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36화 (665/686)

22권 5화

제44장 사천거화(四川巨花) (5)

아침에 피어나 저녁에 지는 나팔꽃처럼, 인생을 화려하게 수놓는 부귀영화는 얼마나 허무한가.

방익지는 검은색 오철로 만든 자신의 의수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인생의 허망함을 되새겼다.

자신이 사천의 왕이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미파는 그의 돈줄에 불과했다. 사천 암흑가는 자신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고 천무련에서 월봉이나 받던 시절과 비교하면 천문학적인 돈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돈이란 참 요망한 물건이다.

없을 땐 몰랐는데 막상 품 안에 거금이 생기니 뭐든지 가능할 것 같은 전능감을 줬다.

그가 매달 벌어들이는 돈이면 수백 명의 사내들을 최고급 무기와 갑주로 무장시킬 수도 있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원래의 그라면 그냥 기분만 좀 상하고 넘어갔을 금룡각주의 무례함을 간단히 넘기지 못했다.

돈과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있던 방익지에게는 금룡각주의 무례가 너무나 큰 죄악이었던 탓이다.

“지금 이게 최후의 기회인가?”

황산의 낭인 출신.

밑바닥을 전전하다 아득바득 기어올라 천무련의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건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데는 고작 하루면 충분했다.

‘련주님은 여기서도 실패하면 나를 용서하지 않으시겠지.’

그는 자신을 사천으로 다시 보낼 때 보았던 장소호의 냉정한 눈빛을 기억한다.

사천에서 ‘혹시 모를 적양문의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한 임무다.

방익지에 대한 처벌은 없었고 직위는 오히려 진급하여 높아졌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고 느꼈다.

“각주님. 성채 보수는 끝났습니다만……. 괜찮으십니까?”

방익지의 심복 감광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콰직.

방익지의 의수에 잡혀 있던 나무잔이 도끼로 내려친 것처럼 박살이 났다.

방익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면서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괜찮아. 괜찮아. 아직 의수가 익숙지 않아서 그렇다. 이게 생각보다 힘이 너무 세네.”

새카만 오철로 만들어진 손가락의 안쪽에는 종이도 자를 것 같은 날카로운 칼날들이 붙어 있었다.

오로지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의수였다.

잡히는 모든 것을 찢어발길 것 같은 모습이 지금 방익지의 심정과 딱 맞았다.

“아프지는 않으십니까?”

“당연하지. 이게 쇳덩이긴 한데 안쪽에는 소가죽을 덧대어서 생각보다 편안해. 아무리 봐도 너무 신기하군.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는지 궁금할 따름이야.”

“역시 천무련입니다. 이런 신묘한 물건도 만들어 내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감광이 하는 칭찬에 맞장구를 칠 수 없는 것이 방익지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 그렇군.”

그는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끼릭― 끼릭― 소리가 나는 의수를 이리저리 매만졌다.

“청죽조는? 싸울 준비가 되었나?”

“예. 미리 훈련도 시켰고, 만약 적양문 놈들이 다가오면 함정을 어떻게 작동시키는지도 교육시켰습니다. 전의가 가득합니다. 다들 이 싸움만 이기면 큰 상을 받을거라면서 기대하고 있어요.”

“좋아. 우린 여기서 전쟁을 한다.”

“예!”

“감광, 알고 있겠지만 이 싸움에 내 모든 것을 걸었어. 목책이랑 함정을 파는 데 든 돈, 천무련의 돈이 아냐. 다 내 돈이다. 알고 있지?”

“잘 압니다. 무기와 갑옷, 암기도 다 각주님 돈으로 사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물었습니다만…….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돈이야 나중에 또 벌면 돼. 그런데 이 싸움에서 지면.”

방익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침묵이 흐른다.

감광이 불안한 표정을 지을 때쯤 간신히 감정을 수습한 방익지가 말을 이었다.

“지면, 아마 나는 끝이다.”

“각주님…….”

이번엔 감광이 말문이 막혀 당황하다 비장하게 물었다.

“차라리 이대로 떠나시는게 어떻습니까?”

“떠나? 어디로 가라고?”

“사천에 기반도 있으니 암흑가에 제대로 자리를 잡으시면 어떻습니까?”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항상 함께 한 심복인 감광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방익지는 헛웃음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방익지는 단호하게 싹을 끊었다.

