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10화
제45장 무련방벽(武聯防壁) (4)
조서인은 잠시 고민하다 되려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큰일은 무엇을 말하며, 내가 지금 천무련으로 향하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해가 되질 않아. 자세히 말해 주지 않겠어?”
“과연, 예전의 눈치를 많이 보고 흐리멍덩했던 소년이었던 때와는 천지 차이로 달라졌군.”
느긋한 얼굴을 하고 있던 명로가 영민하게 눈빛을 번뜩였다.
“사별삼일이면 괄목상대라더니. 그야말로 너를 향해 하는 말인듯하다. 명성 높은 조서인 대협. 그리 물으니 자세히 말해 주지. 큰일이란 네가 단신으로 천무련의 목책으로 쳐들어가서 방익지 비각 각주를 죽인 일을 뜻하며, 천무련으로 향하면 안 되는 이유는 당연히 앞서 말한 방익지를 죽인 일 때문이다.”
“흐음.”
“천무련에서는 낙일창이 방 각주를 죽였기 때문에 사천에서 진행 중이던 큰 계획들이 모조리 어그러졌다면서 크게 화가 났어. 거기에 얼굴을 들이민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지 않겠나? 그러니 개방의 후개 중 한 사람으로서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개방의 후개.
십만 명의 방도가 있다는 거대한 방파 안에서 고르고 고른 인재 세 사람이 지금의 개방 후개들이었다.
백 명 중의 한 명도 대단한 일인데 십만 명 중의 세 사람이다.
그들이 어찌 대단하지 않겠는가.
후개들의 권한은 개방 칠결장로와 맞먹으며, 분타주나 장로처럼 실질적인 세력은 없지만 미래의 용두방주가 될 수 있는 사람이기에 어디서든 거지들에게 막강한 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는 권위가 있었다.
“매듭을 여섯 개나 매고 있기에 설마 했는데, 명로 너는 정말로 개방의 후개였구나.”
“후개 ‘중’ 한 사람이지.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내 위치가 아니야.”
슬금슬금 모여든 거지들이 어느새 백 단위에 달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서인과 명로를 가운데 둔 채 마치 잔치라도 벌어진 것처럼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면서 왁자지껄하게 주변을 둥그렇게 둘러쌌다.
인(人)의 장벽을 쌓는 일이다.
길을 지나다니던 보통 사람들과 그들이 시선에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버렸다.
딸깍―.
팽자연이 허리에 차고 있던 협도에 손을 얹은 채 칼집을 살짝 풀었다.
“개방의 타구진은 시끌벅적하다던데, 혹시 지금 타구진을 준비하는 건가요?”
언제든 싸울 수 있는 준비를 마친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명로는 처음으로 조서인에게서 시선을 떼고 팽자연을 바라봤다.
“대단한 여걸이시군. 팽가에 흐르는 피가 철혈이라던데, 딸들도 호걸로 자라는 모양이오.”
명로가 팽자연의 정체를 꿰뚫어 본 것은 개방의 후개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팽 소저, 저들은 타구진을 펼치는 게 아니오. 그냥 우리가 편히 대화할 수 있도록 좀 가려 주는 것뿐이지. 보는 눈이 원체 많아서.”
“그래요? 다행이네요. 덤벼들면 거기 있는 낙일창 조 대협에게 비참하게 쓰러질 뿐이니 싸우지 않는 걸 추천할게요.”
“하핫! 이거이거 개방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타구진은 무적이오. 아무 데서나 가볍게 펼치지 않을 뿐이지. 그래도 그리 말할 수 있는 배포가 놀랍구려.”
명로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 조서인에게 질시의 눈빛을 보냈다.
“명성 높은 협객이 되면 저런 멋진 여걸도 따라붙는 모양이야. 부러운걸?”
조서인은 그 말에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자연 누이를 그리 가볍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누군가에게 부속처럼 딸려 올 사람이 아냐. 더 대단한 사람이지. 나와 함께 움직여 주는 게 나한테는 과분한 일이야.”
움찔.
잔뜩 긴장하고 있던 팽자연이 자신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어 버리자 팽팽했던 기세가 흔들렸다.
명로가 그런 팽자연을 흘깃 쳐다본 뒤 그 역시도 피식 웃었다.
“어이가 없구만. 혼약을 한 사이도 아닌데 벌써 애처가가 납셨어. 이봐, 조 대협, 물은 것에 대답부터 해 주면 안 될까? 큰일을 벌여 놓고도 천무련에 가는 이유가 무엇이냐니까?”
“그게 중요한가?”
“물론, 그러니 내가 주변의 시선이 이렇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나타나서 묻고 있지.”
조서인은 명로의 눈빛에서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좋아. 그럼 대답할게. 내가 천무련에 가려는 이유는 간단해. 소호에게 조언을 하고 주해를 따끔하게 혼내 주고 싶어서야.”
