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34화 (663/686)

22권 3화

제44장 사천거화(四川巨花) (3)

사천으로 향하던 조서인이 아미파의 참사를 들은 것은 동행하는 팽자연 덕분이었다.

중간에 들른 객잔에서 팽자연은 특유의 당당한 사교성을 발휘해 인근의 소식을 꿰고 있는 점소이에게 요즘 별일이 없냐고 물었다.

“적양문에서 실력 좋은 칼잡이들을 잔뜩 보내서 사천 땅이 아주 난리입니다. 아미파 장문인이 죽고 복호사가 불탔다고 하는데, 아이고!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거 큰일이네요. 자세히 좀 말해 주세요.”

“엇? 이렇게 큰돈을 주실 것까진 없는데, 아이고. 감사합니다. 소저, 복 받으실 겁니다. 크흠! 아미산은 불탔고, 장문인이랑 승려들이 잔뜩 죽었답니다. 어린 승려들은 천무련으로 피신했다고 하긴 하던데 어떻게 되었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사천 무림에 비상이 걸려서 사방이 난리지요. 그 무시무시한 당문의 녹풍대가 매일같이 뭘 찾는 것처럼 돌아다니고, 윗동네로 가면 청성파 도사들도 자주 보인답니다. 아! 천무련! 천무련에서 나온 무인들이 아미산 근처에 성채를 하나 쌓았다던데. 큰 싸움이 나는 건 아니냐면서 다들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점소이는 팽자연이 건넨 은자 하나에 귀한 정보들을 잔뜩 알려 주었다.

방익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가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꼭 필요한 정보였다.

“고맙습니다, 자연 누이. 덕분에 헛걸음하지 않게 되었어요. 아미산 근처에서 천무련의 성채를 찾아보면 될 것 같습니다.”

다른 볼일이 있다며 동행하지 않은 추룡의 빈자리를 팽자연이 멋지게 채워 주고 있었다.

그녀는 조서인의 생각보다 더 영리했고, 사람을 다루는 솜씨가 좋았다.

팽자연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옛 정인의 복수라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왕 가는 거 헛걸음은 안 해야 하니까요. 괜찮아요.”

옛 정인이라니.

말투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혹시 기분이 상했나 싶어 팽자연의 안색을 살피니 그녀는 장난스레 웃는 얼굴이다.

“어…… 음…….”

“농담이에요, 농담.”

조서인은 얼굴이 붉어졌다.

“으음, 그게, 어, 미안합니다.”

“뭐가 미안해요?”

“그냥,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따라와 주는 것도 고맙고……. 으음, 그냥 다 미안합니다.”

“미안해하지 마요. 제가 좋아서 따라온 건데요. 혹시 내가 괜히 따라와서 귀찮은 것 아니에요? 혼자 가면서 옛 정인을 추억하고 그래야 하는데? 남자들은 우울해하면서 분위기 잡는 그런 거 좋아한다면서요?”

“예? 아니, 그런 거 아닙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우리 큰 오라버니가 그랬어요. 남자들은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혼자 쓸쓸해하면서 분위기도 잡고 그래야 한다면서요?”

“……그런 면도 있을 수 있겠군요.”

차마 팽자연의 오라버니가 한 말에 딴지를 걸 수 없었던 조서인은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두루뭉술하게 넘겼다.

팽자연은 조서인의 그런 기색을 알아채고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면 아니라고 해도 돼요. 괜히 맞춰 줄 필요 없어요. 서인 오라버니는 그런 거 잘 못하잖아요?”

“노력하면 안 되는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그거 위험한 말인데? 그러다가 내가 자꾸 서인 오라버니가 뭐든 노력할 거라 기대하면 어떻게 해요?”

“더 노력하면 되지요.”

단순하고 단호한 대답이다.

여인의 마음을 알아주는 능수능란함은 없지만, 꾸밈없이 솔직한 마음이 목소리로 다 전해진다.

팽자연은 눈에 띄게 밝은 웃음을 지었다.

“걱정 마요. 그런 거 기대 안 해요. 이미, 멀리 떠난 여인을 왜 질투하겠어요.”

“어……. 음, 예.”

“오히려 강단이 있고 의리가 있는 사내라서 더 좋아요. 제가 혹시 악적한테 당하더라도 복수해 줄 거죠?”

팽자연은 장난스럽게 물었지만 조서인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문주희가 그의 품 안에서 숨이 멎는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조서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결의를 담아 말했다.

“그런 일이 없도록 지킬 겁니다.”

“고마워요. 그거면 됐어요.”

