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39화 (668/686)

22권 8화

제45장 무련방벽(武聯防壁) (2)

“안돼에에에!”

방익지의 심복인 감광과 장복이 비명 같은 외침을 토해 냈다.

“각주님! 방 형―! 이놈, 낙일창! 죽여 버리겠다! 우리가 끝까지 너를 쫓을 것이다! 복수는 너만 하는 건 줄 아느냐! 나도 복수를 할 것이다!”

특히 장복은 조서인에게 얻어맞아 바닥에 쓰러진 상태임에도 처절하게 소리를 질러 댔다.

근처에 장복과 친한 사이로 보이는 무인들이 장복의 입을 막고 그를 뜯어말리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후우.”

조서인은 창날에 묻은 피를 털어 낸 뒤 가만히 방익지를 바라보았다.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도 여전히 동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이미 목숨도 잃었거늘.

뭐가 그리 아쉬워서 천무련이 있는 곳을 바라본단 말인가.

조서인은 묵직한 돌이 연못 바닥으로 가라앉듯, 그가 마지막에 한 말이 계속 마음속에 남는 것을 느꼈다.

“나와…… 네가…… 뭐가 그리 다른가?”

그는 조서인에게서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그런 말을 하였나?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 이야기였다.

부패하여 자신의 야망을 위해 사람도 죽이던 방익지와 지금의 조서인이 어떤 점에서 닮았단 말인가.

“난 당신과 다릅니다. 이건 정당한 복수입니다.”

조서인은 창끝을 내린 채 스스로 다짐하듯 말했다.

중간에 장복이라는 자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면서 바닥을 기어 덤비려고 했다.

조서인은 본능적으로 창을 꽉 움켜쥐었으나 차마 찌르지는 못했다.

주변에 말리는 무인들의 눈빛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제발 그냥 지나쳐 달라고 눈빛으로 애원하는 모습이 안타깝기까지 했다.

‘추룡 숙부가 순진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죄송합니다, 숙부님.’

백귀총의 살수를 단번에 죽여 버리던 그 단호함은 조서인으로서는 참 따라 하기가 어렵다.

끝내 장복까지 죽일 마음은 들지 않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다만 한마디는 던져 주었다.

“불의를 참지 못해 방 각주에게 복수를 했으나, 당신들에게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째서 그를, 방 각주를 말리지 않았습니까?”

이들은 대미미나 섭주해와 똑같다.

믿고 따르던 사람이 나쁜 방향으로 폭주한다면 그걸 말리는 것 또한 아랫사람의 의무가 아니던가. 주변에서 말리지 않고 오히려 부추기기만 했는데 어찌 죄가 없을까?

발악하듯 소리지르는 장복을 제외한 무인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들의 얼굴에 짙은 패배감과 자책이 담겼다.

조서인은 심란한 마음으로 목책을 빠져나와 아미산에서 내려갔다.

그 뒤로는 기억이 흐릿하다.

어떻게 원래 머물던 객잔까지 왔는지 명확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저 멍하니 걷다 보니 어느새 침상에 누워 있었다. 온몸이 저리고 피곤해서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단정하게 긴 머리를 뒤에서 묶은 여인이 영민한 눈빛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자연 누이?”

“팽가의 방계 친척에게 다녀왔어요. 유정상회와 같이 일하는 집안인데 사천에서 장사를 하는 분이에요. 어제 많은 일이 있었어요.”

팽자연은 의자에 앉아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차분히 이야기했다.

“어젯밤에 목책이 불탔다고요?”

“네, 적양문의 나찰마도 정옥상과 청화도대가 나타나 천무련의 무인들을 휩쓸었대요. 좀 더 잘 싸울 줄 알았는데 너무 쉽게 무너졌다고 하네요.”

“아…….”

“결국 아미파 때와 똑같은 상황이 되고 말았어요. 아직 다 밝혀지진 않았지만 생존자가 몇 명 없대요.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은 천무련에 소식을 전하러 간 몇 명뿐이고요. 지금 사천이 난리예요. 정사대전이 벌어질 거라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와요.”

조서인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이상한 기색을 눈치챈 듯했다.

대번에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찔러 보듯 물어 왔다.

“그 얼굴, 팽가에서 본 적이 있어요. 서인 오라버니. 어제 어디 갔었어요? 혹시 목책에 갔었어요?”

“…….”

“갔었군요?”

그녀는 방 안의 풍경을 살펴보며 더더욱 확신하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방 안에는 단서투성이였다.

대미미와 싸우면서 찢어지고 더러워진 무복이 방 안 의자에 걸쳐져 있고, 침상 옆에 벗어 둔 신발은 흙투성이다.

심지어 조서인이 움직일 때 언뜻언뜻 드러나는 손목과 팔에는 거무죽죽하게 멍도 들어 있었다.

