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42화 (671/686)

22권 11화

제45장 무련방벽(武聯防壁) (5)

강호 무림은 안휘성에서 한 사람이 벌인 커다란 사건에 경악하고 있었다.

검산(劍山) 아래 자리하고 있는 주호마장(朱虎馬場)에 때아닌 피바람이 불었다.

한 사람당 최소한 금 스무 냥은 주어야 고용할 수 있다는 특급 낭인이 스무 명, 거기에 일급 낭인 오십 명과 이급 낭인 백 명까지 합해서 총 일백칠십 명에 달하는 낭인들이 주호마장에서 중상을 입고 모조리 쓰러진 것이다.

평생 칼밥만 먹고 산 낭인 백 명.

그것도 천무련에 고용되어 섭주해에게 진법을 배우던 자들을 쓰러뜨리려면 웬만큼 이름을 날린 무림 문파들도 사활을 걸어야 한다.

일대일의 무공 대결을 잘하는 것과, 일 대 다수의 싸움에서 잘 싸우는 건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이야기이지 않던가.

낙일창 조서인은 그 모든 편견과 의심을 단신으로 깨부수며 자신이 일 대 다수의 싸움에도 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한나절.

일백칠십 명의 상급 낭인들이 모조리 쓰러지는 데는 한나절이면 충분했다.

시종일관 일방적으로 전개된 싸움은 아침에 시작되어 노을이 하늘을 덮을 때쯤 끝이 났다.

낙일지약.

해가 지기 전까지 싸움을 끝낸다던 약속이 또다시 지켜진 것이다.

한때 낭왕이라 불렸던 주호마장의 주호는 그때의 조서인을 괴물이라 평했다.

“순해 보이는 겉모습과 예의 바른 태도에 속지 마라. 싸움만 시작되면 천하에 짝이 없는 무력으로 금강야차명왕(金剛夜叉明王) 같은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는 사람이 조서인이다.”

이번에도 낙일지약을 지켰다는 점을 들어 사람들은 조서인을 다른 별호로 부르기 시작했다.

낙일무쌍.

천하에 짝이 없는 창 한 자루가 천무련으로 향하는 것에 온 강호의 관심이 쏟아졌다.

***

“그럼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천무련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팽자연은 조서인의 손을 붙잡았다.

조서인은 깜짝 놀랐지만 피하지 않았다.

팽자연은 솔직한 여인이다.

그녀는 그를 향한 연정만큼이나 걱정과 불안함도 감추지 못했다.

“걱정이 됩니까?”

“당연하죠. 지금 그 모습을 좀 봐요. 마장에서 낭인들이랑 싸우는 바람에 온몸이 상처투성이인데.”

조서인은 소맷자락 사이로 붕대를 둘둘 말아 둔 팔목이 드러난 것을 발견하고는 난감하게 웃었다.

“크게 다친 곳은 없습니다. 이건 그냥 감아 둔 것뿐이에요.”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면 안 돼요?”

“안 됩니다.”

“서인 오라버니가 팽가까지 걱정해 줄 필요는 없어요. 그럴 여유도 없으면서. 그냥 저 하나의 일탈로 처리해도 되는 일이잖아요? 제가 뒤를 지키면 훨씬 편하게 싸울 수 있을걸요?”

“물론 자연 누이가 뒤를 지켜 준다면 뭐가 두렵겠습니까? 하지만 안 됩니다. 앞날을 생각하면 더더욱 하북팽가와 천무련의 사이를 나쁘게 만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날이요?”

“나중에 자연 누이를 가문에서 데려오려면 벌써부터 팽가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가문에서 데려오는 일.

혼인을 의미함이다.

조서인의 꾸밈없고 진솔한 말에 팽자연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지금 무슨, 이 순간에 그런 말을……!”

지금껏 늘 차분하게 조서인을 챙겨 오던 팽자연이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자연 누이,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저는 죽으러 가는 게 아닙니다. 친구와 진심으로 대화를 하러 갑니다.”

“……그래요. 내가 졌어요. 대신, 꼭 돌아와야 해요. 가서 어떤 결정을 내리든 돌아와서 나한테 얼굴을 보여 줘요.”

“알겠습니다. 일이 끝나자마자 돌아올게요.”