빙긋 웃는 팽자연의 말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조서인은 다시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녀가 그에게 호감을 보인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지난 육 개월간 지극정성으로 자신을 돌봐 준 여인인데 어찌 그걸 모를까.

그런데 조서인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수백 명의 마적 떼에 둘러싸인 채 싸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고맙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요. 저야말로 고마워요. 이 중요한 여정에 따라올 수 있게 해 줘서.”

“……잊지 않겠습니다.”

“그건 좋네요.”

두 사람은 나란히 정면을 보며 흔들리는 말 안장을 붙잡았다. 말들은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알아서 큰길을 따라 아미산을 향해 나아갔다.

부드러운 침묵이 흘렀다.

화창한 햇볕이 비추는 두 사람의 귀는 둘 다 똑같이 붉어져 있었다.

***

“낙일창 대협께 드릴 말씀이 있소.”

아미산 산자락이 한눈에 들어올 때쯤 길목을 지키는 한 떼의 사내들과 마주쳤다.

숫자는 열 명.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수풀에 숨어 있는 숫자까지 합하면 스무 명가량의 인원이었다.

가장 앞에 나와 있는 사람은 어깨가 넘는 긴 머리를 풀어헤친 중년의 사내였는데, 체구는 보통인 데다 얼굴이 창백해서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변을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힐끔거리는데도 안색 한 번 바뀌지 않고 오로지 조서인만을 바라보았다.

“상대를 청하려면 자신의 이름부터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요?”

팽자연의 목소리는 조서인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냉랭하게 날이 잔뜩 서 있었다.

중년의 사내는 그녀에게도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팽가의 여협께서 하시는 말씀이 옳소. 아마 조 대협께서는 저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예전에 만난 적이 있어서 인사를 망설였으니 부디 이해를 부탁드리겠소.”

“이해가 안 되네요. 안면이 있는 사이면 더더욱 먼저 통성명을 해야죠?”

“그것이…….”

중년의 사내가 뭐라 말을 하기 전에 조서인이 먼저 앞으로 나서며 팽자연을 말렸다.

“잠시 기다려 줘요. 자연 누이.”

“네? 으음, 알겠어요.”

“제가 불민하여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분명히 안면이 있습니다. 혹시 낙양에서 저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소. 어린 시절에 만났었는데도 기억을 해 주시는군. 화인지라고 하오.”

“화인지……!”

조서인은 잠시 그 이름을 곱씹어 보다가 번뜩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무산학관을 다니며 소호와 함께 했던 모험 중에서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사건이 하나 있다.

대미미의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하오문 낙양지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공진표라는 이름의 걸출한 낙양 지부장이 있었고, 그를 따르는 심복 삼인조가 있었다.

홍원, 장광, 화인지.

화화공자처럼 생긴 홍원, 짱돌처럼 단단한 몸을 자랑했던 장광, 그리고 마지막이 약간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며 과묵했던 화인지라는 사내다.

“낙양의 공 지부장님 밑에 계시던 분이었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조서인이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자 화인지와 그 뒤에 있던 사내들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더욱 허리를 굽혔다.

“기억해 주니 고맙고 영광이오. 워낙 대협의 명성이 높아졌기에 과거의 작은 기억은 다 잊어버렸을 거라 생각했소.”

“그럴 리가요. 그때 낙양에서 저희를 많이 도와주셨지 않습니까?”

“그리 말해 주니 고맙소.”

“그런데 옛 인연은 반가우나 인사를 하러 오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조서인은 정중하면서도 여유가 있었다.

그는 이제 어수룩하고 어린 티를 벗어 던졌다. 여전히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웃는 얼굴에서 이제는 관록마저 보인다.

완벽히 조화를 이룬 내공과 경지에 도달한 무공.

주변을 둘러보는 조서인에게서 절로 흘러나오는 존재감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이건…… 정말, 못 알아보겠군.”

화인지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조서인은 머뭇거리는 그에게 재차 질문을 던졌다.

“화 대협, 무슨 일로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화인지는 머뭇거리다가 겨우 마음을 다잡고 대답했다.

“거화신녀께서 찾으시오. 조 대협을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소.”

“거화신녀? 아! 혹시 미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무산철공주 대미미.

하오문과 기녀들에게는 거화신녀라고 불린다고 알고 있었다.

조서인은 의문에 빠졌다.

갑자기 대미미라니.

물론 반가운 이름이고 안 만날 이유가 없지만 작금의 상황은 그리 자연스럽지 않았다.

