천무련의 인물이니까. 천무련주가 천무련의 사람들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그들을 지킬까!”

소호의 분위기가 서서히 차가워진다.

말을 하면 할수록 소호의 가슴에서도 온갖 감정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친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한계가 있는 법이야. 조서인. 마지막 경고야. 무기를 내려놓고 나와 함께 련으로 들어가자.”

“주희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 나는 구금되라고?”

“그래.”

나를 믿고 그냥 잡혀라.

소호의 시선은 강렬했으나 조서인은 고개를 저었다.

“거절할게.”

“그래. 그럼 나도 더 이상 권하지 않을게.”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다.

젊고 강인한 청년들.

은빛 창을 두 손으로 움켜쥔 조서인과 맨손의 장소호가 서로를 바라본다.

후우우웅―――.

바람이 불어나가는 듯한 기파의 충돌.

두 사람의 격돌은, 어떠한 경고도 없이 일순간에 거대한 폭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쩌어어어엉!

은자창 은빛 섬광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섬격을 찔러 왔다.

소호는 맨손으로 합장하듯 창날을 붙잡았는데 신기하게도 쇳덩이끼리 부딪치는 것 같은 굉음이 터졌다.

콰득!

소호의 양발이 땅을 한 치나 파고 들었다.

흙먼지가 훅― 하고 피어올랐다.

창날 너머에서 느껴지는 내공의 힘이 천 근 바위처럼 묵직했다.

소호가 극한까지 단련한 천근추로 중심을 잡지 않았더라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뒤로 튕겨졌을 것이다.

“강해졌구나.”

소호는 환하게 웃었다.

울컥 치밀었던 분노와 섭섭함이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조서인은 분명히 또래에선 적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강한 친구였다.

원래도 강했지만 소호의 아버지, 장기린의 무공을 이어 이제는 더 강해졌다.

이 얼마나 재밌는 일인가.

“내가 너, 재능 있다고 말했었잖아?”

무산학관 때부터 늘 말해 오던 사실이다.

소호의 눈은 옳았다.

조서인은 절대로 둔재가 아니다.

소호와는 다른 형태의 ‘천재’일 뿐.

키이이잉――.

소호가 합장 상태에서 양 손바닥을 비스듬히 비틀었다.

팽팽하게 유지되던 힘의 균형이 소호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깨졌다.

합장한 손바닥 사이에 붙잡혀 있던 창날이 화살처럼 튀어나왔다.

파앗!

창날이 울린다.

벌 떼처럼 웅웅 떨리는 창날이 소호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파라라락!

소호는 발밑이 한 치 정도 허공에 떠 있는 사람처럼, 마치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손바닥을 마주친 상태 그대로.

높은 곳에서 밧줄을 붙잡고 미끄러져 내려오듯, 소호는 창대를 타고 미끄러져 조서인에게로 순식간에 다가갔다.

터엉!

조서인이 진각을 밟는다.

쿠웅―!

땅이 흔들리고 흙먼지가 파도가 치듯 멀리 밀려 나갔다.

무시무시한 기파.

날카로운 시선으로 소호를 노려보는 조서인이, 이미 쏘아져 나간 창을 회수하지 않은 채 손바닥으로 자신의 창대를 두드렸다.

파아아앙!

손바닥 장저로 창대를 후려치자 은자창의 투로가 하방으로 비틀렸다.

터엉!

창 손잡이가 바닥으로 처박혔다가 다시 튕겨 올라왔다.

지이이이잉!

소호는 창대에서 손을 뗐고, 조서인은 살아 있는 뱀처럼 흔들리는 창대를 빠르게 잡아챘다.

수평으로 휘둘러 짧게 끊어치는 타격에 공기가 터져 나갔다.

파아앙!

소호는 철판교의 수법으로 상체를 뒤로 젖혔다. 은자창의 손잡이가 코끝을 스쳐 갔다.

팡!

소호는 철판교 자세에서 쌍장으로 땅을 후려치고, 그 반탄력으로 몸을 튕겼다.

파라락!

옷자락이 떨린다.

마치 등에 날개라도 달려 있는 것처럼 뛰어오른 소호가 허공에서 오른발을 머리 위로 높이 차올린다.

등각?

아니다.

허공을 걷어차듯 다리를 쭉 뻗었던 소호는 발뒤꿈치를 세워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번쩍!

하늘에서 땅으로.

마치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모습.

그렇기에 강뢰(降雷)다.

하남 제일의 각법.

