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2화
제44장 사천거화(四川巨花) (2)
아미산 금정봉(金頂峰) 복호사(伏虎寺).
장문인인 정허는 늘 일어나던 새벽녘에 일어났다.
늙으면 새벽잠이 없어진다고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까지 일찍 깨어나는 것은 아니며 젊은 시절 같은 정력이 갑자기 용솟음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정신만 번쩍 깨어날 뿐 노쇠한 몸은 엿가락처럼 축 늘어져서 간단한 움직임에도 무릎이 삐걱이고 근육이 욱신거렸다.
짝. 짝.
정허는 자신의 뺨을 스스로 두어 번 두드린 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손안에서 염주를 굴렸다.
그녀가 아침마다 하는 묵상의 시간이다.
묵상법은 간단했다.
백팔 개의 염주는 백팔 개의 번뇌를 상징하니 염주 하나를 굴릴 때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하나의 번뇌를 떠올리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 정허의 묵상이었다.
달그락거리는 염주가 움직일수록 정허의 얼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백 년 가까이 살아온 사람이 왜 모르겠는가?
그녀는 죄를 많이 지었다.
아미파를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정파답지 않은 온갖 일들을 밀어붙였다.
백수를 누릴 때까지 장문인 자리를 내려놓지 않은 것 또한 노욕이라 불려도 마땅하다.
자신의 죄를 모르지는 않으나, 앞으로도 아미파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가시밭길도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정허다.
어긋난 신념.
사특한 행위를 대의로 포장한 위선이었다.
‘이 죄는 그 누구에게도 물려주지 않는다. 내 대에서 끝낼 것이야.’
대략 절반 정도의 번뇌를 살폈을 때 정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요해야 할 새벽녘 아미산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장문 제자인 금정이 다급하게 정허의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장문인! 괴한들이 나타났습니다!”
금정사태가 평정심을 잃고 있었다.
정허는 염주를 내려놓고 물었다.
“괴한이라니? 대체 누가 왔길래 이러느냐?”
“사파인이며 큰 칼을 씁니다. 적양문으로 보입니다!”
“뭐라고?”
정허는 크게 놀라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적양문이 아미산에 올 때까지 왜 아무도 몰라!”
“천무련에게서도, 개방에서도 경보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금정은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깨물다가 말했다.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원인을 따져야 무얼 하겠습니까? 싸워야 합니다. 제자들을 모아 항마복룡진(降魔伏龍陳)을 준비하겠습니다. 장문인께선……. 아직 계를 받지 못한 어린 제자들을 이끌고 천무련으로 향해 주십시오.”
“마음 놓고 싸우기 위해 어린 제자들을 대피시키겠다는 것이구나. 그런데 금정아. 아무리 위급해도 갈 곳이 있고 아닌 곳이 있는 법이다. 그간의 상황이 있었는데 천무련으로 우리가 갈 수야 있겠느냐? 지금은 소림으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구나.”
“장문인!”
평소라면 얌전히 대답하며 예를 지켰을 금정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거친 절규에 그간의 한이 담겼다.
“저는 지금 멸문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림이 복수를 해 줄 것 같아요? 아니요! 그들은 불제자답게 아픔을 견디고 다음을 위해 일어서라고 하겠지요.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무림맹뿐입니다. 지금의 무림맹인 천무련에 가셔야 한다고요! 그래야 우릴 위해 복수해 줄 것 아닙니까!”
금정 역시도 정허의 제자였다.
인내보단 복수를.
겸허함보단 과감함을 좋아한다.
“넌…….”
정허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말문이 막힌 그녀가 멍하니 자신의 제자인 금정을 바라본다.
금정은 이미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말하고 있었다. 그 격정과 열정을 정허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린 제자들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장제자들이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는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흘흘, 그렇구나.”
“장문인. 보중하십시오. 떠나실 준비는 제가 해 두겠습니다.”
결연한 얼굴의 금정이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장문인?”
“어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느냐? 천무공자가 북경으로 적양문 사람들과 회담을 하러 간다고.”
“예? 아, 예. 그랬습니다. 적양문에서 뒤를 노린 듯합니다.”
“그게 아니다. 이게 그 대가인 모양이야.”
“억측……이 아닌지요?”
“글쎄다. 백 살이나 먹어 가면 때론 그냥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단다. 흘흘, 천무공자여.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로고.”
정허는 클클 웃더니 품 안에서 옥으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장문령부를 금정에게 내밀었다.
