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14화
제45장 무련방벽(武聯防壁) (8)
이곳이 천무련이고, 총군사 섭주해가 머무르는 문상전이라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떤 상황을 거쳐서 패원강과 서로 맞부딪치고 있는 건지도 잊었다.
조서인은 머릿속을 비웠다.
대신 이 승부에서 이기겠다는 집념과 강력한 의지만을 가득 채웠다.
상대는 강하다.
힘을 아끼다간 여기서 패배하고 천무련의 감옥에 갇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패원강은 그 정도로 강력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박동한다.
거칠고 사나운 용처럼 이리저리 들끓는 진기를 자신의 창 안에 모조리 밀어 넣었다.
일연적룡무 제일식.
쒜에에에엑―――!
은빛이 번뜩이는 순간 이미 조서인의 창은 공간을 격하고 패원강의 상체를 향해 쏘아졌다.
창날에 강기를 둘렀으니 마치 포탄이 날아가는 것과 같았다.
크게 놀란 패원강이 본인도 검강을 뽑아내며 허공에 태극의 문양을 그렸다.
스윽―.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초절정 고수의 창과 검이 만났는데 거칠게 부딪치는 게 아니라 마치 젖은 천에 창을 찌른 것처럼 검날이 찰싹 달라붙는 느낌이 났다.
방향을 바꾸려고 해도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극성에 이른 태극혜검이 상대방의 무기를 끌어당기는 힘이 엄청났다.
이대로 빨려 들어가면 선수(先手)를 잃고 휘둘리게 될 터.
조서인은 팔목 인근의 혈도를 폭발시키며 다시 한 번 내공을 움직였다.
‘여기서 한 번 더!’
조서인은 디딤발에 힘을 실은 채 상체를 한 치 정도 낮추며 어깨에서 손끝까지 회전력을 가미했다.
후와아아앙――.
마치 태풍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창끝이 맹렬하게 회전한다.
창날을 덮어씌우고 있던 창강이 일시적으로 두 배나 커졌다.
집중된 힘.
증폭된 파괴력이 패원강의 태극혜검을 깨부쉈다.
쩌어어어엉!
청강검이 옆으로 튕겨 나간다.
조서인의 창도 옆으로 비껴갔으나 그래도 막강한 내공 덕분에 패원강의 목덜미를 스쳤다.
서걱―.
옷자락이 나풀나풀 떨어져 내린다.
충격을 받은 듯한 패원강과 눈이 마주쳤다.
최고의 후기지수.
구파일방의 공동 전인이 조서인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불끈 가슴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치솟았다.
조서인은 큰소리로 외쳤다.
“오라!”
패원강의 눈이 번뜩였다.
짙은 눈썹 아래, 상처 입은 맹수처럼 독해진 눈빛이 보인다.
패원강은 기수식을 바꿨다.
태극혜검을 고집하던 것을 버리고 우수에는 검을, 좌수에는 계란을 하나 쥐고 있는 것처럼 주먹을 가볍게 거머쥐고 앞을 겨누었다.
터엉!
조서인은 제자리에서 뿌리를 내리듯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목숨이 날아간다.
쒜에에엑!
감탄이 절로 나오는 속도로 덤벼든 패원강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청강검이 태극의 문양을 그려 내고, 가볍게 거머쥔 좌권이 화려하게 정면을 수놓는다.
퍼버버벙!
태극혜검의 성취에 놀랐던가?
이번에는 소림의 권격이다.
나한십팔수(羅漢十八手).
소림권의 대표 무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강맹한 권법의 첫 초식인 혼원일기세(混元一氣勢)를 시작으로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퍼퍼퍼펑!
짧게 끊어칠 때마다 공기가 터져 나간다.
밀고, 끌어당기고, 쳐 내고.
손가락 끝의 동작 하나하나에도 신묘한 묘리가 깃들어 있으니 허투루 상대할 수 없다.
쒜에엑!
쩌엉!
조서인이 창을 찌르면 패원강은 반선수와 금강부동신법으로 창끝과 창대를 가볍게 흘려냈다.
반격이 매섭다.
창을 한 번 찌를 때 권격은 세 번 이상이나 날아왔다.
이는 장병기와 권법의 어쩔 수 없는 차이다.
게다가 패원강이 내뻗는 권격이 어찌나 정교한지 조서인은 한시도 제자리에 멈춰 있을 수가 없었다.
후우웅―.
공기가 빨라지는 듯했다.
상승의 영역.
온 세상에서 색깔이 사라지고 흑백만이 남았다.
멀리 경악하는 섭주해의 얼굴이 보인다.
