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 20화
제43장 심즉다의(深則多疑) (12)
“죽였어야 했는데……. 죽이진 못했네.”
조서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복수……. 실패했으니……. 무승부…….”
쿵.
조서인은 은자창을 지팡이 삼아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숨을 몰아쉬던 그의 호흡이 점점 가늘어진다. 두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조서인은 그대로 눈을 감고 기절해 버렸다.
“너…….”
소호는 탄식하며 이마를 짚었다.
“서인아. 지금 선 채로 기절한 거야? 이게 말이 돼?”
너무 어이가 없어서 소호는 헛웃음을 흘렸다.
천랑도를 맞고도 피 한 방울 안 흘릴 때부터 알아봤다. 도대체 온몸에 힘을 얼마나 준 건가?
선 채로 정신을 잃다니.
옛날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지 않냔 말이다.
“서인아. 이 친구야. 이게 어떻게 무승부냐? 이러면 내가 뭐가 되니?”
지금 이 순간도 방익지의 비명 소리가 시끄러웠다.
꿱꿱거리는 절규만 들으면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정도였다.
청죽조 조장의 오른팔.
물론 문주희의 목숨값이라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할 테지만, 그래도 무인의 목숨과도 같은 오른팔을 빼앗았으니 조서인은 나름의 복수는 이룬 셈이다.
소호는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조서인.
대단한 친구이지 않은가.
천무련에서 천무련주와 싸우면서 끝까지 본인이 원하는 바를 쟁취해 내다니.
“넌 참…….”
소호는 뻣뻣하게 굳어 있는 조서인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끝까지 날 힘들게 하는구나. 이렇게 멋있게 기절하면 어떻게 하냐?”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 사건을 지켜보는 사람 중에 조서인을 흠모하는 사람도 생기리라.
“비학조장.”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소호가 손을 들어 올리자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비학조장 양명기가 다가와 그의 명을 기다렸다.
“천무련에 심 의원 있죠? 데려가서 치료해 주세요. 원칙상은 옥에 가둬야 하지만……. 다쳤으니 치료가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만 못하게 해 줘요.”
“존명.”
양명기는 비학문 출신의 무인 두 사람과 함께 조서인을 데려가기 위해 다가왔다.
사태를 지켜보던 추룡과 팽자연은 바로 그때 움직였다.
“잠깐.”
사람들은 서역의 말을 타고 이국적인 복색을 한 사내를 기이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추룡이 입은 기묘한 배자는 주황색과 적색 사이의 오묘한 색감에 양팔의 맨살을 다 드러내는 기묘한 모습이었다.
그 상태로 목에는 오색찬란한 반짝거리는 천까지 두르고 있으니 눈에 띄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키는 보통.
야생 동물처럼 잘 단련되어 탄력 있어 보이는 육신을 지녔다.
오른손에 커다란 언월도를 가볍게 움켜쥔 그는 나른한 얼굴로 양명기에게 경고했다.
“거기, 서인이에게 손대지 마라.”
“누구십니까?”
“내 정체는 거기에 있는 잘나신 천무련주님께 물어보고.”
추룡의 말투에는 거리낌이라는 게 없다.
양명기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천무련의 무인들 모두가 그들의 신이 모욕을 당하는 듯한 불쾌감을 추룡에게서도 느꼈다.
“감히……!”
“괜찮아요, 비학조장.”
소호가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오랜만에 보네요. 추룡 삼촌.”
“그래. 오랜만이다, 소호야.”
주변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특히 비학조장 양명기는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허둥거렸다.
천무련주의 친척이었다니.
감히 무례를 범한 게 아닌가 걱정이 된 것이다.
“조카야. 인사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냐? 아까도 나 봤잖아?”
“그땐 보셨다시피 상황이 너무 안 좋았으니까요. 그리고 듣자 하니 삼촌도 강호에 오자마자 서인이만 챙기던데요, 뭘. 천무련에 한 번 놀러 오시지 그랬어요?”
“정보가 빠르구만. 역시 다 듣고 있었어.”
“미미가 같이 있으니까요. 아 참, 주해도 안에 있는데 다 같이 불러올까요?”
“됐다. 지금 가족 모임 할 시간은 없어.”
“왜요? 서인이는 치료받아야 하니까 시간도 많은데?”
소호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추룡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마음이 진심이라는 게 너의 장점이자 단점이지.”
“저는 항상 진심이에요.”
