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 23화
제43장 심즉다의(深則多疑) (15)
정신을 차린 방익지는 자신이 붕대에 칭칭 감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이 욱신거렸다. 말라서 뻑뻑한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니 이번엔 콧속으로 지독한 약 향이 찔러 왔다.
“으음.”
방익지는 신음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방 안의 창문이 다 닫혀 있어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를 구별하긴 힘들다.
다만 주변은 고요했고 그가 누워있는 침상은 돌처럼 딱딱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침상을 손으로 짚고 일어나려다가 균형을 잃고 미끄러졌다.
쿵.
엉덩이와 무릎이 욱신거렸다. 방익지는 그제야 자신의 몸이 균형이 맞지 않음을 다시 한 번 인식했다.
“팔이…….”
그렇다.
팔이 없다.
일평생 검을 휘둘러 오던 오른팔이 어깻죽지에서부터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너무 충격적인 일은 사람을 당황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침묵시켰다.
방익지는 끙끙 앓는 신음만 흘렸다.
의외로 통증은 없었다.
마약이라도 먹인 것일까?
현실이라는 잔인한 파도가 그의 육체와 정신을 이리저리 흔들어 댔다.
“일어났군요?”
방익지가 일어나길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고 한 청년이 들어왔다.
낯빛이 너무 창백해서 생기가 느껴지질 않는다. 워낙 안색이 창백하니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며 저승사자라거나, 귀군사(鬼軍師)라 부르는 것 또한 당연했다.
키는 꽤 큰 편이고 몸은 호리호리하게 말랐다. 단출한 백의에 문사건을 눌러쓴 모습은 영락없는 낙향 문사인데 얼굴은 선이 가늘고 잘생겼다.
천무련의 대군사.
문상(文上) 섭주해.
천무련주는 천외천의 존재니까 제외.
그 외에 천무련 내에서 무(武)의 최고위 인물이 무상 패원강이라면, 문(文)의 최고봉은 아무도 이견이 없이 섭주해를 꼽는다.
천무련이 한창 몸집을 불려 나가던 시절, 제갈세가의 천기옥룡(天璣玉龍) 제갈성(諸葛盛)과 사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펼친 지략 대결은 이미 강호 무림에 유명한 사건 중의 하나다.
바둑과 닮은 군사 놀이로 서로의 지략을 겨룬 제갈성은 섭주해의 능수능란한 군사운용에 탄복하며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천무련의 부군사가 되었다.
방익지는 항상 다른 사람보다도 섭주해를 상대하길 어려워 했다.
천무공자 장소호는 하늘 위의 존재지만, 그래도 같은 무인일뿐더러 방익지와 일정 부분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섭주해는 다르다.
섭주해와 방익지는 공감대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섭주해가 지닌 압도적인 지혜는 언제나 방익지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군사. 오셨습니까?”
방익지는 허둥지둥 포권을 취하려다 그가 한 손밖에 없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망연자실했다.
“괜찮습니다. 그냥 계세요.”
“저는…… 으음…….”
“사천에서 고생이 많으셨죠?”
탁. 탁.
섭주해는 제갈량처럼 섭선을 손바닥에 툭툭 두드리다가 살랑살랑 흔들었다.
방익지는 섭선에 달린 새하얀 깃털을 멍하니 쳐다봤다.
섭주해는 무표정했다.
웃는 것도, 그렇다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닌 얼굴.
그 와중에 지혜가 번뜩이는 영민한 눈빛은 방익지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다.
침묵이 흘렀다.
섭주해의 뒤를 따라온 참모들이 섭주해와 방익지에게 따뜻한 차를 건넸다.
“드세요.”
“감사합니다.”
따뜻한 찻물이 방익지에게 안정을 되찾아 주었다.
섭주해는 방익지가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게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군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요?”
“예.”
다시 침묵이 흐른다.
섭주해의 섭선은 여전히 살랑살랑 흔들린다.
“아미파와의 사이를 중재하느라 바쁜데 갑자기 금룡각주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뒷조사를 하면 화가 나겠죠?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해할 수 있어요.”
“아닙니다.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그냥…… 그냥…….”
말문이 막혔다.
오른팔과 함께 야망도 날아간 것일까?