“장문령부를 어째서 제게 주십니까?”
“네가 지금부터 아미파의 장문인이다.”
“……!”
“조사령패를 앞에 두고 의식을 해야겠으나 시간이 없구나. 흘흘, 아마 사문의 어르신들도 이해해 주실 것이다.”
이미 모두가 죽어서 땅에 묻힌 사문 조사들이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정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미파는 원강이를 지지하거라. 끝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물론 그리 할 것입니다.”
“내가 남을 것이다. 너도 속으로는 알고 있지 않으냐. ‘어린 제자’들이 살아남아야 아미파의 장제자들이 마음껏 싸울 수 있다. 네가 말한 이야기야.”
“장문인……!”
정허가 지칭하는 어린 제자는 금정을 뜻했다.
금정은 난생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흘흘, 난 무슨 고귀한 희생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생각도 없다. 다만 여기서 아미파의 업을 끊는 게 옳으니 그리 할 뿐이다. 내가 사는 게 아미파를 위해 더 도움이 되었다면 그리 했을 것이야. 금정아,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아미파가 명분이 있으려면 내가 아니라 네가 살아야 해.”
정허는 주름진 눈매를 더욱 사납게 끌어 올리며 엄격한 시선을 보냈다.
“이 세상엔 비구니들을 우습게 보는 놈들 천지다. 독해지거라. 잔인하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험한 강호 무림에서 아미의 목표를 이루거라. 알겠느냐?”
“장문인……!”
정허의 결심이 굳건함을 깨달은 금정이 몸을 던져 절을 올렸다.
“장문인의 말씀을 잊지 않겠습니다!”
한때는 정허가 행하는 정파답지 않은 수많은 악행에 노괴물이라며 속으로 욕도 많이 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금정은 깨달았다.
복호사에 백 년 가까이 살아오던 괴물은 아미파를 상징하는 사람 그 자체였음을.
사리사욕이 아니라 아미파를 위해. 어긋난 신념으로 어떻게든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한 사람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장문인께선 옳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그리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독해지겠습니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생존해야 한다.
금정은 아미파가 지닌 중요한 땅문서와 전표, 무공 비급들을 이대 제자들에게 챙기게 한 뒤 복호사의 뒷길을 통해 내려갔다.
정허는 늙은 나무처럼 주름진 얼굴로 항마후(降魔吼)를 펼쳐 일대 제자들을 대웅전 앞에 집결시켰다.
“사도의 마인들을 상대로 항마복룡진(降魔伏龍陳)을 펼칠 것이다. 아미의 제자들은 모두 준비하라!”
상명하복에 철저한 아미파의 승려들이 선장(禪杖)과 계도를 들고 싸움을 준비했다.
대웅전의 좌측.
이만 오천 근짜리 커다란 종이 매달려 있던 진경루가 불타올랐다.
뎅― 뎅―.
땅에 떨어진 동종이 슬피 우는 듯했다.
높이가 구 척이 넘는 종이 땅에 떨어질 정도면 현판이 박살 났을 것이다.
악적들은 아미파의 정면으로 오지 않았다.
가파른 산을 타고 올라 곧바로 옆에서 대웅전을 찔러 왔다.
“이거, 나이 지긋한 노선배님이 계실 줄은 몰랐소. 골방에 들어가 있거나 도망쳤어야 하는 것 아니오?”
일백오십 명에 달하는 사내들이 일사불란하게 다가왔다. 검은색 무복에 푸른색 수실로 불의 문양을 새긴 사내들이다.
거구는 아니지만 뼈대가 아주 굵은 강골.
험악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커다란 대도를 등에 맨 채 성큼성큼 선두에서 다가왔다.
“그대가 최근에 명성이 자자한 사파제일도 나찰마도인가 보군. 소문대로 험악한 인상이야.”
“그렇소. 아미파의 노괴, 정허 사태. 노선배도 소문대로 늙고 추레하기 짝이 없구려.”
나찰마도 정옥상은 한마디도 지지 않고 거칠게 되받아쳤다.
적을 내려치는 큰 칼처럼, 적을 상대하는 데 있어 단순하고 위력적인 인물이 나찰마도 정옥상이다.
정허는 코웃음 치며 되물었다.
