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38화 (667/686)

22권 7화

제45장 무련방벽(武聯防壁) (1)

쿠구구궁―.

박살 난 통나무의 파편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조서인은 대미미와 눈을 맞춘 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서걱―.

대미미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붉은색의 화려한 비단 장포가 반으로 갈라져서 스르륵 흘러내렸다.

창날 앞에 놓인 대미미의 피부에 작은 실금이 갔다.

피부만 살짝 긁은 듯한 상처.

그걸로 끝이었다.

은색 창날은 그 앞에서 고요하게 멈춰 있었다.

“난 이대로 창날을 꺾어 버릴 수 있어.”

대미미는 분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창날을 붙잡고 위협하듯 말했다.

쇠로 만들어진 창날을 맨손으로 꺾는다?

보통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맨손으로 바위를 집어드는 그녀의 악력이라면 당연히 가능하다.

“내가 힘을 수습하지 않았다면 상처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을 거야.”

반면에 조서인은 차분했다.

대미미가 목에 실금만 생긴 것으로 끝이 난 것은 조서인이 창에 실려 있던 힘을 완벽에 가깝게 수습한 덕분이었다.

고삐를 잡아당긴다고 해서 관도를 힘껏 달리던 마차가 단번에 멈춰서진 않는다.

삼장 길이의 거대한 통나무를 산산조각 낸 창이 정작 대미미의 목전에선 호수처럼 고요하게 멈춰 서는 데까지는 높은 무공 경지를 필요로 했다.

침묵은 잠시.

대미미는 분한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결국 막지 못했네.”

“……그래. 내가 이겼어.”

“소호 오라버니한테 도움이 되질 못했어…….”

대미미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며 손에서 창을 놓았다.

지이잉―.

대미미가 손을 놓은 것만으로도 창이 떨린다.

조서인은 창끝을 바닥으로 내리고 사과했다.

“미안해.”

“이해가 안 돼. 왜 이렇게까지 고집을 피우는 거야?”

“미미야, 나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가?

문주희에 대한 복수에 목말라서?

아니다.

복수는 중요하지만 그건 계기일 뿐, 조서인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난 지금부터 소호가 뭘 잘못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줄 거야.”

“소호 오라버니가? 뭘 잘못했어?”

“방익지에 대한 처분, 천무련주로서 하는 모든 결정이……. 소호답지 않아. 의도도 옳지 않고 행위도 옳지 않아.”

“오라버니가 옳지 않았다고……?”

“그래. 그런데 주해랑 미미 너희는, 무조건 소호를 감싸고 돌기만 했어.”

“……!”

“안 돼. 더 이상은. 이 이상의 잘못은 내가…….”

조서인은 격해지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내가 사부님의 제자로서 소호를……. 아니, 친구로서. 가장 친한 친구로서 말할 거야. 소호에게 그건 잘못되었다고, 그렇게 외치려는 거라고.”

그동안은 무조건 소호를 믿고 따랐다.

무산학관 시절부터 지금까지, 조서인은 소호가 하는 일이라면 단 한 번도 의심조차 해 본 적이 없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결점이 있다.

소호도 마찬가지이며, 그 단점과 잘못들은 섭주해와 대미미 때문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조서인은 아직 늦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그는 소호의 내면은 여전히 선하고 정의로우리라 믿으니 말이다.

“감싸고 돌았던 우리 잘못…….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조서인의 말에 느끼는 부분이 있었던 걸까.

대미미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한발 물러섰다.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아무렇게나 앉아버렸다.

“난 여기까지야. 더는 막지 않을게.”

그녀의 멍한 눈빛은 조서인이 아니라 멀리, 천무련이 있을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지만 물어볼 여유는 없다.

조서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갈게.”

그는 온몸이 욱신거리는 고통을 참으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대미미와 싸운 후유증을 여전히 간직한 채, 그는 아미산 아래 목책이라는 다음 전장으로 향했다.

***

목책의 대문을 부수고 등장한 조서인은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를 단번에 밀어내는 창룡음을 토해 냈다.

“방익지!”

곧은 자세.

수백 명의 무장한 무인들이 흉흉한 모습으로 그를 노려보지만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앞으로 나와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받아라!”

마치 나랏일을 하는 어사나 판관 같은 준엄한 외침이었다.

수백 명이 침묵에 빠진다.

모두의 시선이 향하는 곳.

목책의 안쪽.

