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28화 (657/686)

21권 22화

제43장 심즉다의(深則多疑) (14)

“졌죠. 그렇네, 저는 졌네요.”

사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싸움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순간들이 선명하지만, 그걸 완전히 받아들였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책으로 읽는다고 그게 다 자신의 지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무공도 마찬가지였다.

조서인은 자신이 겪은 싸움을 곰곰이 되짚어 가며 무공을 발전시킬 기회를 갖지 못했기에, 아직 어째서 그가 졌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잘 모르겠어요. 정신 없이 싸웠는데 결국엔 졌네요. 제가 아직 약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추룡은 고개를 저었다.

“너는 훌륭했다. 배운 만큼 해냈냐고 평가하면 너는 오히려 그 이상이었지.”

“예? 아, 예. 가, 감사합니다.”

조서인은 당황했다.

추룡이 이렇게 칭찬부터 해 준다는 것이 너무나 어색했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소호의 무공은 너와 큰 차이가 없었다. 한 무공에 대한 깊이는 오히려 네가 나았어. 응용력이야 소호가 워낙 뛰어난 분야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으음, 예. 소호는 기본 공으로도 절륜한 무공을 상대할 수 있는 친구예요. 무산학관에서도 자주 그랬어요.”

“그래. 약한 무공을 사용해 강한 무공을 깨뜨리는, 그런 부분에 재능이 있더구나.”

추룡은 상황을 바깥쪽에서 냉철하게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소호의 허실과 조서인의 허실을 명확히 판단했다.

“문제는 소호는 단전이 하나 더 있는 것처럼 싸우더군. 내공에 있어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뜻이야. 내가 볼 때 이번에 승부를 가른 것은 내공의 차이가 컸다.”

“그건……. 예, 차이가 있었던 것 같아요.”

“통배권이라고 했나? 그 무공은 소름이 돋더군. 초절정의 고수가 모든 내공을 다 써야 할 만큼 내공 소모가 극심한 무공이었어.”

“예, 물결치는 기파가 파도처럼 후려치더라고요. 피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조서인은 통배권의 기파가 정면을 완전히 뒤덮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시 떠올려 봐도 완전히 피할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질 않는다.

“그때 생각했다. 소호를 이기려면 가장 필요한 건 네게 부족한 점을 채우는 것이지. 내가 볼 때 그게 바로 내공이다.”

“하지만 내공은……. 검선께서도 그러셨고, 사부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하루하루 숨을 쉬며 강해지는 게 왕도(王道)라고요.”

“그렇지. 원론적으로는 그게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분들이 네게 나쁜 습관이 들지 않게 하려고 하신 말씀이야.”

“예?”

“생각해 봐라. 명문 세가 출신이나 구파일방 출신이라며 거들먹거리는 자들이 혼자 스스로 내공 수련만해서 강해진 놈들이 얼마나 되겠냐?”

“……네? 원래 다들 그렇게 강해지는 것 아닙니까?”

“이거이거 여전히 순진하구만.”

추룡은 혀를 찼다.

“생각해 봐라. 명문 세가든 구파일방이든, 그놈들은 자파의 제자들을 어떻게든 남들보다 더 강하게 키워 내는 게 최대의 목표인 놈들이야. 알지?”

“예.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내공을 그냥 각자의 재능대로 기르도록 가만히 두는 게 맞겠냐? 아니면 전대 고수가 은퇴하면서 내공을 전수하고, 영약도 문파 단위로 대량으로 구해서 팍팍 지원해 주는 쪽이 맞겠냐?”

“아…….”

“그런 거야. 대문파의 역사와 힘은 그렇게 점점 몸집을 불려 가는 형태로 쌓여 간 거다. 그러니 새로 생기는 작은 무파들은 어지간한 천재가 나타나지 않는 한 대문파를 넘어서기 힘든 거고.”

“그 말씀은, 그러니까. 저도 내공도 전수 받고 영약을 먹으며 강해져야 한다는 겁니까?”

“그래. 검선 어르신도 모르긴 몰라도 구양세가에서 자라면서 백년하수오나 영물의 내단 같은 걸 간식 드시듯이 드셨을 걸?”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천하제일세가니까요. 그럼 사부님은……?”

“큰 형님은 좀 경우가 다르긴 한데, 나는 본인이 모를뿐이지 과거에 뭔가를 드셨다고 본다. 장가구에서 군병으로 서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공이 어마어마하셨거든. 그건 내가 볼 땐 자연적으로 생길 수 있는 내공이 아니었어.”

“아…….”

조서인은 곰곰이 자신의 무공을 되돌아보았다.

돌이켜보면 검선과 처음 만났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건곤조화신공을 처음 익히면서 몸속의 노폐물들이 모조리 빠져서 악취로 뒤덮이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무슨 소린지 알겠냐?”