“정말로 흑도나 사파 놈들이 되라고?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감광, 우린 암흑가 놈들을 잠시 관리한 거야. 우린 사파 놈들이 아니라고. 천무련의 무인이 어떻게 암흑가에 몸을 투신해?”

“……예.”

“그리고 나 포기한 거 아니다. 내가 누군데? 이번에도 봤겠지만 어차피 천무련에서는 나 못 버린다. 청죽조의 형제들이 다 나를 응원해 주잖아? 흐흐, 걱정 마라. 아득바득 다시 기어올라가는 걸 보여 주마.”

방익지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것처럼 능글맞게 웃었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는 감광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품 안에서 서찰을 꺼내 감광에게 주었다.

“부탁 하나만 하자.”

“뭐든 말씀하십쇼, 각주님.”

“내가 잘못되면 넌 싸우지 말고 그냥 도망쳐. 그리고 사천에 있는 내 집에 가서 여월에게 서찰 좀 전해 줘라.”

“……!”

감광은 한참을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찰을 받아 들었다.

“이제야 좀 후련하네. 그럼 제대로 싸워 보자고.”

방익지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자신도 안다.

그는 악인이다.

동정을 받을 여지는 없다.

선을 넘었으니 어찌 돌아가겠는가? 천무련의 절반 이상이 그에게 실망했으니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는 글렀다.

“그래도 버틸 거다. 체면 좀 구긴 게 뭐 대수라고. 세상사가 다 그런 것 아닌가? 더러워진 몸으로도 아등바등 기어 올라가 주마.”

금룡각주 문주희?

똑같은 상황이 온다면, 방익지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선악 따윈 없다.

강자와 약자만이 있을 뿐.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진 방익지가 섬뜩하게 눈을 빛낸다.

그러나 천망회회(天網恢恢)라.

하늘이 펼친 그물은 넓고 엉성해 보이지만, 결코 그 그물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방익지의 업보.

그가 지은 죄의 대가가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콰아아앙!

“뭐야!”

“습격이다!”

“종을 울려라! 대문이 공격받고 있다!”

천무련 청죽조의 무인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황급히 뛰쳐나와 진형을 갖췄다.

감시망을 펼쳐 두었는데 아무런 기색도 없이 대문이 공격받다니.

보통 일이 아닐 게 분명했다.

무인들은 화살을 장전했고 미리 파 놓은 함정들을 활용하기 위한 인원도 배치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모두가 마른침만 삼키고 있던 바로 그 때, 성채 위에서 밖을 내다보던 사내들이 당황하면서 모두에게 소리를 질렀다.

“습격자는 하나!”

“습격자는 한 명이다!”

모두가 귀를 의심했다. 그들은 벙 찐 모습으로 서로를 되돌아보았다.

“뭐? 한 명?”

“내가 뭘 들은 거지?”

콰앙! 콰앙!

그사이에 통나무를 다섯 개나 덧댄 두꺼운 대문이 가뭄이 든 논바닥처럼 쩍! 하니 갈라지더니 날카로운 무언가가 뚫고 나왔다.

“창?”

은색으로 빛나는 창이 대문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다시 쑥― 빠져나갔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굉음이 한 번 울려 퍼졌을 때, 대문은 포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퍽! 하고 터져서 목책의 성곽을 뒤흔들었다.

구구구궁―.

쓰러지는 통나무들 사이로 뿌연 먼지가 피어오른다.

한 사람이 걸어온다.

젊은 청년.

팔다리가 길고 선한 인상을 지닌 청년이 은색 장창을 비스듬히 든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저자는 설마?”

“그때 봤던 그놈이잖아!”

낙일창 조서인.

당금 강호 무림에서 가장 주목받는 청년 고수 중의 한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

“저는 상황을 좀 더 알아볼게요. 그리고 혹시 상황이 어려워질 수도 있으니 퇴로도 확보해야겠어요. 서인 오라버니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 줘요.”

팽자연은 대미미와의 만남 이후 마음이 급해졌는지 본가의 지부에 다녀오겠다며 다급하게 말을 타고 떠났다.

조서인은 팽자연이 떠난 것을 확인한 뒤에 묵묵히 싸움을 준비했다.

양손에서 팔꿈치까지 촘촘하게 천으로 감고 허리에는 위급할 때 쓸 금창약과 구명환을 집어넣은 철 요대를 찼다.