방익지가 조서인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탄식했다.

“믿기지가 않는군. 뭐 저런 놈이 다 있는가?”

방익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오십 걸음이 넘는 거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야, 이 미친놈아! 내 팔 한쪽을 날려 버리고도 모자랐느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여기까지 찾아와! 지금이 얼마나 위중한 시기인데!”

툭.

조서인이 창대를 바닥에 대고 세우는 간단한 동작에도 주변의 무인들이 움찔하며 칼을 만지작거렸다.

“팔 한쪽? 우습다. 금룡각주를 살수까지 동원해서 죽여 놓고는 겨우 팔 한쪽으로 끝내려고 했나?”

“어디서 이런 벽창호 같은 놈이……!”

방익지는 의수를 움찔 거리다가 왼손으로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낙일창! 지금 이곳은 전쟁을 앞두고 있다. 네놈과 실랑이를 할 시간 따윈 없어! 청죽조! 저자를 쫓아내라!”

칼을 든 천무련 청죽조의 무인들이 조서인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왔다.

마치 맹수를 대하듯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낙일창의 무위를 직접 보고 들은 적이 있는 자들이었다. 혹시 조서인이 날뛰기라도 할까 봐 조심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돌아가시오.”

“지금 우린 당신을 상대하고 싶지 않소.”

분노와 간절함이 절반씩 담겨있는 얼굴이었다.

조서인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자격이 되지 않는 자를 장수의 자리에 두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사사로운 이득을 위해 동료, 그것도 상급자를 죽이는 자가 멀쩡히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자를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우대하는 곳이 제대로 돌아가는 조직입니까?”

대답은 없었다.

모두가 얼굴이 붉어지거나 불쾌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조서인은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이는 처음부터 잘못된 인선입니다. 그리니 제가 바로 잡겠습니다.”

성큼.

조서인이 걸음을 내딛는다.

혼란에 빠진 무인들이 복잡한 표정으로 주춤거렸다.

“개소리! 네깟놈이 뭔데 천무련을 바로 잡겠다는 것이냐! 낙일창! 오만이 하늘에 닿았구나!”

“뭐라고 해도 상관 없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옳은 일을 할 것이다.”

더 이상 휘둘리지 않는다.

묵묵히.

소호에게 보란 듯이 천무련의 옳지 않은 행위를 징죄할 것이다.

조서인의 의지가 굳건하다는 것을 느낀 방익지는 크게 당황하며 소리쳤다.

“막앗! 모든 수단을 다 써라! 죽여!”

발악하듯 외치는 목소리에 살기가 가득했다.

오랜 시간 합을 맞춰 온 청죽조 무인들은 방익지의 명령에 반사적으로 튀어나갔다.

화살을 장전했고 미리 준비했던 함정과 암기들도 준비했다.

조서인은 은자창을 제자리에서 한 번 돌린 뒤 비스듬히 정면을 겨누며 말했다.

“당신들에게 감정은 없습니다. 막으면, 다칠 겁니다.”

터어엉―!

조서인이 강하게 발을 구르자 땅이 울린다.

전의를 고양시킨 조서인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화아아악―.

목표는 방익지.

방익지를 믿고 따르던 중소 문파 출신의 청죽조 무인들이 주춤거리면서 길목을 막으려 한다.

약하지는 않지만, 조서인을 위협할 만큼 강하지는 않다.

휘리리리릭――.

마치 공작새가 꼬리깃을 펼치듯, 조서인의 은빛 창이 화려하게 사방을 휘몰아쳤다.

순식간에 네다섯 명의 무인들이 허벅지와 허리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사선으로 일격.

검으로 막으려던 청죽조 무인의 검이 대번에 박살 났다.

창끝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 같았다.

직선으로 찔러 가다가도 뱀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유연하게 어깨를 내려찍는다.

뒤에서 기습을 노리던 무인은 손목이 부러졌다.

“끄아악!”

비명이 터져나올 때 이미 조서인은 다음 목표를 향해 다가가는 중이었다.

쒜에에엑――.

속도도 빠르지만 행동에 망설임이 없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주변이 박살 나고 뒤집어지니 그야말로 하나의 폭풍이다.

“저런 미친 놈이……!”

방익지가 경악하는 모습이 보인다.

조서인은 앞을 가로막는 열성적인 자들을 때려눕히며 우직하게 나아갔다.

