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31화 (660/686)

21권 25화

제43장 심즉다의(深則多疑) (17)

몸에 좋은 음식과 온갖 약재가 조서인의 몸과 마음을 살찌웠다.

돌이켜 보면 조서인은 삶에서 온전히 휴식만을 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호화롭게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고, 누군가의 지원을 받아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회복에만 전념할 수 있다니.

어린 시절 한 끼 밥조차 해결하지 못해 동네에서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던 조서인이 어찌 이런 날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조서인은 팽자연 덕분에 갖추어진 최선의 환경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수련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서인이 누구던가?

노력의 화신.

내공심법이 망가져 있었음에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조가창법을 연마해 무산학관에 합격할 만큼의 실력을 쌓은 사람이 그였다.

노력이라는 이름의 신이 있다면 조서인은 승려, 아니, 주지스님이나 방장이 되어도 충분할 만큼 일평생 노력만 해 온 청년이다.

그런 그에게 한동안 창을 휘두르지 못한다는 건 그야말로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평생에 걸쳐 해 오던 일이 갑자기 끊긴 것이다.

금단 현상이 일어나듯 손발이 꿈틀거리고 극도의 충동에 휩싸였다.

어찌나 초조했던지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가려울 정도였다.

천지가 개벽해도 새벽마다 수련하던 조가창법을 일부러 하지 않고 건너뛴 첫날.

조서인은 잠시도 잠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 중에 창을 잡았다가 팽자연에게 등짝을 얻어맞은 게 다섯 번이나 되었다.

그 무엇보다도 괴로웠던 것은 자꾸만 마음속에 드는 의심이다.

이게 맞는 걸까?

수련을 빼먹어서 지금 이 순간도 소호보다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기적적인 일이 벌어졌다.

휴식의 대가는 확실했다.

불과 열흘 만에 상처가 대부분 아문 데다 찢기고 끊어진 근맥들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몸을 단련하지 않았다. 대식가처럼 먹고 가만히 앉아서 내공만 수련했을 뿐인데 저절로 몸이 좋아지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했다.

조서인은 겉으로 보이는 체형부터 달라졌다.

본래는 팔다리가 길쭉길쭉하여 살짝 마른 듯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온몸에 붙은 근육들이 꽃봉오리가 만개하듯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극한으로 쥐여짜이기만 하던 조서인의 근육들이, 이제야 여유를 갖고 제대로 된 영양분을 받으며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효과는 극적이었다.

조서인은 내부에서부터 힘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천 근 바위를 내던질 수 있을 것 같은 활력감이 온몸에 팽배했다.

그때 조서인은 깨달았다.

그렇구나.

쉬는 것도 수련이구나.

수십 년 동안이나 빠져 있던 수련 강박에서 벗어나는 순간 조서인은 새로 태어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한 번 효과에 대해 확신하고 나니 그 후에는 일사천리였다.

조서인은 매일 아침이면 햇볕이 잘 드는 방 안에 앉아서 마음을 풀고, 자연스레 호흡에만 집중했다.

들이쉬고 내쉬고.

세상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몸속에 깃든 뜨거운 용(龍)의 정화를 몸속의 기운과 동화시킨다.

석 달이 지났을 때.

어깨도 넓어지고 가슴도 두꺼워져서 완전히 골격이 달라진 조서인은 사흘간 눈을 뜨지 않는 무아지경을 경험했다.

“한동안 눈이 부실 만큼 내공이 막강해 보였는데 이제는 무공을 익힌 것 같지도 않네요? 반박귀진이에요. 서인 오라버니는 이제 화경(化頃)에 올랐네요. 놀라워요. 이렇게 젊은 사람이 화경에 오르다니. 처음 봐요.”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 중에서도 선택받은 일부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화경이었다.

팽자연은 자연과 동화된 도인처럼 차분해진 조서인을 동경과 열망을 담아 바라봤다.

“고맙습니다. 이게 다 자연 누이 덕분입니다.”

“당연히 도와야죠. 식욕은 줄었어요? 한동안은 장정 너댓 명만큼 먹었었는데 요즘 통 안 먹어서 걱정이에요.”

“몸이 완성되었나 봅니다. 이제는 예전처럼 그리 식욕이 크지 않네요.”

조서인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동안 자신이 그렇게 게걸스럽게 먹어 댔나 싶어서 반성하게 되었다.