“상처 입은 친구의 가슴을 갈라놓는 일도 진심인 것처럼?”
“……무공을 겨루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일이죠.”
“오래 끌면 죽을지도 모르겠다.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고. 그러니 어서 의원에게 데려가야겠어.”
“련 안에 심 의원이 있어요. 실력 좋은 사람이에요.”
“천무련은 안 되지.”
추룡은 단호했다.
소호가 지금까지 살면서 추룡에게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싸늘한 말투였다.
“천무련의 방익지라는 놈한테 친구를 잃었고, 가장 친한 친구는 그 복수를 방해했다. 게다가 싸우다가 가슴까지 갈라놓았어. 그런데도 천무련에서 치료를 받아야겠냐?”
“……서인이는 방 조장과 천무련 무인들에게 큰 상처를 입혔어요.”
“그건 그쪽의 사정이고.”
“서인이가 섭섭해할까요? 삼촌이 좀 중재해 주세요.”
“조카야.”
추룡은 피식 웃으면서 언월도, 황룡창을 한 바퀴 휘돌렸다.
후웅―.
가볍게 한 바퀴 돌렸을 뿐인데 지켜보던 무인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무인이 다른 사람의 무공을 예측하는 법은 간단하다.
서 있는 모습, 호흡하는 주기, 그리고 무기를 어떻게 잡고 다루는지만 봐도 어느 정도 상대방의 경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추룡의 동작은 간단했는데도 심오한 무학의 묘리가 가득 담겨 있었다.
창끝이 바람에 흩날리는 깃털처럼 가볍다.
농사일을 평생 해 온 사람은 낫질을 하는 손놀림에 도(道)가 깃드는 법.
추룡의 그 가벼운 움직임에 사람의 목이 날아갈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광경이다.
“저 사람 강하다……!”
“절정?”
“아니, 초절정은 분명히 넘었어.”
청죽조의 무인들이 추룡의 창끝에 자신이 서 있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하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스으윽―.
추룡은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 흔히 뿜어내는 무형기 같은 것을 보여 주지 않았다.
마치 무형기라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처럼 고요한데도, 가만히 그를 보고 있노라면 그 안에 잔뜩 몸을 웅크린 맹수가 한 마리 있는 것처럼 섬뜩한 존재감이 있었다.
추룡은 천무련주, 장소호에게 독설을 날렸다.
“언제부터 그렇게 말이 많아졌어? 무인은 힘으로 말하는 법 아니었나?”
“제가 말이 많았어요?”
“보통 많은 게 아냐. 수다쟁이인 줄 알았다.”
천무련주를 향해 수다쟁이라니.
아무도 감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발언이다.
“집단을 이끄는 것은 힘들지. 네 아버지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제 상황을 이해해 주시는 거예요?”
“아니. 그래도 이해는 안 돼. 서 있는 위치가 너무 달라서 그렇겠지.”
추룡의 코끝을 가로로 가로지른 상처가 사납게 꿈틀거렸다.
“내가 서인이를 데려간다. 불만이 있으면 무공으로 말해라.”
추룡은 거침이 없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여전히 뻣뻣하게 서서 기절해 있는 조서인을 보면서 혀를 찼다.
“어이구, 이 못난 놈아. 고생했다, 고생했어.”
추룡이 안타까움과 연민을 담아 조서인의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쒜에에에엑―――!
“……!”
기절해 있던 조서인이 자신의 몸에 무언가가 닿자마자 본능적으로 창을 뻗어낸 것이다.
“헛!”
“으헉!”
지켜보던 무인들이 제풀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특히 조서인을 만지려 했던 비학조장 양명기가 보기에는 남의 일 같지 않은 사건이다.
아까 소호가 시켰을 때 그가 조서인을 만졌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조서인이 날리는 창격의 대상자는 양명기가 되지 않았겠냐는 말이다.
터어엉―.
일연적룡무 제일 식.
공간을 접어 버리는 듯한 섬격.
섬광이 번뜩이는 듯한 찌르기가 터져 나왔고, 그걸 추룡은 맨손으로 턱― 하니 붙잡았다.
까드득―.
은자창의 은색 창대가 웅웅 떨렸다.
날카로운 창날이 왼쪽 눈 옆에 거의 닿다시피 했으나 추룡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굴의 흉터를 한 번 꿈틀거렸을 뿐, 오히려 안타까운 표정으로 조서인을 바라봤다.