“나 좀 기다렸다가 같이 가지 그랬어요?”

“자연 누이가 위험해질까 봐 걱정되었습니다.”

“그 마음은 고맙지만 저는 집에서 난이나 치고 수를 놓는 양갓집 규수는 아니에요.”

“으음.”

“다음번에는 말이라도 해 줘요. 그래야 싸운 다음을 대비라도 하죠.”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그보다 다친 곳은 없어요?”

조서인은 온몸이 욱신거리는 것을 이야기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대미미와 싸운 것도 이야기해야 했다.

눈치가 빠른 팽자연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 이야기를 하면 걱정이 더 커질 것이다.

“괜찮습니다. 멀쩡해요.”

“구명환 잘 가지고 있죠?”

“예. 항상 허리에 차고 있습니다.”

조서인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팽자연의 시선을 피했다.

“자연 누이, 저는 잠깐 가 볼 곳이 있습니다.”

“목책으로 가는 거죠?”

“제 마음을 다 아시는군요.”

“그냥 아는 것만 안답니다. 다 알면 이렇게 속앓이도 안 하겠죠?”

“으음.”

“같이 가요. 저도 궁금해요.”

“……자연 누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괜찮아요. 나도 내 몸 하나 정도는 건사할 수 있다고요.”

“……”

“걱정 마요. 혹시 적양문이랑 마주칠 것 같으면 도망칠게요. 그럼 괜찮죠?”

팽자연은 조서인이 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따라가겠다고 할 만큼 용감하고 열정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과하게 고집을 부리지는 않고 선을 지킨다.

적양문이랑 마주칠 것 같으면 도망친다?

적당한 선이다.

조서인의 감각에 적이 걸리면 도망치면 되는 일이니까.

조서인은 결국 쓴웃음을 지으면서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

목책을 다시 올라가는 길은 어제보다 멀게 느껴졌다.

한적한 길목.

아미산의 웅장한 산세와 수많은 나무의 모습이 절경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풍경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조서인은 성큼성큼 나아갔고, 팽자연도 조용히 그 옆을 나란히 따라왔다.

목책에 도착해 갈 때쯤 팽자연이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인 오라버니. 문 소저의 복수는 했나요?”

마치 시장에서 만두를 샀냐는 질문처럼 별일 아니라는 듯한 말투였다.

조서인이 마음을 쓸까 봐 걱정하는 그녀의 배려다.

조서인은 감사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예, 복수는 끝났습니다.”

“마음고생했겠어요.”

“허무……한 것 같습니다.”

“다들 복수가 끝나면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궁금해요. 방익지라는 그 사람 하나만 죽었나요?”

“예, 문주희의 복수는 방익지로 끝냈습니다.”

일부러 방익지의 수하들은 건드리지 않았는데 결국 적양문이 복수를 한 셈이 되었다.

‘소호의 노림수가 이거였겠지.’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를 일이다.

직접 그 상황을 보아야만 답이 내려질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죽이지 않았어요?”

“들어가면서 십여 명 정도 쓰러뜨리긴 했지만 죽은 자는 없었습니다. 방익지 말고는 그리 위협적인 사람이 없어서 수월했지요.”

“네? 위협적인 사람이 없었다고요? 하나도?”

“예. 방익지 혼자만 절정 고수더군요.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팽자연은 놀란 얼굴로 입을 벙긋거리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후우, 대단하네요.”

“아……. 혹시 너무 오만해 보였습니까? 방익지는 제법 강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게 대단한 거예요. 서인 오라버니는 늘 천무공자만 대단하다고 말하는데 제 눈에는 안 그래요. 서인 오라버니도 대단해요.”

“예? 아뇨, 소호에 비하면 아직 멀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제가 보기엔 모르겠어요.”

조서인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맑은 눈동자가 호의를 가득 담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무련의 청죽조라고 하면 강호에서 정예로 통해요. 특히 방익지라는 사람이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실전 경험이 많아서 까다롭기로 소문이 났어요.”

“어, 음. 몰랐습니다.”

“그런 사람들 수백 명이 있는 곳을 단신으로 돌파? 만약 알려진다면 낙일창의 전설에 하나가 더해지겠네요.”

낙일창 전설이라니.

상상도 못했던 부분이었다.

천무련 무인들이 상대하기 어렵지 않다고 느꼈던 만큼 더욱 그게 큰일이 될 거란 생각은 못했었다.

‘소호가 이런 기분이었던 걸까?’

격세지감이 든다.

용의 내단을 얻은 덕분일까.

주변의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너무 알려지는 것도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해요. 하지만 명성은 곧 힘이 되기도 해요. 앞으로 서인 오라버니를 위해서는 명성이 오히려 더 높아져야 할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만약 천무련에 쫓기게 되면 얼른 팽가로 도망쳐요, 우리.”

