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 24화
제43장 심즉다의(深則多疑) (16)
“형은 그를 처벌하고 싶었죠?”
“응.”
소호는 불만이 가득했다.
방익지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사실은 가장 그에게 화가 났던 것이 소호다.
“난 방 조장을 믿었다고.”
“저는 안 믿었고요.”
“그래. 주해는 항상 사람을 꿰뚫어 보니까. 그래도 방 조장은 내가 어릴 때부터 날 따라 준 사람이잖아?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나 싶었어, 나는.”
“문주희에 대한 이야기군요.”
“그래. 비리를 저지른 게 걸리니까 대놓고 자기 살길 찾겠다고 난동을 피워? 싸울 수도 있겠다 싶긴 했지만…….”
소호는 답답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손끝으로 이마를 톡톡 두드리면서 겨우 감정을 삭이고 있었다.
“설마 죽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었어. 주희는……. 그렇게 죽어선 안 됐거든.”
“…….”
“천무련에 들어온 귀한 상계(商界) 인재였잖아. 안 그래?”
“천무련과 형을 싫어해서 문제긴 했지만요.”
섭주해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야 나를 싫어할 수도 있겠지. 시작을 따지자면 주희 아버지의 잘못에서 이어진 거니까 어쩔 수 없고.”
금룡상회의 회주 문갑룡이 조서인을 이용해서 뭔가를 획책하지 않았다면 소호가 그렇게 벌을 내렸겠는가?
다 자업자득이다.
마찬가지로 주희가 소호를 미워하는 것도 소호의 자업자득이다.
소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소호 형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알아요.”
섭주해는 소호의 말에 동의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웃는 얼굴에 차분한 눈빛.
섭주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소호도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있다.
이 모든 것은 소호를 위해서.
섭주해는 늘 소호를 위해서 행동하는 동생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주희가 죽는 바람에 서인이가 화가 많이 났잖아. 나한테는 그게 가장 중요했다고.”
“소호 형은 서인이를 많이 아끼니까요.”
“절친한 친구니까.”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이번 일로 화가 많이 났을 겁니다. 소호 형, 앞으로 그가 적이 되면 형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난 서인이가 적이 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
소호의 목소리엔 묘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섭주해는 그 말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글쎄요. 사람은 더 사소한 일로도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곤 해요, 형.”
“알아. 나도 소중한 사람을 잃어 봤으니까. 누굴 원망하는 일이 쉽다는 건 잘 알지. 하지만 상대는 서인이야. 대화하면 괜찮을 거야. 서인이는 항상 그랬어.”
섭주해는 지긋이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다가 화제를 돌렸다.
“……생각해 보니 이게 다 방익지 탓이군요. 관인이었으면 목이 날아갔을 겁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소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방 조장한테 실망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야. 첫 번째는 안 보이는 곳에서 내 욕을 하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선을 넘어 버렸어.”
“소호 형이 아무래도 처벌을 하고 싶다면 그렇게 전략을 다시 짜 볼게요.”
섭주해는 진심이다.
소호가 고집을 부리면 언제나 그에 맞춰서 모든 일을 다시 해 준다.
소호는 손을 내저었다.
“아냐.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방 조장을 처벌하면 천무련 내의 중소 문파 출신 무인들이 반발할 거라고 했었잖아?”
“예. 그동안 특별한 기반이 없는 무인들한테 방 조장이 인덕을 많이 쌓았습니다. 용돈도 주고 밥이랑 술도 사 주면서요. 지금도 군사부에 몰려와서 자신들이 죄를 나눠 받겠다면서 난리예요.”
“……신기하네. 방 조장은 돈 쓴 보람이 있겠다.”
“그런 거죠. 그러니 지금 방 조장을 죽이기라도 하면 그들은 반발할 겁니다. 개국공신이라도 가차 없이 죽이는 인정 없는 곳이라든가. 머리가 좋은 자들은 어쩌면 대문파 출신이 아니라서 죽였다고 선동할 수도 있겠죠.”