“뭐? 하하핫!”
“…….”
“잠깐, 왜 말이 없지? 진심인가?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었어?”
“나는 진심인데.”
“허어.”
명로가 황당하다는 듯이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니까. 지금 내 앞에 계신 조 대협께서는 천무공자 장소호에게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거라면서 냉철하게 조언을 해 주고, 귀군사 섭주해한테는 주군을 잘못 이끈 벌로 따끔하게 혼을 내겠다?”
“……단어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맞는 것 같네. 내가 방금 한 말이 이상했나?”
“이상한 정도가 아니지.”
명로가 놀랐듯 주변에서 듣고 있던 거지들도 깜짝 놀랐다.
춤을 추고 노래하던 거지들이 속으로 셋을 셀 정도의 시간만큼 멍하니 침묵을 지키다가 황급히 다시 노래를 시작했을 정도다.
“대단하군. 대단해. 하하핫! 그런 거였어. 과연. 그러니 머리 좋은 책사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네 행동을 예측을 못했지.”
조서인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그 대답으로 명로의 머릿속에서는 뭔가가 납득이 된 모양이었다.
“좋다. 아주 마음에 들어. 지금의 위치가 다르면 어떠한가? 무산학관 때의 친우면 평생 친우인 것을.”
명로는 그동안 잊고 있었다는 듯이 당연한 사실을 중얼거렸다.
“좋다. 조서인. 지금부터는 내 혼잣말이다.”
“혼잣말이라고?”
“개방에선 지금 천무련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 세상에 협의만 넘치는 이상적인 영웅은 없겠지. 천무련쯤 되는 규모면 착하고 좋은 일만 해선 흘러가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다 알아. 그런데 가끔 이건 선을 넘어간다 싶은 순간들이 있어. 물론! 개방에도 그런 일들이 있다. 대문파 중에 그런 어두운 부분이 없는 집단이 어디에 있겠나? 그렇지? 그러니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고 싶지는 않지만, 솔직히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보기 싫은 것 또한 사실이다. 천무공자는 좀 다를 줄 알았거든.”
조서인이 천무공자를 함부로 논하는 것에 놀랐던가?
명로는 더 큰 놀라움을 준다.
개방의 입장을 대표하여 천무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발언을 하는 그는 용감하다 못해 무모해 보였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거지들이 갑자기 노래를 미친 듯이 크게 부르고 날뛰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신기해서 구경하던 보통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도망쳤다.
“그래도 당장 뭐라고 하자니 대체할 사람도 없고, 또 결과만 놓고 보자면 일은 오지게 잘해요. 그래서 쪼금만 더 두고 보자면서 넘어가고. 다음번에 또 선을 넘어가도 쪼금만 더 두고 보자면서 넘어가고. 그렇게 오냐오냐하다 보니 이 지경이야. 이젠 정파인지 사파인지 모르게 아주 선을 지 맘대로 넘어 다녀.”
“아…….”
“그런데 말이야. 그 와중에 강호에 슬금슬금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창사(槍士)가 한 명 나타났는데. 와! 이 인간은 뭐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싶은 거다.”
처음엔 소호와 천무련을, 지금은 조서인을 지칭하는 이야기였다.
“이 인간이 천무련의 상황이나, 규칙 같은 건 개무시하고 그냥 목책 뚫고 단신으로 들어가서 각주 하나를 죽여 버렸는데. 와! 알고 보니 각주가 완전 쓰레기야. 사파인도 이런 사파인이 없어요. 게다가 이유도 그럴듯해. 각주가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서 자기 친구를 죽였기 때문에 자기도 복수를 한 거래? 암! 그러면 이해가 되지. 강호에서 그만하면 삼족을 멸해도 이해가 되는 이유 아냐? 그래서 그냥 넘어갔어. 그런데 갑자기 이 사람이 천무련으로 가네?”
명로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털썩 아무렇게나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은 명로가 신세를 한탄하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람들이 난리가 났어요. 그럴 줄 알았다. 분명히 적양문이든 뭐든 천무련과 적대하고 있는 커다란 뒷배가 있는 거다. 안 그러면 천무련의 일을 대놓고 방해하면서 저렇게 대범할 수가 없다고 그런다니까?”
“아…….”
“그런 의견만 있는 것도 아냐. 또 다른 파벌은 낙일창이 천무공자와 동문인 걸 아니까. 그는 천무공자를 싫어한다. 조만간 목숨을 걸고 싸우고 죽이려 할 거다는 의견도 있고.”
조서인은 당황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둘 다 아닌데…….”