“아쉽네요. 많이 먹을 때가 좋았는데. 주방에서 고기를 다듬는 양이 줄어서 좀 섭섭해요.”

“예? 저는 하인들이 고기를 다듬어 주는 줄 알았습니다.”

“발골도 꽤 재밌더라고요. 도법을 응용할 방법을 찾아가는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서인 오라버니가 먹는다고 생각하니까 힘이 났고요.”

팽자연은 씩 웃으면서 작은 소도를 손에 쥔 것처럼 허공을 쉭쉭 긋는데 그 손놀림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일이 많았을 텐데.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럼 식욕이 줄었으니 약탕과 맹호환만 가지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부드럽게 웃으며 주방으로 돌아가는 팽자연을 보면서 조서인은 머리를 긁적였다.

쑥스러우면서도 기쁘다.

매일매일 발전하는 무공만큼 팽자연과의 친분도 깊어진다.

조서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충실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

“이건 뭐,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구나.”

반년 만에 만난 추룡은 여전히 느긋한 한량 같으면서도 사내다운 매력이 물씬 풍겨 나왔다.

코를 가로지르는 흉터를 꿈틀거리며 웃는 모습에선 천진함까지 느껴졌다.

여전하다.

추룡은 여전히 조서인이 닮고 싶은 멋진 사내였다.

“좋아 보인다. 사내다워 보이는구나.”

“숙부님과 간 선생 덕분입니다.”

“안 그래도 간 선생이 구명환을 선물로 보냈다. 다음부터는 다치면 끙끙 앓지 말고 곧바로 챙겨 먹으라더구나.”

“이런 귀한 걸.”

아직 구명지은에 대해 보답도 못했는데 또다시 귀한 단약을 받고 말았다.

당황하는 조서인에게 추룡이 그러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값은 내가 과하게 치렀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용의 내단도 삼분지 일은 가져간 셈이고. 내가 하도 큰돈을 주니까 자기도 너무 받아먹었다 싶었는지 구명환 하나 덤으로 던져 준 것뿐이야. 부담없이 필요할 때 쓰도록 해.”

말은 그렇게 하지만 간옹은 신의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항간에선 황실에서 그를 궁에 들이기 위해 천금을 들여 찾는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다.

그러니 돈을 주고도 못 사는 단약을 얻는다는 건 그렇게 ‘덤’으로 취급될 일이 아니었다.

‘내가 부담을 가질까 봐 그러시는구나. 여전하시네.’

조서인은 추룡에게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럼 간 선생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숙부님께도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큰돈을 저를 위해 써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숙부님.”

“별말을. 가족끼리는 그런 말을 하는 거 아냐.”

추룡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씩 웃을 뿐이다.

“그리고 돈은 뭐, 여기서 돈 자랑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추룡의 시선이 조서인의 등 뒤를 향한다.

팽자연이 웃는 얼굴로 총총 다가와 추룡과 조서인에게 차를 한 잔씩 내려놓았다.

“서인 오라버니는 찻물에 홍삼이랑 비위에 좋은 초두구를 섞었어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초두구는 맵지 않습니까?”

“몸에 좋은 거니 참고 드세요. 비위가 좋아져야 식욕도 많아지고 몸도 더 건강해지는 거라고요.”

조서인을 챙기는 팽자연의 모습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추룡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팽 소저는 이번에 여기서 정양하면서 돈이 얼마나 들었나?”

“저요? 으음, 계산을 해 봐야 알 것 같아요. 어차피 저는 본가에 요청만 할 뿐이라서 잘 모르겠네요. 궁금하시면 알아봐 드릴까요?”

약재와 음식을 산더미처럼 들여왔는데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계산도 안 했다는 뜻이다.

추룡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아니, 그거면 대답이 됐어. 이것 봐라, 조카야. 가족끼리는 돈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그냥 주고 싶은 만큼 주는 기쁨도 있는 거다. 안 그런가, 팽 소저?”

“지당하신 말씀이세요.”

한마디로 조서인과 팽자연을 가족이라 묶은 건데, 조서인은 얼굴을 붉혔고 팽자연은 오히려 기쁜 얼굴로 생글생글 웃었다.