“반가운 인연이긴 합니다만, 친구를 부를 만한 분위기가 아닌 듯하니 이상하군요.”

조서인은 관도 근처의 수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심중을 알아챈 화인지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오해는 하지 마시오. 조 대협을 경계해서가 아니오. 애초에 낙일창을 상대로 우리 같은 자들이 스무 명이 있어 봤자 의미가 없지.”

무인으로서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말일 텐데도 화인지는 거침이 없었다.

낙일창의 명성이 그 정도로 높아졌기 때문인지.

화인지는 물론이고 그의 부하들도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저 지금 사천의 분위기가 흉흉해서 호위로 준비한 것뿐이오. 불쾌했다면 사과하겠소.”

“아니, 아닙니다. 괜찮아요.”

조서인은 과할 정도로 정중한 화인지의 태도에 내심 당황했다.

조서인은 모른다.

그가 의문을 가질 때 어떤 기도를 뿜어내는지.

완성된 무인으로서 절로 우러나오는 패기가 얼마나 상대를 주눅 들게 하는지는 아직 조서인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연 누이, 아무래도 잠시 들렀다 가야겠습니다.”

팽자연은 고민도 않고 대답했다.

“좋아요. 대신 그 미미라는 여인이 누군지 자세히 말해 줘요.”

“당연히 다 말해야죠.”

“그럼 됐어요. 가요. 우리.”

서로 간에 웃는 모습에 신뢰가 가득했다.

화인지는 그 모습에 또 한 번 놀라면서도 묵묵히 두 사람을 관도 너머 샛길을 통해 안내했다.

아미산 금정봉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언덕 위에 커다란 천막이 있었다.

북방 유목민족의 게르 같기도 하고 비단길 너머 사막 민족의 것 같기도 한 새하얀 천막이었다.

사람 키의 서너 배가 넘는 높은 기둥을 하나 세우고 그 주변을 둥그렇게 돌아가며 그보다 낮은 기둥들을 세운 뒤 가죽 천으로 연결한 모습이다.

식사를 위한 불과 탁자, 잠을 청할 수 있는 푹신한 침상과 두툼한 가죽까지. 없는 게 없다.

조서인은 웬만한 객잔보다 더 화려한 천막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곳을 지키는 열 명의 사내들에게 세워졌다.

“오랜만이군. 서인.”

“전상.”

거구의 사내였다.

은자촌에서 대석이라는 거대한 사내를 본 적이 있는 조서인의 눈에도 크다고 느껴질 만큼 골격과 체구가 컸다.

칠 척에 가까운 키에 커다란 불곰이 눈앞에 있는 것 같은 단단한 근육까지 갖췄다.

턱은 사각형으로 각이 졌고 하관에는 장익덕처럼 밤송이 같은 거친 수염이 한가득이다.

“십걸이 여전히 있어?”

“물론이다. 무산철공주를 모시고 있지.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을 하겠나.”

용(勇) 시험 수석이 대미미였다면 차석이었던 사람이 전상이다.

무산학관에서 유난히 대미미를 추종하던 사내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용 시험 합격자이며 외공을 연마해 호걸다운 용력을 뽐내는 자들이다.

전상.

그리고 그 외의 구인.

통칭 십걸이라 불리는 사내들은 놀랍게도 지금도 대미미의 주변을 지키며 함께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오랜만이네. 미미가 불렀다고 들었는데.”

“이야기는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친분이 있는 사이라도 창은 받아 둬야 할 것 같은데.”

짙은 눈썹과 퉁방울처럼 툭 튀어나온 눈이 약간의 긴장을 담아 조서인을 바라본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무기를 뺏어요?”

팽자연이 마음에 안 드는 듯 톡 쏘듯 말했지만 전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상대를 하기 싫은 것 같기도 했고, 그저 과묵한 사내 같기도 했다.

팽자연이 발끈하려는 순간 조서인은 별말 없이 창을 내밀었다.

“서인 오라버니?”

“괜찮습니다. 그리고 창이 손에 없더라도 제 마음속엔 창이 있습니다.”

심즉창, 창즉심.

조서인이 편안하게 하는 말에는 무중생유(無中生有)의 묘리가 들어있었다.

창이 손에 없다면 또 어떠한가.

조서인에게는 창이 있는 것과 똑같이 무공을 쓸 수 있는 것을.

“과연, 낙일창이다.”

전상은 감탄하며 정중하게 창을 받아 나머지 십걸들에게 건넸다.

팽자연에게도 협도를 회수한 그들이 천막 안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조서인은 그곳에서 탁자에 앉아 있는 대미미와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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