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27화 (656/686)

21권 21화

제43장 심즉다의(深則多疑) (13)

“깼냐?”

추룡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하며 조서인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가만히 있어.”

“숙부님, 상황이 어찌된…….”

“조용히 해. 자꾸 말하면 바늘이 엉뚱한 데를 찌를지도 모른다.”

천하에 명성을 떨치는 청년 고수라도 바늘에 살이 찔리면 아픈 건 아픈 거다.

관운장처럼 살을 찢는 와중에 바둑을 두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내가 기절했었구나.’

조서인은 머릿속이 어지러운 가운데 소호와의 싸움을 떠올려 보았다.

“쿨럭.”

싸움을 떠올리자마자 반사적으로 기침이 튀어나온다.

격렬했던 싸움의 끝에 가슴이 베인 고통과 극심한 내상을 입었던 기억도 떠오른 것이다.

‘내공. 내상이 먼저야. 진기를 확인하자.’

조서인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건곤조화신공의 신기를 확인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몸 안의 기(氣)를 먼저 확인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 제대로 배웠구나. 잘했다.”

추룡이 툭 던지듯 내뱉은 칭찬이 조서인에게 위로가 되었다.

패배의 아픔.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힘들었을 테지. 아직 제대로 습득하지도 못한 심창의 무학까지 사용하고. 보나 마나 온몸이 저릿저릿해서 말을 듣지 않지?”

“아…….”

“대답하지 마라. 어차피 답은 다 알고 있으니까.”

툭. 툭.

추룡은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듯한 능숙한 손놀림으로 조서인의 피부를 꿰매 주었다.

시신이 즐비한 전장을 집으로 삼고 별이 떠 있는 하늘을 지붕 삼아 살아오던 격렬한 인생의 증거였다.

“너 어떻게 기절해 있었는지는 알고 있냐? 선 채로 기절했어. 얼마나 온몸에 힘을 빡! 주고 있었는지 여기 이 큰 상처가 피도 안 나더라.”

지이익―.

스슥― 툭.

추룡은 명주 실에 매듭을 매고 이빨을 써서 끊어 냈다.

“서서 기절할 때까지 싸우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 고생했다, 서인아.”

“감사…….”

“잠깐 아플 거다.”

크게 감격하여 조서인이 감사 인사를 하려는 순간, 추룡은 기다렸다는 듯이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조서인의 가슴 혈도 다섯 개를 순서대로 타혈했다.

“컥?”

막혔던 혈이 뚫리는 순간 온갖 고통과 탁기(濁氣)가 함께 몸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조서인이 눈을 부릅떴다.

고통이 한계를 넘어서니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으으으.”

조서인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악물어. 혀 깨물지 마. 천천히 느리게 숨을 쉬어. 그렇지. 크게 들이쉬고, 크게 내쉬어.”

추룡은 조서인의 호흡이 안정되도록 가슴을 천천히 두드려 주면서 어딘가를 향해 소리쳤다.

“간 선생! 지금이야! 어서 나와 봐!”

“알았소, 알았소. 지금 가오.”

나무토막이 된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는 조서인은 보지 못했지만, 건장한 체격에 콧수염을 갈래로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의 사내가 가까이에 있었다.

최근 들어 신의(神醫) 소리를 듣기 시작한 간옹이라는 사내였다.

옛날에는 항주 뒷골목에서 빈자들을 향해 의술을 베풀었고, 지금은 강호 무림 이곳저곳을 떠돌며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길 즐기는 자였다.

“하여간 내 업이지, 업이야. 매번 이런 산송장만 만나고.”

간옹은 툴툴거리면서도 조서인의 상세를 진지하게 살폈다.

손목의 맥을 짚고, 혈 자리를 확인한 뒤, 눈동자의 움직임과 호흡의 길이, 안색과 혈색까지 확인했다.

“나 이런 상처를 분명히 본 적이 있는데.”

평생 상처만 보고 살아온 간옹의 안목은 날카로웠다.

그는 뜨거운 물로 적신 천으로 조서인의 환부 근처를 닦아 내면서 말했다.

“쇄골 끝 중부혈로부터 반대편 허리의 경문혈까지. 일도에 상체의 온갖 요혈을 한꺼번에 파괴하는 초식……인데, 시전자가 무공을 다 못 익혔나? 아닌가? 일부러 요혈만 피한 건가? 어쨌든 즉사시킬 수도 있었는데 한 치 차이로 피해 갔네?”

옆에서 추룡이 고개를 저었다.

“무공이 어설픈 놈은 아니었소. 죽일 생각은 없었으니 일부러 요혈은 피해서 벤 거겠지.”

“근데 또 그런 것치고는 너무 중상이야. 웬만한 상처로는 제압할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네? 이 친구가 강한가?”