꽉 잡은 두 손에서 그를 걱정하는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조서인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천무련.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거대한 대문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지난번의 사건이 생각난다.

방익지를 수레에 실어 데려왔던 그 날.

그는 소호와 다시 한 번 싸웠고, 소호의 막강한 내력에 밀려 정신을 잃고 말았었다.

‘이렇게 큰 곳이었구나.’

차분하게 바라보니 천무련은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만들어진 지 불과 십 년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거대한 담벼락에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궁전을 보는 듯했다.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삼 층 이상의 전각만 해도 열 개가 넘는다.

안으로 들어가면 아마 더 거대하게 느껴질 것이다. 수많은 전각과 담벼락이 구불구불하게 엮여 있으니 마치 미로에 들어간 것처럼 혼란스러우리라.

그 위용에 놀라는 한편, 그 모습을 보자 소호와 대립하게 된 자신의 입장이 떠올라 가슴에서 울분을 차올랐다.

‘소호야, 이 정도로 큰 걸 이뤄내려면 꼭 그렇게 변해야만 하는 거야? 그게 세상의 이치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너는 이렇게 달라진 거야? 어째서 우리가 무기를 맞대게 된 거지?’

피가 섞인 가족보다도 더 친하고 서로를 아끼던 친구와 이제는 무기를 마주하고 싸워야 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조서인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눈을 떴을 때, 불편한 심기가 눈에 보일 것처럼 유형화되어 강렬한 기파가 되었다.

후와아아악―.

조서인은 허물을 벗어 던지듯 건곤조화신공의 진정한 힘을 드러냈다. 시끌벅적하게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던 천무련의 입구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터벅. 터벅.

사위가 고요해진 가운데 조서인의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인의 장벽이 갈라진다.

건장한 체구.

등 뒤에는 은색 창을 비스듬히 매고 있는 그의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이 속출했다.

“낙일창……!”

“저 사람이 낙일무쌍인가.”

“엄청난 기세인데? 온화하다고 들었는데 듣던 것과 너무 달라.”

“쳐다도 못 보겠군. 뭐 저런 기세가……! 과연, 련주님과 정면으로 수백 합을 싸웠다더니.”

조서인은 주변의 수군거림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로지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낙일창 조 대협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총군사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입구를 지키던 두 사람이 정중하게 예를 지키면서 조서인을 안내했다.

포권을 취하는 모습이 깍듯하지만 그 후에는 곧바로 한 손은 허리춤의 검에 얹고, 조서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적으로서 경계하고 있는 것이 명백했다.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를 안으로 순순히 들여보내 준다고?’

안으로 들여보내는 건 ‘허락’의 의미도 있지만, 한편으론 군웅들이 보지 못하게 ‘은폐’하려는 시도일 수도 있었다.

조서인은 묵묵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따가울 정도의 시선을 사방에서 받으며 조서인은 천무련의 심처로 안내받았다.

‘경계가 심해. 이미 주변이 포위되었어.’

눈에 보이는 포위망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삼삼오오 모인 무인들이 조서인을 중심에 두고 백 보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화경을 넘어섰기에 느낄 수 있었다. 조서인의 감각에 들어오는 무인들만 해도 삼백 명이다.

전체적인 수준이 꽤 높았고, 모든 행동에 규율이 잡혀 있었다. 만약의 상황이 벌어지면 일제히 달려들어 포위망을 형성할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조서인은 무신전이라고 적힌 현판 앞에서 처음으로 우측으로 방향을 꺾었다.

그를 안내해 준 두 사람이 자신은 여기까지라는 듯 멈춰섰다.

문상전(文上殿)이라 적힌 현판이 그를 맞이했다.

높고 웅장한 건물 앞, 대리석이 깔린 넓은 마당에서 조서인은 그가 찾던 사람 중 한 명과 마주했다.

“조서인. 결국 여기까지 오는구나. 대단해.”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섭주해.

허리에 손바닥만 한 단검을 차고 있는 창백한 안색의 청년이 조서인을 발견하고는 전각 안에서 걸어 나왔다.

“주해.”

“낙일창 조서인. 보다시피 이곳엔 나밖에 없다. 일하던 군사들은 미리 다 내보내 놨어. 그러니 하나 물어보자. 너는 왜 여기까지 온 거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도대체 무슨 이유로?”