팽자연은 참 속이 깊었다. 가문에 큰 짐이 될 수도 있는데 그녀는 모든 것을 받아 줄 기세다.

조서인은 팽자연과 마주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처참……하네요.”

천무련이 세운 목책에 도착했을 때 팽자연은 새카맣게 탄 통나무 벽들을 보며 안색이 굳어졌다.

조서인 역시도 굳은 얼굴로 목책의 입구로 향했다.

목책의 입구는 조서인이 부쉈던 것을 복구시켜 둔 모습이었다.

경첩도 다시 붙어 있고, 그 뒤를 지지하기 위해 통나무를 잔뜩 쌓아 둔 것이 보였다.

문제는 적양문은 목책의 입구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옆에서 들어왔습니다. 여기, 일도에 통나무를 쪼겠어요.”

조서인은 목책의 좌측.

지리적으로 봤을 때 아미산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오는 산비탈 쪽에 우르르 무너져 있는 통나무들을 살폈다.

통나무가 비스듬히 갈라져 있었다.

사람의 몸통만 한 통나무를 세 겹이나 겹쳐 뒀는데도 일도에 잘려 나갔다.

조서인이 은자창으로 찔러서 목책을 쪼갰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었다.

“나찰마도인 것 같습니다. 비스듬히 일도를 내리쳤고, 그걸로 목책을 무너뜨렸어요. 그리고 부하들과 같이 들어와서…….”

조서인은 마치 자신이 나찰마도 정옥상이 된 것처럼 목책에서부터 천천히 발자국을 따라갔다.

목책의 한가운데.

조서인이 방익지와 싸웠던 그 자리가 무려 삼 장이나 되는 깊이만큼 땅이 파여 있었다.

함정이었다.

미리 준비해 두지 않으면 이 정도 깊이의 구덩이가 생길 수가 없다.

그곳에서 매캐하고 구역질이 나는 악취가 올라왔다.

아직 썩지는 않았으나, 불에 타서 새카맣게 변한 시신이 한가득이다.

“세상에.”

팽자연은 무가의 여식답게 담력이 강한 여인이었지만, 그녀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손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삼 장(丈)이나 되는 깊은 구덩이가 시체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은 본능적으로 사람의 거부감을 자극했다.

조서인은 가만히 앉아 시신들의 상흔을 살폈다. 대부분이 일도에 가슴이 갈린 모습이었다.

“싸움은 일방적이었습니다. 나찰마도를 막을 수 있는 고수가 없으니…… 아마 당연한 일이겠지요.”

방익지가 살아 있었다 한들 대세에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나찰마도의 무력은 막강했다.

칼의 궤적, 목책을 무너뜨린 파괴력, 뭐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초절정 고수의 흔적이 사방에 가득했다.

조서인조차 직접 겨뤄 봐야 승부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인데 방익지가 그를 어떻게 상대했겠는가?

“기책과 함정, 암기로 승부를 보려 했던 것 같지만……. 나찰마도는 생각보다 더 강했습니다. 그 혼자서도 대부분의 무인을 혼자 도륙할 수 있는 실력자였고, 청화도대가 뒤를 받쳐 주니……. 이건 애초에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었군요.”

조서인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암기들을 보며 오히려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가 방익지에게 복수한 것 때문에 이들이 모두 죽은 것은 아니라는 게 증명이 된 셈이다.

그런데 팽자연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어차피 적양문과 천무련 사이의 승부에는 변함이 없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자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 뭔가를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안심할 때가 아니에요. 서인 오라버니, 만약 이게 지기로 예정되어 있는 싸움이라면 이건 더 심각한 문제예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세상에는 뭐든 트집을 잡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한가득이에요. 천무련 입장에서 보면 안 그래도 질 게 뻔한 싸움에서 부하들을 버린 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텐데, 만약에 말이죠.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에 누군가가 나타나서 싸움을 방해했었다면……?”

팽자연이 불안한 눈빛으로 조서인을 응시했다.

“제가 천무련의 사람이라도 뒤집어씌우고 싶을 것 같아요.”

팽자연의 목소리에 진한 걱정이 담겼다.

조서인은 그제야 팽자연이 말하는 바를 알아챘다.

“저한테 뒤집어씌울 거란 이야기군요. 싸움에서 진 건 제 탓이라고.”

“네, 솔직히 그러기 쉽겠네요.”

“어차피 천무련에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잘되었군요.”

조서인은 이제 그런 모략과 음모를 겁내지 않는다.

복수를 해야 하니 했을 뿐이다.

누가 찾아오더라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이젠 천무련에 있을 소호와 섭주해를 만날 차례였다.

“천무련으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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