강뢰각 일 초식이 소호의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번쩍!

“……!”

스쳤을 뿐이다.

그런데도 조서인의 상의가 마치 횃불로 지진 것처럼 앞섶이 쭉― 찢어진 채 연기를 피워 올렸다.

조서인은 그 파괴력에 아연실색하여 황급히 몸을 뒤로 튕겼다.

건곤조화신공.

내공의 힘을 팔 성이나 끌어 올려 양발로 강하게 땅을 박찼다.

꾸우우웅!

흙덩어리들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땅에 남은 상흔에 손바닥을 갖다 대면 한 뼘은 충분히 들어갈 만큼 깊은 구덩이가 생겼다.

심지어 너비로 따지면 한 사람이 그대로 누워도 충분할 만큼 크다.

‘이게 진짜 강뢰각이구나…….! 방익지랑은 비교가 안 돼.’

뿌옇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가라앉자 드러난 소호의 모습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번개와 함께 내려온 신장(神將)과도 같다.

거대한 무형기가 그림자처럼 주변을 잠식한다.

환한 웃음.

태양처럼 해사한 얼굴 뒤로 이렇게 무서운 무력이 함께하고 있었다.

‘이래서 요즘 마왕이라 불리는 거구나.’

천무공자든 마왕이든 사람들이 인외(人外)의 존재로 경외하는 점에 있어서는 똑같다.

소호는 그 정도의 존재.

그리고.

조서인이 전력을 다해 막아야 할 사람이다.

“핫!”

강뢰각으로 조서인을 쓰러뜨리지 못한 소호는 기합을 한 번 내지르는 것만으로 흙먼지를 날려 버렸다.

터엉! 쒜에에엑!

땅을 박차고 화살처럼 날아온 소호가 이번엔 초근접의 거리에서 권장을 날리기 시작했다.

몸을 낮춘 한 마리의 용과 같은 권법.

하체와 상체를 살짝 구부정하게 굽힌 채 빈틈을 노리는 무공.

소림의 사권(蛇拳)과 비슷하지만 좀 더 웅장한 움직임이었다.

복룡권(伏龍拳) 이십팔수.

소호의 권장이 조서인의 정면을 화려하게 장악했다.

권장의 다양한 형태들이 온갖 묘리들을 뽐냈다.

충, 반, 탄, 착.

때리고 잡아채고 쳐 내고 제압하는 온갖 묘리들이 한 초식에 다 뒤섞여 그물망처럼 조서인을 옥죄었다.

따다다다당!

은자창이 태풍에 휘말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잡아채고 후려치는 권장각에 제대로 된 투로를 찾을 수가 없다.

“후우우.”

조서인은 마음을 다스렸다.

급하면 지는 법이다.

차분하게 생로를 찾아야 했다. 수십 번의 권장이 한 호흡에 터져 나오는데 그걸 일일이 다 막아 내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다.

병기를 든 자는 필연적으로 맨손의 권장법보다 느릴 수밖에 없었다.

들고 있는 병기가 철로 된 장창이라면 더욱 그렇다.

따다다다당!

점을 선으로 만들고, 선을 면으로 만들어 정면을 막았다.

후우웅―.

반월형의 투로로 복룡권을 차단한 뒤, 조서인은 뒤로 훌쩍 물러났다.

쿵!

내딛는 진각.

허리가 찌릿찌릿해질 정도의 반탄력이 조서인의 온몸을 휘감았다.

일연적룡무 제일 식.

키이이잉―――.

공간을 접는 듯한 섬격.

조서인의 발끝에서 손끝까지 연결된 나선의 회전력이 창끝에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냈다.

장기린의 무공.

섬광처럼 뿜어져 나간 찌르기 일 타가 소호의 가슴을 꿰뚫는다.

촤아아악―.

잠시 그의 가슴을 꿰뚫는 것 같은 모습은 착각이었다.

절묘한 몸놀림을 붙잡지 못한 채 소호의 옷자락만 스쳤을 뿐.

“아버지의 무공으론 안 되지.”

일연적룡무 제일식을 흘려보낸 소호가 마치 계란을 하나 쥔 것처럼 가볍게 손을 거머쥐는 모습이 보였다.

“통배권.”

속이 비어 있는 공권.

허리에 잠시 붙였던 주먹을, 허공에서 털어내듯 가볍고 절도 있게 허공에서 내지른다.

터어엉!

조서인의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천 근의 힘.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은 압력이 조서인을 파도처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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