천무련에는 팔파일방 출신의 이른바 ‘뼈대 있는 무인’들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기존의 중소 문파 출신 무인들과 갈등이 생겨나고 있었다.
기존에 천무련의 기틀을 세운 건 자신들인데 왜 뒤늦게 들어온 대문파 출신의 무인들이 혜택을 받느냐는 말이 나오는 중이다.
심지어 반대쪽에선 대문파 출신의 무인들이 밑바닥 낭인 출신들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겠냐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런 식의 싸움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큰 죄를 짓고 천무련의 명성을 위험에 빠뜨린 건 방익지인데, 정작 천무련의 사람들이 방익지의 선처를 호소하다니.
이보다 더 귀찮은 상황은 없었다.
“골치 아프네. 이래도 손해고 저래도 손해야. 원래 이 자리가 이렇게 힘든 거야?”
“높은 자리엔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법이죠. 형은 다 알면서 또 그러시네요.”
섭주해는 소호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천무련 내부의 문제도 그렇지만 외부의 문제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미파가 방익지 조장이랑만 대화하겠다고 대놓고 티를 내지만 않았다면 저도 처벌하자고 했을 테니까요.”
“이야기 들어 보니까 아미파에서는 방 조장한테 뇌물 먹였다고 대놓고 말하는 것 같던데?”
“맞습니다. 암묵적인 분위기로 그렇게 말하고 있죠. 속내는 그걸 티를 내서 우릴 분열시키려는 게 뻔하고요. 소호 형, 앞으로를 생각하면 당장은 좀 속이 상해도 방 조장을 처벌하지 않고 조금만 더 놔두는 게 낫습니다.”
비밀리에 작업을 해서 방익지를 회유해 놓고 그걸 대놓고 이쪽에 알리다니.
천무련이 분열하라고 부추기는 것밖에 안 된다.
정도 팔파일방 중의 하나인 아미파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런 일을 당당하게 하고 있었다.
“정허 사태는 정말 상대 못 할 사람이야. 왜 그렇게 뻔뻔하지? 무상을 돕겠다는 대의명분만 있으면 무슨 일을 해도 된다는 거야? 정파의 명숙이잖아? 나이도 많고. 전대 고수나 다름없는 사람이 그래도 돼?”
“무림의 노고수다운 행동은 아니긴 하죠.”
“그 정도가 아냐. 이건 너무 심해.”
“결과만 좋다면 염치없이 무슨 일이든 하는 사람은 어디든 있지 않습니까?”
“어디 산골 마을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저 사람은 아미파의 장문인이니 하는 말이야.”
“그냥 마음 넓게 받아들이세요. 아미파 장문인이나 시골의 촌부나 별다를 게 없다는 거니까요.”
소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미파 장문인과 시골 촌부가 다르지 않다니. 도인(道人) 같은 소리네. 철학적이야.”
“후후, 세상은 원래 철학적인 거잖아요?”
일단은 참아야지 어쩌겠는가.
하지만 소호는 당한 것은 꼭 갚아 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이대로 끝나지는 않는다.
앞으로 크게 보복하기 위한 전략을 섭주해와 함께 짜 두었으니 반드시 갚아 주고 말 것이다.
“방 조장은 앞으로는 문제 일으키지 않을 것 같아?”
“괜찮을 겁니다. 겁은 제대로 줬어요.”
“상단전을 썼어?”
“네, 상청신기(上淸神氣)를 썼죠.”
모산파의 신공, 상청도경의 상청신기다.
섭주해는 무공 능력은 특별하지 않지만 상단전은 크게 발달해 있었다.
신기(神氣)가 있는 섭주해가 마음먹고 상대방의 정신을 제압하려 들면 백치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소호는 믿을 만한 이야기를 듣자 그제야 안심했다.
“그럼 괜찮겠네. 방 조장이 사천에서 세력을 더 불리고 있으면……. 우리 계획대로 진행해도 되겠다.”
“예. 계획대로 적양문주와 약속을 잡겠습니다.”
“그러자. 어서 만나자고 전해 줘.”
정파 무림맹인 천무련과 사파의 필두인 적양문의 만남이었다.