“예, 알 것 같습니다.”

“지금의 벽을 넘기 위해서는 네게도 도움이 필요하고, 내가 그걸 돕겠다는 소리야.”

조서인은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당황하면서 입만 벙긋거렸다.

대체 일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사이 추룡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목갑을 들어 올렸다.

“이건 내가 서역에서 가져온 용의 내단이다. 간 선생이 이걸 정제해서 내단으로 만드느라 사흘 밤낮을 꼴딱 새고 지금 쓰러져서 자고 있어.”

“제가 사흘이나 쓰러져 있었습니까?”

“천무련에서 여기까지 온 시간까지 합하면 나흘쯤 되겠네.”

“세상에.”

조서인은 자신이 쓰러진지 생각보다 오래되었다는 것에 첫 번째로 충격을 받고, 그다음엔 정말로 이 세상에 용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서역에는 용이 있었습니까?”

“거의 없어. 그리고 우리가 아는 용의 모습과도 다르다.”

“그렇군요. 신기하네요.”

“간 선생은 독기와 사념으로 가득 찬 위험한 물건이라 평하더군. 그 독기를 따로 분리시키느라 삼 분지 일은 버린 셈이지만,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거다. 먹으면 내공이 비약적으로 늘어날 거야.”

“아…….”

조서인은 그를 향해 내밀어진 목갑을 보며 그제야 상황을 알아챘다.

“설마 저를 주시는 겁니까?”

“그럼 내가 먹을 건데 이걸 너한테 설명하고 있겠냐?”

“그냥, 귀한 물건에 대해 안목을 키워 주시는 줄 알고…….”

“이 녀석은 순진한 건지 어수룩한 건지.”

추룡은 혀를 찼지만, 조서인의 그런 순박함이야말로 추룡이 조서인을 아끼는 이유였다.

“너한테 자랑하려고 말한 거 아니니까. 먹을 준비나 해라. 너는 지금 네가 크게 다쳤다는 인식이 없나 보구나.”

“아…… 네, 크게 다쳤었죠?”

“나중에 간 선생한테 감사 인사를 드려라. 그의 침술과 구명환이라는 영약이 없었더라면 너는 지금 일어나지도 못했어.”

“예, 구명지은은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꼭 보답하겠습니다.”

조서인은 가슴에 우둘두둘하게 만져지는 실매듭을 만지작거리며 결의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약을 제가 받아도 될까요? 숙부님께서 드셔야 하는 건 아닌지…….”

“시끄러워. 너 아직 다 안 나았다. 네가 빨리 낫고, 다음번에 소호 녀석을 이기려면 그런 거라도 먹어야지 어쩌겠냐.”

“그런 거라뇨. 이 귀한 걸.”

“용의 내단은 강호에 유명한 영약이라거나 먹는 방법이 증명된 물건은 아니야. 어쩌면 먹고 나서 위험할 수도 있다. 원래 체질에 맞지 않으면 약도 독이 되는 법이지.”

“그런가요?”

“그래. 웃을 일이 아니다. 긴장한 채 조심스레 진행해야 하는 일이야.”

추룡이 진지한 태도로 말하니 조서인도 갑자기 긴장되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각오는 되었냐?”

“……소호를 막기 위해서. 예. 먹고 강해지겠습니다.”

“좋아. 그럼 무릎을 꿇고 앉아라.”

조서인은 군말하지 않고 침상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으음.”

“가슴이 아플 테지. 그래도 허리를 쭉 펴라. 자세를 곧게 하고 내공을 다스릴 준비를 해.”

가슴이 쩍 갈라진 지 이제 겨우 사흘이 지난 몸이다.

아무리 구명환을 먹고 빠르게 회복이 되었다고 한들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목갑을 열고 내단을 손에 올려라. 그리고 정신을 집중해서 내단에 깃든 힘을 느껴 봐.”

조서인은 목갑을 열자마자 얼굴에 훅― 하니 끼쳐드는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기이한 일이었다. 내단은 새카만 색깔이었는데, 약재로 뒤덮여서 그렇게 보일 뿐 속에는 잘 달궈진 숯이 들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얼굴이 뜨끈했다.

“이게 용의 내단…….!”

조서인은 목갑으로 가로막혀 있음에도 자신의 손에 화기(火氣)가 닿는 것을 느꼈다.

조심스럽게 단약을 들어 올리자 그 감각은 절정에 달했다.

따뜻하게 데운 물에 손을 집어넣은 것처럼, 단약을 들고 있을 뿐인데도 화기가 손으로 파고들었다.

“열기가…… 엄청납니다. 내단이 살아 있는 것 같아요. 약동하는 기운이 느껴집니다.”