“뭐라고? 난 지금 혼잣말을 하고 있는 거야. 혼잣말을 하다 보니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
“뭐 어쨌든. 그런 파벌들끼리 맨날 싸우니까 내가 대표로 나섰어. 예전에 안면도 있으니 직접 ‘낙일창’을 살피고 오겠다고 했지. 그래서 만나 보니까 얘가 아무 생각이 없어. 그냥 본성이 그런 건지 정의롭고 협의만 따져. 저 높으신 천무련주님께 조언을 하겠대. 뭐, 보고 있으면 좀 답답한 면도 있는데 그럼 또 어때? 힘이 돼서 뭐든 해내니까 그게 또 멋지네?”
조서인은 양손을 늘어뜨렸다.
놀랍다.
장기린이나 추룡, 팽자연을 제외하면,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 정도로 객관적으로 좋은 평가를 내려 준 건 처음이었다.
“명로, 나는…….”
“크흠! 어허! 난 혼잣말이라니까. 아무튼 나는 이제 그냥 지켜 볼까 싶다. 낙일창이 기고만장한 천무련의 뒷통수를 한 대 세게 때려 주는 게 천무공자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으음.”
“여기서 천무련 쪽으로 뻗은 길은 두 개가 있어. 하나는 검산(劍山)이라 불리는 뾰족한 봉우리를 옆으로 빙 둘러가는 건데, 평탄한 길을 두 시진쯤 말을 타고 가다 보면 중간에 역관들이 말을 교환하는 마장(馬場)이 나와. 거기에 귀군사 섭주해가 손을 써 뒀어. 말을 탈 줄 아는 낭인들을 수백이나 모아둔 데다 무슨 진법까지 펼쳐 뒀더라고. 무림 십대 고수도 목숨을 걸고 가야할 사지(死地)가 되어 버렸으니 피하는 게 상책이겠지?”
조서인과 팽자연이 머릿속에 방금 들은 이야기를 집어 넣고 기억하려 하는 사이, 명로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반대로 경사가 가파른 검산을 올라가서 넘어가는 길에는 사나운 산적들이 있는 산채가 하나 있어. 천무련이 바로 지척인데 웬 산채가 있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원래 어느 산이든 산적은 있어. 채주인 검산웅(劍山熊)이 생긴 거랑 다르게 머리게 잘 돌아가는 사람이라 자기 주제를 잘 파악하기도 하고, 게다가 천무련주랑 인연이 있는 녹림수로맹의 삼십육채 중 하나이니 몰살시키기엔 좀 그렇잖아? 우리 개방이랑도 이야기가 잘 통하는 곳이라 아마 지금 올라가면 길도 그냥 비켜 주고 극진하게 쉴 곳도 마련해 줄 거야.”
명로는 본인의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이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을 했다.
조서인은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골똘히.
깊게 생각을 한 뒤 진중하게 결정을 내렸다.
“명로. 우리는 둘 중에…….”
“어허! 크흠! 그걸 내가 들으면 안 되지. 난 몰라. 알고 싶지도 않으니 나한테 어디로 갈지 말해 줄 필요 없어.”
“……그렇군.”
조서인은 곧은 자세, 맑은 눈빛으로 명로를 보며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명로, 나는 내게 귀한 창술을 가르쳐 주신 사부님께 많은 것을 배웠어. 그분의 절반이라도 따라가는 게 내 목표야.”
“……!”
“이럴 줄 알았다면 무산학관에서 대련을 했을 때 좀 더 친하게 지낼 걸 그랬군. 아쉬운 일이야. 천금을 주고도 얻지 못할 귀한 정보를 주어서 진심으로 고맙다. 다음번에 만났을 땐 친구로 대하고 싶군. 다음에 보자, 명로.”
한 글자 한 글자에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한 뒤, 조서인은 팽자연을 데리고 성큼성큼 멀어졌다.
거지 떼는 반으로 갈라져서 조서인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명로는 길 한복판에서 느긋한 얼굴을 무너뜨린 채 거지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조서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후개, 검산으로 사람을 보낼까요? 검산웅에게 부탁을 할 거면 비싼 정보 하나쯤은 갖다 줘야 할 것 같은데요.”
작은 체구에 약삭빠른 눈매를 지닌 중년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개방 안휘분타 분타주.
개보다 더 냄새를 잘 맡는다고 해서 후구개(嗅狗丐) 종타였다.
“아뇨, 그게 아닙니다. 안휘 분타주. 오늘은 당신의 개 코가 아무런 쓸모가 없군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마 저들은 검산으로 오르지 않을 겁니다.”
“……그럼 그 마장 쪽으로 간단 말입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한다고요?”
“분위기가 그래요. 콩 심은 데 콩 난다더니. 무쌍귀의 제자는 무쌍귀를 닮아 가는 건가.”
명로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만약 조서인이……. 정말로 이번에도 해내면 ‘무쌍’이라는 칭호를 얹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명로의 말에 종타와 다른 거지들 모두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