수백 명의 무인들이 있지만 화살도 날아오지 않았고, 목숨을 걸고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절박함도 없었다.

‘무인들이 목숨을 걸지 않아. 그래, 말 몇 마디가 이렇게 중요하구나.’

하오문에게서 배운 점이다.

싸우기 전의 명분과 사기가 이렇게 중요할 줄이야.

조서인은 달변가가 아니다.

하지만 진심을 담아 옳은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었다.

그 효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

수백 명의 무인들이 이 자리에 있건만 무기를 들고 앞을 가로막는 건 고작 십수 명에 불과했다.

조서인은 자신을 장복이라 소개한 몸집이 단단한 사내를 쓰러뜨리고 나니 곧바로 방익지와 마주할 수 있었다.

“이 개자식이. 끝까지……! 끝까지 나를 이렇게 방해해……!”

방익지가 노성을 터뜨리며 거무튀튀한 오철로 만들어진 의수를 아래로 내리쳤다.

쩌어엉!

강맹하고 빨랐던 손바닥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조서인의 은빛 무기.

은자창이 고요하게 멈춰 서서 의수를 막고 있었다.

“이놈!”

방익지는 승천무 강뢰각을 날려왔다.

번쩍 차올렸던 발을 아래로 내리찍는다.

쾅!

땅이 터져 흙먼지가 피어났다.

뿌옇게 시야를 가리는 흙먼지 사이로 거무튀튀한 의수에 달린 칼날이 조서인의 목을 노렸다.

깡!

까가강!

조서인은 수십번의 공격을 묵묵히 막아 냈다.

전에 보았던 복룡권 이십팔수다.

치고, 쳐 내고, 감고, 꺾는.

손으로 해낼 수 있는 여러 가지 무리가 혼합된 권법이었다.

문제는 오른손 대신 차고 있는 의수가 생각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점이다.

‘전보다 강해졌어.’

손가락에 달려 있는 물갈퀴 같은 칼날이 위협적이었다. 스치기라도 하면 다섯 줄의 자상이 생기는 셈이다.

방익지는 처절하게 싸웠다.

복룡권, 강뢰각, 서천검.

그가 익힌 모든 무공을 한풀이하듯 뿜어냈다.

절정 고수다운 기량이 펼쳐졌다.

방익지는 조서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공격을 퍼부으며 어떻게든 빈틈을 찾겠다며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쩌어엉―!

하지만 조서인에게는 닿지 않는다.

검선일맥 무쌍귀의 무공.

거기에 용의 내단을 얻어 이제는 외공과 내공의 완전한 조화를 이뤄 냈으니 어떤 공격이 그를 흔들 수 있겠는가.

조서인은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단 한 번도 공격을 허용하지 않고 묵묵히 흐름을 버텨 냈다.

조서인은 묵묵히 방익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밑바닥을 보겠다는 듯이.

어디까지 해 보든 그는 자신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눈빛으로 전해 주었다.

“크아아아악!”

방익지가 소리를 지르고, 그의 의수에서 독이 묻은 장침 다섯 개를 일시에 쏘아냈을 때, 조서인은 창날로 바늘 하나에 일격씩.

총 다섯 번의 창격을 날려 바늘을 쳐 냈다.

일연적룡무 제일 식.

섬전 같은 찌르기가 방익지의 의수를 꿰뚫는다.

콰직!

목책의 대문을 찔렀던 것처럼. 방익지의 의수가 팔꿈치 부분에서 반토막이 나서 뜯겨져 나갔다.

빙글 회전하며 다시 한 번 찌른 창날이 방익지의 가슴을 꿰뚫었다.

퍽.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방익지의 몸이 움찔 떨린다.

조서인은 창날을 뽑지 않은 채로 물었다.

“복수는 끝났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흐흐흐.”

방익지는 웃었다.

누런 이빨 사이로 새빨간 핏물이 울컥 새어 나왔다.

“나와…… 네가…… 뭐가 그리 다른가?”

방익지가 먼 곳을 응시했다.

대미미와 똑같은 동쪽이었다.

“그깟 여자 하나가 뭐라고……. 됐다. 야망 없는 놈과는…… 할 말 없다.”

조서인은 굳은 얼굴로 창을 뽑았다.

치솟는 핏물.

천무련 비각 각주 방익지.

출세를 원했으나 돈과 권력에 이성을 잃었던 그는, 그렇게 아미산 중턱의 목책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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