살가운 인사를 하거나 그동안의 안부 같은 것은 묻지 않았다.

섭주해가 조서인을 싫어하는 태도는 노골적이었다.

돌이켜보면 과거에 무산학관에서도 둘은 그리 친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소호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보아 왔지만, 섭주해의 눈에는 소호밖에 보이지 않는 듯한 그런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던 탓이다.

“주해. 너는 내게 인사도 하지 않는구나.”

“인사라니. 그런 걸 기대한 건가? 주호목장에서 천무련에 고용된 무인들을 모조리 때려눕혀 놓고? 그러고도 내게 인사를 기대했다고?”

“그들이 나를 붙잡으려 했으니까. 나는 나를 붙잡으려 했던 자와 싸웠을 뿐이야. 그리고 그건 주해 네가 지시하지 않았나?”

“물론. 천무련의 총군사로서 당연한 조치였어. 소호 형이 그렇게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쫓아가서 방 각주를 죽였잖아. 그 때문에 우리 천무련이 입은 피해가 얼마나 큰데? 그런 사람은 천무련에 못 오게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방익지는 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음모와 귀계가 아니라. 정당한 방식으로.”

“그래? 네가 생각하는 정당한 방식 때문에 우리가 피해를 입더라도? 참으로 뻔뻔하군. 그 정도 일을 벌였으면 부끄러워서라도 여기에 얼굴을 내밀지 못해야 정상이 아닌가?”

“……내가 방익지에게 복수하지 않았더라도, 그곳은 어차피 적양문에게 질 운명이었어.”

“그건 네 생각일 뿐이다. 방 각주가 지휘해서 막아 냈다면 어쩔 셈이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방익지가 적양문의 나찰마도를 막는다고?”

“무공 대결에 있어서 ‘절대’라는 말은 없는 법이지. 다름 아닌 네가 예전에 한 말이다.”

그건 옳은 말이다.

무공의 대결에서 절대적인 강자는 없다.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일류 고수가 방심하다가 이류 고수에게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생긴다.

노력과 집중력으로 무공 경지를 뛰어넘는 결과를 선보이는 자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도 이번 일은 달라.’

천무련이 방익지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벌을 주기 위해’ 사천에서 버렸다는 사실은 조서인도 알고, 섭주해도 알고 있다.

“그 방식도 틀렸고, 그걸 내게 뒤집어씌우려는 방법도 틀렸다.”

“대화가 안 되는군. 그럼 다시 묻지. 이곳까지 온 이유가 뭐냐? 복수도 다 했으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해. 소호를 말리고, 너한테 한마디 하기 위해서다.”

“뭐?”

섭주해는 헛웃음을 지었다. 섭주해는 창백한 얼굴 위로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 접은 부채로 손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소호 형을 말리고, 내게 따끔하게 한마디를 하겠다? 좋아. 재밌네. 그래서 나한테는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소호를 나쁜 길로 부추기지 마.”

조서인의 말이 어디가 우스웠는지 섭주해는 멍하니 서 있다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뭐라고? 내가 소호 형을 나쁜 길로 부추겼다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난 소호 형을 돕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부추겼다니? 소호 형이 내가 부추긴다고 들을 사람이기는 한가?”

“소호는 이유는 모르지만 폭주하고 있어. 옳지 않은 길로 간다면 돕는 게 아니라 말리는 게 네가 할 일이야. 너는 지금 소호의 의형제이자 군사로서 잘못 보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후후후.”

“왜 웃지?”

“아무것도 모르는 너의 무지함에 웃고, 잘 모르면서도 뭔가를 바꾸려는 너의 쓸데없는 용감함이 또한 우습다.”

섭주해는 고개를 저었다.

“소호 형은 끝까지 너를 내버려 두려고 했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다. 너는 변수가 너무 커. 너는 우리가 계획하는 십년지대계를 다 망가뜨릴 것 같아서 불안하다.”

섭주해에게서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귀기(鬼氣)가 번뜩인다.

사람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섬뜩한 시선이 조서인을 노려보았다.

“천무련에 구금하겠다. 소호 형이 북경에서 돌아올 때까지. 그 후에도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얌전히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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