사천에서의 그 욕망과 야망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지금의 그는 너무나 무기력했다.
방익지는 한참 더듬거리다가 겨우 말을 완성했다.
“저는 그냥…… 섭섭했던 것 같습니다.”
“섭섭?”
섭주해가 웃었다.
“섭섭이라. 그랬군요. 방 조장은 섭섭했던 것이군요.”
“예.”
“그래도 문주희를 죽이는 건 너무하잖아요?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셨지요?”
문주희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 따위는 묻지도 않았다.
섭주해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추궁하려는 건 아니니까 말해 봐요.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방익지는 입이 바짝바짝 말라서 찻물을 급히 들이켰다.
“그건 오해…….”
어떻게 변명을 할지 고민을 하길 잠시, 그는 섭주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미 모든 게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의미가 없다. 부정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야. 오히려 지금 해야 할 것은…….’
그 순간 사천에 있는 집에서 그를 기다릴 여인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방 조장, 표정이 좋아졌군요.”
섭주해는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섭선을 까딱거렸다.
“군사. 저를 버린 것은 천무련이 먼저이지 않습니까?”
“저희가요?”
“그렇습니다. 모르는 척하진 않으시겠죠?”
방익지가 눈빛을 번뜩였다.
섭주해는 흥미롭다는 듯 미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섭선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재밌는 이야기군요. 계속해 보세요.”
“애초에 금룡각주를 사천에 보낸 게 군사의 결정 아닙니까? 거기까진 좋습니다. 천무련 전체에 뭔가 경고를 하고 싶다면, 저처럼 개국공신으로서 천무련의 시작을 함께한 사람을 탈탈 터는 것은 본보기로 제격일 겁니다.”
“거기까지 생각해 주다니. 방 조장은 충신이었군요?”
다분히 비꼬는 말이었다.
방익지는 군말 없이 수긍하며 응어리진 말을 토해 냈다.
“예, 충신이었지요. 그런데 천무련은 사천에 있는 일개 상인에게도 저를 버리고 금룡각주를 밀어 주겠다는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그건…… 저를 버리는 것이었잖습니까? 금룡각주를 위해 저를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설마 아니라고 하실 겁니까?”
“아뇨, 맞습니다.”
으득.
방익지는 이를 악물었다.
섭주해는 뻔뻔해 보일 만큼 태연자약하다.
“그랬죠. 그게 섭섭하던가요?”
“예. 그 순간 제 머릿속에서 뭔가가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은 필마온…… 아니, 가만히 있다가 희생당하는 역할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반기를 들었다?”
“반기는 아닙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쳤을 뿐입니다. 군사가 날 이렇게 몰아붙인 것 아닙니까! 금룡각주랑 나. 둘 중에 한 명만 살아남도록 유도한 것 아니냔 말입니다!”
“후후후.”
섭주해가 웃음을 터뜨렸다.
섭주해가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방익지는 내심 놀랐다.
“아미파와 중재하라고 보내 놓았더니 뒷돈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슬금슬금 액수를 늘여가더니 결국엔 커다란 저택과 여자까지 받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사천 암흑가에서 자신의 세력을 몰래 키운 것. 천무련에서 몰라서 가만히 둔 거라 생각했습니까?”
“……련에서 알고 있을 거라 짐작은 했습니다.”
섭주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애초에 방 조장을 사천에 보냈을 때 우린 당신이 그렇게 행동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미파에 휘둘리고, 부패하다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사천 암흑가에 발판을 만들 거라 생각했습니다.”
방익지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뭐라고요……?”
목소리까지 떨린다.
방익지는 믿기지가 않았다.
그는 천무련에서 명령서를 내리던 그날을 기억한다.
많은 이가 모인 곳에서 군사가 명령문을 낭독하고, 천무공자가 직접 그를 응원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었다.
“전략을 구상할 때 부군사가 했던 말이 기억나네요. 방 조장은 제법 수완이 좋은 인물이지만 아미파의 노괴(老怪)에게 휘둘릴 뿐 제대로 자기 세력을 구축하진 못할 것이다. 아미파가 자신의 앞마당에 어찌 되었든 천무련의 발이 뻗치는 걸 두고 볼 리가 없다, 라고 말했지요.”
“……!”