“강하지.”

“그나마 자네가 곁에서 처치를 했으니 다행이군. 이거 조치가 늦었으면 죽었어.”

“……사실 싸운 곳 근처에 의원이 준비되어 있기는 했소.”

“뭐? 거봐! 아니, 근데 그러면 거기서 치료받지 왜 여기까지 날 찾아와서 산송장을 만들어서 들이밀어? 이봐, 추 동생, 환자 죽일 일 있어? 왜 살릴 수 있는 가까운 길을 놔두고 멀리 돌아왔냐고?”

천하의 추룡을 향해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추룡이 얼굴에 흉터가 가득해서 인상이 사나운 건 둘째치고, 성질머리가 있어서 상대가 그리 화를 내면 가만히 참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옹은 그 모든 것의 예외였다.

“알았어. 진정하시오. 간 선생.”

추룡은 화를 내는 간옹을 달래듯 손을 내저었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어. 거기서 치료받는 건 그때 상황상 말도 안 되는 일이었거든.”

“그 이유가 뭔데?”

“그냥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지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묻고 그래?”

“지랄하네. 또 그거구만. 무인의 자존심인가 뭔가 하는 그거. 자존심이 밥 먹여 줘? 일단은 살아야 콧대를 세우든 말든 할 거 아냐?”

간옹의 말은 백번 옳다.

다만 무인으로서 받아들일 수가 없을 뿐.

“때론 그 자존심이 밥을 먹여 주는 거요.”

“헛소리하고 앉았네. 일단 살고 보는 게 맞지. 근처에 의원이 있었으면 일단 치료는 받고 나서 싸우든가 말든가 하면 되는 거 아니냐? 하여간 머릿속에 칼밖에 없는 놈들은 이렇게 단순해요.”

쌍소리를 내뱉으면서도 간옹의 손은 쉬지를 않았다.

입은 더럽지만 언제나 의술을 베풀 때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하는 게 간옹이다.

그는 환부를 깨끗이 닦아 낸 뒤 미리 준비한 특수한 약즙을 상처에 발랐다.

그는 추룡이 누른 혈도들을 손끝으로 살며시 누르면서 상처의 특징을 세세하게 파악했다.

“상처 길이는 이 척 오 푼, 상처 깊이는 일 촌 반. 역시. 예전에 봤던 상처야. 항주에서 본 기억이 있어. 베인 깊이가 똑같아. 이렇게 칼을 쓴 주인은 언제든지 몸을 반 토막 낼 수 있었어.”

상처 주변의 혈류가 잘 흐르도록 침을 놓으면서 간옹은 불만스럽게 눈썹을 찌푸렸다.

“죽일 생각은 없었던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위험한 초식으로 상처를 입힌 게 도대체 이해가 안 되네. 싸운 놈이랑 친했던 거야? 원수였던 거야? 구분할 수가 없네.”

“친했소.”

“뭐? 미친놈 아냐? 이거. 손끝만 삐끗했어도 이놈은 즉사였어.”

“미친놈……. 으음, 아마 자신의 무공에 확신이 있어서 그랬을 거요.”

“손끝만 살짝 미끄러져도 상대가 죽는데? 무공을 겨루는 거였잖아? 상대가 좀 피하다 엉뚱한 데 칼을 맞았으면? 자기 자신한테 도대체 얼마나 확신이 강한 거야? 사람이 완벽한가? 살면서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그건 뭐, 그렇긴 하군.”

“실수를 대비 안 하고 무모한 짓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미친놈이라 부르는 거야.”

추룡 입장에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독설이다.

간옹은 조서인을 눕혀 놓은 침상 아래에서 자그마한 금갑을 꺼내더니 그 안에서 단약을 꺼냈다.

단약을 꺼내자마자 청량한 향기가 주변에 진동했다.

“그게 구명환이오?”

“그래. 내가 당신들만 만나면 구명환이 축나. 평생 이거 쓸 일은 사실 드물다고.”

“보답은 톡톡히 하겠소.”

“당연히 그래야지.”

간옹은 청렴한 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자면 비싼 돈을, 가난하면 돈을 받지 않는다.

상대의 재력에 따라 진료비도 다르게 받는 사람이다.

“서역을 다녀오면서 나는 용의 내단을 하나 구했소.”

“허? 진짜 용의 내단이라고?”

“그렇소. 서역에선 내단이 아니라 심장이라 부르더군. 아무튼 그걸 정제하고 싶소.”

“흥미로운 이야기군. 하지만 기다려 봐.”

간옹은 덜덜 떨고 있는 조서인의 입을 벌려 혀 아래에 단약을 넣어 주었다.

조서인은 눈을 크게 떴다.