“오히려 섭섭하구만. 난 팽 소저처럼 마음 편히 돈 받을 사이가 아니라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추룡은 조서인이 쩔쩔매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다. 몸은 사내다워졌는데 아직 내면은 여전하구나. 오히려 기꺼운 일이다. 항상 그 선한 내면은 변치 않았으면 좋겠구나.”

“……예.”

“오랜만에 온 만큼 즐거운 소식을 가지고 왔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네가 정양을 취하는 동안 밖에선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천지가 개벽하는 수준의 변화지.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닌 듯 싶어서 너를 찾아왔다.”

“말씀해 주십시오. 숙부님께서 좋은 소식을 전하든 나쁜 소식을 전하든, 저는 항상 반갑게 맞이하겠습니다.”

사부의 의형제.

추룡 숙부를 존경하는 꾸밈없는 진심이 전해졌다.

추룡은 흐뭇해하며 기뻐했으나 이내 이어질 이야기의 무게감만큼이나 진중하게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소호의 이야기다. 천무련은 적양문과 크게 대립하게 되었다. 정사대전이 벌어질 거란 추측이 나돌고 있어. 특히 최근에 적양문의 고수인 나찰마도 정옥상이 청화도대를 이끌고 사천으로 기습을 했다더구나. 우리가 지나가며 봤던 그 사람이다.”

“숭산에서의 일이지요? 기억이 납니다. 태양염왕의 측근으로 커다란 칼을 지닌 사람이었지요. 강한 인상을 받았었습니다.”

“그래. 만만치 않은 자였다. 그 자가 정예 무인들을 이끌고 쳐들어왔으니 사천의 판도가 뒤바뀔 거야.”

추룡은 잠시 말을 멈추고 망설이고 있었다.

소호.

그리고 사천.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조서인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괜찮습니다. 숙부님. 말씀하세요. 제가 짐작컨대 방익지, 그자에 대한 이야기겠지요?”

문주희의 원수.

소호가 막아서 원수를 갚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팔을 하나 날렸기에 그걸로 위안을 삼고 있었던 자였다.

추룡은 감탄하며 순순히 수긍했다.

“그래. 맞다. 방익지에 대한 이야기다. 천무련은 문주희의 일을 조용히 묻었다. 방익지는 과거의 연정 때문에 눈이 돌아간 낙일창에게 오해를 받아 팔이 날아간 사람이 되었고, 신묘한 의수를 단 채 강호 무림에 복귀했다. 비각(祕閣)이라는 천무련의 새로운 자리를 맡아 각주로 승진까지 되었어.”

“으음.”

“그놈이 사천 싸움터의 책임자가 되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다. 소호 녀석이 바라보는 목표가 어딘지 몰라도, 그렇게 의를 저버리면 지지를 받을 수가 없어. 실제로 천무련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해서 자기들끼리 갈라지는 중이다. 내분이 일어날지도 몰라.”

조서인은 설마했던 일이 벌어진 것을 확인하자 착잡해졌다.

대체 어째서 그렇게 된 것일까?

분명 이유는 있을 거다.

소호는 이유 없이 그런 짓을 할 친구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화가 난다.

꼭 그래야만 했는가?

친구였던 문주희를 죽인 자를.

처벌하기는커녕 북돋아 주면서 승진까지 시키다니.

“옳지 않은 일입니다.”

“묻겠다. 조카야. 너의 복수는 끝난 건가? 아니면 아직도 진행 중인 것인가?”

조서인은 고민했다.

앉은 자리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예전에 무산학관에서 공부할 때 읽은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지?”

“사지물거 거즉다위(思之勿遽 遽則多違) 사지물심 심즉다의(思之勿深 深則多疑).”

“생각을 하되 급하지 말라. 급하면 일이 어긋난다. 생각을 하되 너무 깊게 하지 말라. 생각이 깊으면 의심이 많아진다?”

“예.”

급하면 일이 어긋나는 법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깊게 하면 의심만 많아질 뿐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는 법이다.

조서인은 고민했고, 너무 깊게 하지 않고 마음이 가는 쪽으로 결정했다.

“복수를 끝마치겠습니다. 그게 친구였던 주희에 대한 저의 의리입니다.”

마음을 정한 조서인이 반년 만에 다시 창을 잡는다.

깊은 휴식에서 깨어난 용이 사천 땅, 방익지가 있는 곳을 바라본다.

사천 땅을 넘어 강호 무림에 휘몰아칠 태풍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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