무림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칠 만남이 비밀스럽게 계획되고 있었다.
***
“이건 한동안 목욕물에 섞어서 쓸 하수오 달인 물이고, 여기 이건 팽가가 자랑하는 맹호환(猛虎丸)이에요. 한 알만 먹어도 맹호처럼 힘이 난다고 하는 단약이죠. 부족한 원기를 채워 줄 거예요. 여기 이건 조선에서 들여온 홍삼, 여기 이것들은 강장(腔腸)에 좋다는 약재들. 식사에 쓸 고기는 소 한 마리랑 돼지 한 마리를 데려왔으니 하인들이 잡아 줄 거예요. 아! 혹시 모자라면 얼마든지 더 가져올 수 있어요.”
조서인은 팽자연이 한참이나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것들을 멍하니 들었다.
마당에는 감히 몇 달치 물품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물건이 줄줄이 쌓여 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일꾼들이 열심히 짐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힐끗 옆을 보니 추룡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면서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좋을 때다. 좋을 때야.”
간옹 선생은 세상 다 산 노인네처럼 흐뭇한 표정으로 조서인과 팽자연을 번갈아 쳐다본다.
“크흠! 가, 감사합니다.”
조서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팽자연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자랑스러운 얼굴로 가슴을 폈다.
“별것 아니에요. 큰 오라버니께 무공 수련과 정양에 필요한 물품을 요청했더니 그래도 조금 신경을 써 주셨네요.”
“조금?”
“네? 네, 조금.”
“자연 누이. 조금이라니요? 이건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이게요? 아니에요. 원래는 팽가 근처에 넓은 장원 하나를 얻어서 쉬면서 의방과 약방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정양해야 하는 건데……. 하인이랑 하녀 들도 백 명 정도는 있어야 하고요. 그 정도는 되어야 정양이라고 할 수 있죠.”
“아……”
“휴우, 아쉽지만 서인 오라버니가 멀리 움직일 수는 없으니 할 수 없죠. 제가 여기서도 어떻게든 구색은 갖춰 볼게요.”
팽자연은 마치 힘든 일이지만 해 보이겠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했다.
산처럼 쌓여 있는 온갖 물자들을 등 뒤에 두고 말이다.
그녀가 뽀얀 얼굴 위로 다부진 표정을 짓는다.
조서인은 팽자연을 어떤 얼굴로 바라봐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했다.
‘진심이네. 자연 누이.’
커다란 장원에 백 명의 하인이라니.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팽자연이 하북팽가의 여식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넓은 장원’이라 표현한 곳이 얼마나 넓은 곳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크흠! 거봐라, 조카야. 내가 대문파에서는 다들 그렇게 수련한다고 했지 않느냐?”
추룡이 다가와 조서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예? 아, 예. 정말…… 그렇네요.”
“이왕 이리된 거 팽 소저한테 모든 걸 맡기고 정양해. 몸에 좋은 거 많이 먹고 푹 쉬면서 상처를 치료해야지. 안 그렇소, 간 선생? 잘 먹고 쉬어야 낫는 거 맞지?”
추룡의 말에 간옹이 반색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이지. 저 청년에게는 휴식이 곧 수련일세. 잘된 일이군. 이참에 상처가 모두 낫기 전까지는 절대로 수련하지 않는 게 좋겠어.”
“그건……!”
“꼭! 꼭 쉬게. 의원으로서의 조언이니 내 말을 믿어 보는 게 좋을 걸세.”
하루라도 수련을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조서인은 어떻게든 반대해 보려 했으나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간옹의 얼굴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기절하기 전에도 깨달음을 주셨었지.’
휴식을 취해야 강해진다던 그때의 깨달음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사부인 장기린도 늘 그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평범한 것.
자연스러운 게 가장 힘든 거라고.
‘해 보자.’
조서인은 강하게 마음을 먹고 다부지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예, 저도 한번, 휴식을 해 보겠습니다.”
전쟁터에라도 나가는 것처럼 결연한 목소리로 말하자 추룡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간옹도 웃고 팽자연도 웃는다.
오직 조서인만이 영문을 모른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