“사파 놈이 입도 험하구나. 그래. 이렇게 갑작스레 쳐들어와 불문 사찰의 현판을 불태우다니. 삼생에 걸쳐 지옥에서 벌을 받을 만큼 용서받지 못할 대죄를 지었구나. 아이야. 너는 그 죄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감당 못할 것이 뭐 있겠소? 내 도법 이름부터가 구천지옥도요. 까짓거 지옥 따위 가면 되지.”
“미련한 중생이여. 지금이라도 되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우리 아미의 항마복룡진은 너희 사파 놈들을 물어뜯고도 남을 것이다.”
“크핫! 재미있군. 그건 나한테 겁을 주려는 것이오? 아니면 오히려 호승심을 느끼라고 하는 말이오?”
정옥상은 큰 소리로 웃었다.
나찰마도를 따르는 청화도대의 사내들도 정옥상을 따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미파 따위는 어서 불태우고 천무련 놈들을 쳐야 하니 시간 낭비하지 않겠소. 비구니 늙은이.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소. 절은 다 불태우겠지만.”
나찰마도 정옥상은 마치 제발 항복하지 말라고 기원하는 듯한 제안을 했다.
당연히 분기탱천한 아미파의 승려들이 전의를 가다듬었다.
“아미파의 정신이 담긴 곳이 이곳 복호사다. 너희 사파의 불경한 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으나, 태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보시오. 노인. 내가 사파에서 구르다 보니 정말로 공명정대한 인간이랑 그렇지 않은 인간을 구분하거든? 그런데 당신은 공명정대한 쪽은 아니야. 그러니 무슨 협객인 것처럼 잘난 척하는 말투는 그만두시오.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군.”
“뭐라고?”
“항복하지 않겠다면 무림인답게 최후를 맞으시오.”
이야기는 결렬되었다.
정허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아미파에 출진 명령을 내렸다.
“항마복룡진을 펼쳐라!”
아미파의 일대 제자들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항마승들이 일사불란하게 진법을 펼쳤다.
딱딱하게 정면을 막는 듯하다가도 원형으로 거리를 벌렸다가, 다시 좁히면서 항마복룡진 안으로 끌어들이는 수법이 능수능란했다.
채채챙!
무기와 무기가 부딪쳤다.
커다란 칼과 선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우습구나. 보아라! 이것이 사파제일도, 나찰마도의 구천지옥도법이니라!”
청화도대와 항마승들만의 대결이었다면 그리 쉽게 승부가 나진 않았을 테지만, 나찰마도 정옥상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해지고 있는 사파 최고의 칼잡이였다.
제일 초식 양천지로(陽天指路)로 시작된 패도적인 도법이 선장과 계도를 든 아미승들을 무참히 베며 진법을 망가뜨렸다.
“안 된다!”
아미파의 장로 세 사람과 함께 앞으로 나선 정허가 한 손으로는 선장으로 대복마불장(大伏魔佛杖)을 펼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과 표설천운장(飄雪穿雲掌)의 장력을 은밀하게 띄워 보냈다.
백수가 넘게 강호 무림에 몸담은 그녀는 패도적이지는 않지만 능수능란하고 날카로웠다.
그러나 현역으로 최고의 칼잡이 소리를 듣는 나찰마도는 막강하다.
아미파 장로 세 사람의 복호장법을 일도에 패퇴시킨 뒤, 불길을 뿜어내는 듯한 도강으로 정허의 선장을 반으로 잘라 버렸다.
푸화악―!
피 분수가 뿜어진다.
버틴 것은 고작 십여 초 정도.
고목 나무처럼 주름진 정허의 오른팔이 허공에서 잘려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장문인!”
아미파의 제자들이 절규했으나 나찰마도의 칼은 멈추지 않았다.
구천지옥도법.
동북방에 떠오른 달처럼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변천망월(變天望月) 초식이 정허의 허리를 가르며 옆으로 뻗어 나갔다.
“큽.”
정허가 피를 뿜는다.
아미파의 산증인.
백수에 가깝게 아미파를 호령해 온 노괴가 그녀의 몸을 가른 나찰마도를 원망을 담아 노려보았다.
“아미파의 장문인이 고작 이 정도라니. 정도의 힘이란 참으로 나약하구나.”
나찰마도의 비웃음이 정허의 자존심을 박살 냈다.
정허는 그간 무엇을 위해 그리도 악행을 서슴지 않았던가.
“추하다. 늙은이야. 떠나야 할 때를 모르는 자만큼 추한 게 어디에 있던가?”
나찰마도의 커다란 칼날이 정허의 목을 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