온갖 고통에 몸을 떨고 있었음에도 단약이 들어오는 순간 입안에 청량한 향기가 가득 차는 게 느껴졌다.

단약은 씹을 필요조차 없었다.

혀 아래에 들어오자마자 사르르 녹더니 자연스레 꿀떡꿀떡 목을 넘어간다.

조서인의 몸에서 떨림이 잦아들었다.

간옹은 그걸로 끝이 아니라 중지 손가락보다 긴 장침을 조서인의 몸에 톡톡 두드려서 찔러 넣기 시작했다.

“크게 움직이지 말고, 크게 숨을 쉬지도 말아. 가늘고 얕게, 그렇지. 이해가 빠르네. 명상하듯이 살살 숨을 쉬어.”

간옹은 조서인이 노력하는 모습에 흡족해하면서 귀밑과 얼굴에까지 침을 놓았다.

그리고는 조서인의 손발을 주무르다가 혀를 찼다.

“위기는 기회라고 다들 말하더군. 너도 마찬가지다. 큰 상처를 입었으나 이참에 네 몸에 휴식을 주고 내부를 되돌아볼 기회라고 생각하면 얻는 게 있을 것이야. 쯧쯧, 손과 발만 봐도 안다. 뭔 놈의 몸을 이렇게 혹사시켰어?”

따끔한 질책이 조서인의 마음에 스며든다.

마치 깊은 산속의 절에서 고승을 만난 것처럼 말에 진득한 정과 현기가 가득했다.

“네 몸이 불쌍하지도 않더냐? 단련과 혹사는 종이 한 장 차이 정도밖에 안 되지. 그 선을 넘어가면 몸은 단련되는 게 아니라 망가지는 것이야. 무공이란 하늘과 땅의 도를 인간의 몸으로 펼치는 것 아니던가? 중도를 지켜라. 무작정 달려나간다고 능사가 아니야.”

무학에 대한 큰 깨달음이 조서인의 머릿속을 후려쳤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참 오묘하다.

뛰어난 무인들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무리(武理)를 어째서 무공이라곤 일 초 반 식도 익히지 않은 의원에게서 배우게 되는가?

“자거라. 네게는 휴식이 어울려.”

툭.

간옹의 침이 명문혈 인근의 어딘가를 따끔하게 찌르는 순간, 조서인은 까무룩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후우.”

조서인이 번쩍 눈을 뜨고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창밖은 새카맣게 어두워져 있었다.

퀴퀴한 약 냄새.

비릿한 약재 향은 여전했다.

그런데 몸의 상태가 다르다.

온몸의 탁기가 어딘가로 빠져나간 것처럼 쌩쌩해서 지금 당장 뛰어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눈은 뻑뻑했고 눈물 때문인지 눈곱도 잔뜩 꼈다.

입도 메말라서 입술이 쩍쩍 달라붙는다.

조서인은 고개를 붕붕 저어 보았다.

출혈이 많았기 때문일까?

머릿속이 좀 어질어질했다. 그렇지만 몸 상태만큼은 정신을 잃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깼냐?”

추룡은 허름한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서책을 읽고 있다가 조서인을 맞이했다.

“제가 얼마나…… 아니, 그보다…….”

조서인은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킨 뒤 옆에 놓여 있는 찻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가뭄이 든 논처럼 잔뜩 말라 있던 입안이 다시 촉촉해지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숙부님은, 항상 제가 깰 때마다 계시네요.”

“네가 잘못되면 날 크게 혼낼 사람이 엄청 많거든.”

추룡은 늘 그랬듯 남 핑계를 댔다.

장기린, 부운화, 추묵환.

분명히 조서인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 세 사람은 추룡을 엄청나게 혼낼 것이다.

하지만 추룡이 조서인을 걱정해 주는 건 그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가장 걱정해 주고 계시면서. 늘 말은 저렇게 하신다니까?’

추룡이 속으로는 조서인을 가장 걱정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조서인은 그저 웃으면서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숙부님 덕분에…… 살았어요.”

“뭐, 천무련에 있었어도 죽지는 않았을 거니까 내 덕분이랄 건 없다. 그보다 몸은 괜찮으냐? 내공은 멀쩡하고?”

“으음,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직 상체는 움직일 때마다 쑤시지만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추룡은 서책을 내려놓고 조서인이 일어날 수 있도록 부축해 주면서 물었다.

“서인아. 너는 이번 싸움, 왜 졌다고 생각하지?”

조서인은 추룡의 진중한 눈빛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스스로에게도 자문해 보았다.

왜 졌는가?

그에 대한 답을 연구해 가는 것이 바로 무도(武道)다.

“저는…….”

조서인의 입이 달싹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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