가장 중요한 건 창이다.

은빛 창날을 기름 먹인 가죽으로 꼼꼼히 닦아 얼굴이 비칠 정도로 광을 냈다.

“자연 누이, 미안하지만 이 싸움은 혼자 해야겠어요.”

문주희에 대한 복수.

그 과정에서 혹시 모를 대미미와의 대립.

어느 쪽이든 조서인 혼자 감당하고 안고 가야 할 문제였다. 혹시라도 팽자연이 피해를 입는다면 그땐 조서인이 견딜 수 없다.

문주희 때 이상의 복수귀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자.”

히히힝―.

추룡처럼 느긋하게 말을 타고 싶은데 자세가 잘 나오지 않았다.

천천히, 말이 발을 내딛는 동작에 맞춰 몸을 흔들자 훨씬 나아졌다.

방익지가 지었다는 아미산 인근의 목책은 백 리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큰 규모를 자랑했다.

문제는 목책으로 향하는 산길의 초입에 들어섰을 때 벌어졌다.

사람들과 수시로 마주칠 만큼 번화한 길목에서 만두를 팔던 중년여인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조 대협,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라요. 좋지 않은 결정이에요.”

퉁퉁하고 정감 가는 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시장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중년 아낙의 모습으로 그런 조언을 하니 조서인은 크게 황당하여 잠시 말을 멈춰 세웠다.

만두를 한 접시 손에 든 그녀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눈빛을 보낸다. 조서인은 마치 어린 시절에 집을 나간 어머니가 돌아와서 조언을 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오문의 사람이십니까? 이건……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제가 하는 겁니다.”

“조 대협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일은 모두 순리대로 풀릴 거예요.”

“방익지 같은 자가 천무련에, 아니, 소호의 아래에 버젓이 존재하는 것이 이미 순리가 아닙니다.”

“제발 다시 생각해 봐요. 위로 가면 거화신녀께서 막으실 거예요.”

“오히려 미미를 막아 주세요. 저는 악행을 일삼는 자를 벌해야 합니다.”

“마음이 확고하시군요. 어쩔 수 없네요. 말씀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가는 길이 멉니다. 여기 만두를 가져가세요.”

중년 여인은 어색해하는 조서인의 손에 굳이 만두를 천에 싸서 손에 들려 주었다.

조서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움직였다.

“이게 무슨?”

생각할수록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는 일이다.

만두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조서인은 그걸 먹지 않고 말 안장에 매달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럇!”

조서인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듯 말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

천무련의 목책이 절반 정도 남았을 때쯤, 인적이 드문 오솔길에 화려하게 빛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사람의 몸보다 더 큰 바위 위에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처럼 황금으로 만들어진 갑주를 입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키가 크고 골격도 좋은 여인.

대미미는 그녀에게 다가오는 말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국 왔구나.”

대미미는 담담했다.

반대로 조서인은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로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올라오면서 다섯 명을 만났어.”

“응.”

“중년 여인, 코가 빨간 술주정뱅이 아저씨, 발랄하게 생긴 어린 꼬마, 머리를 귀밑에서 자른 젊은 여인, 천축에서 온 것 같은 짙은 피부색의 승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와 닿지 않았어?”

“와 닿더라. 너무. 그래서 더 힘들었어. 하오문은 이런 식으로 싸우는 거야?”

“응.”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조서인에게 있어 과거의 인연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마음에 와 닿고, 그렇기에 하오문의 방식은 악질이다.

마지막에는 버럭 소리지르며 화를 내고 싶은 걸 겨우 눌러 참으며 올라오는 참이었다.

“싸우기도 전에 기가 빠지는 느낌이야.”

“네가 잘못된 일을 하기 전에 최대한 말려 보고 싶었어.”

“……힘드네. 그래도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 나도 더는 말리지 않아.”

콰드득.

그녀의 커다란 손이 바위를 파고든다. 돌가루가 날렸다. 쩍― 하고 갈라진 바위틈으로 대미미의 손이 파고들었다.

천하제일 거력지체.

부친인 대석 이상의 신력을 타고난 여걸이 그녀가 앉아 있던 커다란 바위를 한 손에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 이상 넘어가겠다면 나랑 싸워야 할 거야.”

표정이 굳어진 조서인이 은자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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