“저는 부군사에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방 조장은 알려진 것보다 더 능숙하게 자신의 재산을 착복할 것이고, 황산파에서의 경험을 살려서 사천 암흑가에 과감하게 발판을 만들 거라고 했죠. 그리고 아미파의 노괴는 노망이라도 들었는지 무모하기 짝이 없어서 오히려 방 조장을 잘 키워서 천무련을 분열시킬 도구로 쓰기 위해 사천 암흑가 정도는 희생할 거라 예상했고요.”
오싹.
방익지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밑바닥을 구르며 살아온 오랜 경험으로 상대방의 눈을 보면 그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정도는 판별할 수 있었다.
섭주해가 내뱉는 모든 말들은 진심이 아닌 게 없었다.
부군사 제갈성과의 대화도 사실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부처님 손안의 오공이었던 것이 아닌가? 익지야, 익지야. 너는 참으로 어리석었구나.’
방익지는 한참이나 입술만 달싹이며 침묵을 지키다가 힘겹게 물었다.
“도대체, 왜……? 내가 그럴 걸 알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러길 원했던 것입니까?”
“예.”
차갑게 웃는 섭주해는 그야말로 방익지와 같은 평범한 ‘사람’ 같지가 않았다.
저 높은 곳의 존재.
구름 위에서 우매한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방익지를 바둑돌 삼아 천하에 바둑을 두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였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죠. 아미파에게 역정보를 흘려 계책을 쓸 수도 있을 것이고, 아까 방 조장이 말한 대로 모두에게 청렴하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방 조장을 본보기로 삼아 쳐 내는 방법도 있을 거고요.”
“지금은…… 어떻게 하길 원합니까?”
“방 조장의 목에 목줄을 채우려고 합니다.”
섭주해가 부드러운 동작으로 일어섰다.
냉랭한 눈빛.
경멸하듯, 냉철한 시선이 쏘아진다. 섭주해가 그 가는 몸으로 뿜어내는 기백이 방익지의 정신을 짓눌렀다.
“잃어버린 팔에 최고의 의수를 달아 드리지요. 세력도 마음껏 키워 보세요. 직책은 오히려 각주로 승진될 것이고 문주희를 죽인 처벌 또한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천의 그녀도 그대로 함께 있을 수 있게 해 드리죠.”
“……!”
방익지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결과였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달콤한 대가를 들으면 들을수록 무저갱의 지옥 속에 발을 들이미는 듯한 기분인 것은?
“아까 필마온이라 했습니까? 맞습니다. 당신은 필마온입니다. 마구간지기면 마구간지기답게 몸을 낮추고 주인의 것을 넘보지 마세요. 련주님을 향해 충심을 증명한다면 뒷돈 몇 푼 챙기는 것 정도야 못 본 척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방익지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사람 같지 않은 자.
저 위에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며 천하를 향해 바둑돌을 놓는 지자(智者)가 눈앞에 있었다.
‘무서운 자다. 이자는 대체 뭘 노리는 것인가?’
개미의 눈으로 어찌 사람의 바둑판을 이해할 수 있을까.
방익지는 섭주해가 밖으로 나가는 동안 겁에 질린 채 어깨를 움츠렸다.
***
“그랬구나. 음, 그랬어. 몰랐네.”
섭주해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보며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장소호를 잠시 지켜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붉은색 귀화가 감도는 눈빛이 섭주해를 향한다.
섭주해의 얼굴을 알아보고, 표정이 바뀌더니, 환한 웃음으로 섭주해를 맞이했다.
“주해야, 왔어?”
“형, 집혼기와는 너무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게 좋아요.”
“이 사람들도 다 불쌍한 사람들이야. 하나씩 대화를 나누다 보면 느끼는 점이 많아.”
“물이 얕다고 해서 우습게 보고 발을 담그고 걷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젖어 버리는 법입니다. 조심해야 해요.”
“알았어, 알았어. 조심할게.”
최근 들어 소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전륜법광이 점점 붉은색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호는 화제를 바꿔 부루퉁한 표정으로 물었다.
“방 조장은? 다 수긍했어?”
“예, 겁도 줬으니 말을 잘 들을 겁니다.”
소호는 매끈한 턱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미간을 좁혔다.
“머리로는 아는데, 그래도 마음에 안 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