“그래. 너는 싸움이 끝난 줄을 모르겠지.”
추룡이 부드럽게 창을 당기면서 조서인의 어깨를 손으로 밀자 관운장처럼 뻣뻣했던 조서인의 몸에서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푸확―.
긴장이 풀리니 천랑도에 베였던 상처에서도 경직이 풀렸다.
까맣게 죽어 있던 피가 봇물이 넘치듯 주르륵 흘러내렸다.
“쿨럭.”
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조서인이 무의식중에 피를 토했다.
추룡이 조서인의 창을 옆으로 휙 하니 집어 던지자 한 발짝 뒤에 있던 팽자연이 황급히 받아 들었다.
그는 재빨리 조서인을 부축하면서 그의 가슴에 혈도를 짚어 출혈을 최대한 막았다.
“나는 간다. 건강히 지내라. 오늘 일…… 서인이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추룡은 조서인을 양팔로 안아 든 채 성큼성큼 멀어졌다.
소호는 일별도 하지 않는다.
소호와 서인.
둘 중 누가 진짜 조카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련주님?”
양명기는 조심스레 소호의 의중을 물었다.
어찌해야 하는가?
이미 련주라는 직위의 신(神)께서는 조서인을 데려다가 심 의원에게 치료를 받게 하고, 옥에 가두듯 지키라고 명령을 내린 상황이다.
그런데 그걸 어기게 만드는 자는 신의 혈족이다.
양명기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떠난다는데 제가 뭘 어쩌겠어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일단 련의 사람들로 포위를 해서 잡아 두면…….”
“포위?”
소호는 정말 재밌는 말을 들은 것처럼 웃었다.
“안 돼요. 우리 무상도 데려오면 모를까.”
무상 패원강.
소호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천무련의 유일한 초절정 고수였다.
양명기는 잔뜩 긴장한 채 되물었다.
“저분께서 그 정도입니까? 혹시 련주님과 겨루시면 어찌 되시는지……?”
소호는 점점 멀어지는 추룡과 조서인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추룡의 무공은 추묵환의 무공을 전수받은 삼지창 창술을 기반으로 한다.
해왕십삼기.
장강수로맹 총표파자의 독문무공은 소호도 다 알고 있다.
변수라면 추룡이 서역에 가서 익혀 온 새로운 무공과 깨달음인데.
조금 전의 모습만으로도 추룡의 경지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이기겠죠.”
“역시!”
“하지만 목숨을 걸어야 해요. 일반 무인들로만 포위를 한다면……. 우리 천무련의 절반 이상 사상자가 나지 않을까요?”
“그 정도입니까?”
소호는 무공에 있어서는 빈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양명기는 충격을 받은 듯 눈빛이 흔들렸다.
“이미 서인이는 상처를 입었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할 가치가 있을까 의문이네요.”
소호는 미련을 버린 채 추룡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제대로 치료해 줘요! 서인이 죽으면 안 돼요!”
아직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추룡은 분명히 소호의 말을 들었을 테지만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상황은 모두 마무리되었다.
돌아서는 소호가 중얼거렸다.
“수다쟁이라니.”
추룡에게 들은 말 중 가장 충격적인 건 그것이다.
소호는 오묘하고 복잡한 심경으로 다시 천무련 안으로 되돌아갔다.
***
조서인은 꿈을 꿨다.
열두어 살 무렵.
무산학관에 입관하면서 보았던 환하게 빛나는 소년의 모습이다.
명문가 출신의 재인들도 줄줄이 탈락하던 어려운 시험을 웃는 얼굴로 통과하던 소년.
심지어 상상 이상의 최고 성적을 거뒀다면서 교관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모습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장소호.
하늘이 내린 재능.
그리고 자신의 하나뿐인 진정한 친구.
“흐읍!”
조서인은 물속에서 누군가가 머리채를 잡고 끌어 올린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뜨자 비릿하고 퀴퀴한 묘한 약재 냄새가 났다.
뿌옇게 흐렸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져 갔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박공 형태로 천장을 지탱하고 있는 대들보와 뼈대 사이사이를 흙으로 메꾼 허름한 지붕이다.
뭔가가 툭툭 끊어지는 소리가 나서 내려다보았더니, 추룡이 조서인의 가슴 상처를 바늘로 꿰매고 있었다.
“으억?”
깜짝 놀란 조서인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