“거부감은 없나? 건곤조화신공을 끌어 올려 봐. 반발하는 느낌이 있는지.”

우우웅―.

조서인은 눈을 감고 집중했고, 손바닥으로 집중시킨 건곤조화신공의 내공이 내단과 교감하듯 서로의 기운을 주고받았다.

“반발은…… 없습니다. 서로 기운을 주고받고 있어요.”

“다행이군. 간 선생이 독기 제거는 제대로 해 준 모양이야.”

추룡은 만족해하며 조서인의 등 뒤에 자신도 똑같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지금부터 단약을 삼켜라. 내가 뒤에서 도와주마.”

“……예.”

조서인은 긴장하면서 단약을 입에 넣었다.

감초의 그것과 비슷한 달큰한 풀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단약은 딱딱하게 굳은 떡처럼 촉감이 단단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막상 이빨로 씹으니 푸석하게 이빨이 들어갔다.

“흡.”

단약이 물로 변하듯 사르륵 녹아내린다.

죽처럼 끈적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 배 속으로 들어갔다.

“흐읍!”

그 순간 배 속의 내장들이 일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위장, 대장, 소장, 간, 신장.

몸안에 대충 위치를 알고 있는 내장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일어난 농민들처럼 조서인에게 반기를 들었다.

조서인은 신음을 흘렸다.

뜨거운 열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배 속에 불이라도 난 것 같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숯덩이를 삼킨 기분이었다.

“흐으읍!”

꿈틀 움직이려는 조서인의 어깨를 추룡이 붙잡았다.

“버텨라. 당황하지 마. 건곤조화신공을 끌어 올려라.”

두근 두근 두근.

조서인은 심장 소리가 말발굽 소리처럼 거세게 달린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에서는 천둥소리 같은 것들이 꽝꽝 울려 퍼졌다.

배 속으로 들어온 내단이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며 몸속을 장악하려 하고 있었다.

상리에서 벗어난 일.

밖에서 굴러들어 온 기운이 온 몸을 장악하고 주인 행세를 하려는 격이다.

‘버텨야 해! 싸우고 제압한다!’

다행히 조서인에게는 그를 도와줄 든든한 아군이 존재했다.

조서인이 건곤조화신공의 유장한 내력으로 내단을 감싸자, 명문혈에 손을 댄 추룡이 자신의 내력을 이용해 조서인의 운기를 도와주었다.

“스으으으읍― 후우우우―――.”

길게 내쉬는 숨결이 어찌나 뜨거운지 불꽃을 내뿜는 듯했다.

발버둥치던 내단이 천천히 조서인의 몸속 기운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한 시진, 두 시진.

시간은 계속 흘러 어느새 밤이 낮이 되고, 다시 해가 져서 밤으로 변했다.

점점 차분한 안색이 되어 가는 조서인과 그 뒤에서 초췌해져 가는 추룡 사이에서 시간만이 장강의 강물처럼 묵묵히 흐르고 있었다.

“후우우.”

조서인의 몸에서 손을 뗀 추룡이 비틀거리면서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항상 강건했던 그는 피로를 감추지 못하고 지친 기색이었다.

곁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간옹이 대뜸 차 한 잔과 단약을 내밀었다.

“이건……?”

“후배 기르느라 고생이 많군. 손상된 양기를 보완할 보양제일세. 값은 넉넉히 치러 줘. 약재가 많이 들었어.”

“……고맙소.”

말로는 제값을 받겠다지만, 지금 이 순간 단약이라는 것은 돈을 주고도 못 살 귀한 물건이었다.

추룡은 간옹에게 감사를 표하며 단약을 따뜻한 약차와 함께 마셨다.

“훨씬 낫지?”

“속이 진정되는군.”

“한숨 자고 나면 훨씬 나을 걸세.”

간옹과 추룡은 나란히 서서, 여전히 운기행공에 집중하고 있는 조서인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자네가 먹고 싶지는 않던가?”

추룡은 초췌한 안색으로 피식 웃었다.

“내가 먹어서 뭘 하려고? 천하제일 고수라도 될 것 같소?”

“안 될 건 뭔가? 강호 무림에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용의 내단인데. 세상엔 더 늙어서도 노욕을 부리는 인간들이 많아.”

“됐소. 그런 거 나랑은 안 어울려.”

추룡은 일말의 미련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막상 다뤄 보니 알겠소. 나는 다룰 수 없는 힘이야. 내가 먹었으면 십 년은 면벽수양을 하면서 내공을 다스리는 데만 집중해야 할 것 같소.”

“저 청년은 다르던가?”

“다르오. 역시 자랑스런 우리 큰 형님의 제자답더군.”

추룡은 장담했다.

“저 운기행공이 끝나면, 세상은 새로운 무쌍귀의 탄생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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