다급하게 뛰어 들어온 천무련의 무인들이 경악하며 입을 벌리는 모습도 보인다.
세상 모든 것이 느려진 가운데, 오직 패원강과 조서인 두 사람만 빠르다.
뻑―!
폭죽이 터지듯 쏟아져나온 권격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다.
욱신.
왼쪽 어깨가 저린다.
스쳤을 뿐인데도 침투경이 어깨의 혈도로 파고든다.
쩌저정!
창대를 좌우로 교차시켜서 수십 번의 권격을 막아 냈으나, 하나는 미처 막지 못해 고개를 젖혀 피했다.
콰과광!
뒤쪽으로 뻗어 나간 충격파가 담벼락을 무너뜨렸다.
조서인도 마찬가지.
일연적룡무 제일식을 찔렀을 때, 포탄처럼 뻗어 나간 힘의 여파가 문상전의 기둥 하나를 동그란 모양으로 관통시켰다. 우지끈― 소리를 내며 기둥이 부러진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아비규환이 되는 모습이 보인다.
몸과 몸이 맞부딪치는 싸움이라 가볍게 보이는가?
아니다.
상승의 영역.
초절정 고수들의 싸움답게 두 사람이 내뻗는 모든 공격에 강기가 실려 있었다.
나한십팔수와 태극혜검에, 그리고 일연적룡무에도 강기가 실려 있으니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맞으면 목숨이 날아갈 치열한 싸움이다.
터엉!
펑! 파앙! 뻐어억!
권, 장, 각.
거리만 맞으면 어떤 방식의 공격이든 무섭도록 날려오는 패원강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태산과도 같다.
지법을 쓰든 장법을 쓰든.
그 짧은 시간에 강기를 두르고 무서운 힘을 뿜어내는 패원강의 실력은 그야말로 천재적이다.
권법뿐인가?
조서인이 창을 계속해서 막아 내는 태극혜검은 그야말로 강철로 지은 방벽과도 같다.
아무리 창을 휘둘러도 옆으로 미끄러지고, 비껴 나가니 정타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 거리를 좁혔다가 자유자재로 멀어지는 제운종의 신법 또한 놀랍다.
지이잉――.
염화탁엽세(拈花托葉勢).
마치 손가락으로 꽃을 짚듯 섬세하게 오므린 지권으로 조서인의 팔목과 허리의 혈도를 노려온다.
터텅!
점혈을 막기 위해 창대를 세우는 순간 권법은 일변.
합장을 하는 듯한 동자배불(童子拜佛)의 자세에서 만궁개흉(挽弓開胸)으로 가슴을 쭉 펴고 권격을 뻗어내는 전환이 섬전처럼 빠르다.
패원강의 몸 위로 합장을 하고 있는 승려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막강한 힘.
태산이 밀려오는 듯한 중압감이 온몸을 후려쳤다.
콰아아아―――.
창대로 분명히 주먹을 막았는데, 그럼에도 물이 쏟아지듯 허공을 후려치는 격공장이 가슴을 타격했다.
“쿨럭.”
조서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엄청난 힘이다.
가슴이 저릿하고 폐부가 시려 온다.
‘과연, 소호와 다른 방향으로 강하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소호가 천재적인 묘수로 승부를 뒤엎는 승부사라면, 패원강은 묵묵히 강력한 힘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전사다.
재빨리 창대를 걷어차 머리를 노리는 척하다가, 일연적룡무 제이식으로 환창을 흩뿌려 패원강을 멀리 떨어뜨렸다.
‘약점이 있다면……. 실전 경험! 그리고 내공의 집중!’
전체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패원강에게도 약점이 하나 있으니, 온실 속에서 무공만 익힌 것처럼 무공 전개 방식이 완고하다는 점이다.
오로지 정면.
권 다음에는 장. 장 다음에는 권.
방어는 검으로.
그런 정해진 규칙이 보인다.
홀로 다듬어서 완벽을 추구한 구파일방 공동 전인다운 모습이다.
물론 그 자체로도 강하지만, 추룡과 부운화에게 실전의 묘리를 배운 조서인이 보기엔 강기의 집중력과 함께 파고들 여지가 남아 있다.
“후우웁.”
한 번의 짧은 호흡.
그 후에 번개같이 찌른 창격이 청강검의 중심을 강하게 때렸다.
쩌어엉!
일연적룡무 제일식이다.
패원강이 검을 때리는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검을 놓쳤다.
“대단한 무공!”
패원강이 감탄한다.
청강검에 담겨 있던 기운이 단박에 박살 나는 것을 보고 일연적룡무의 강력함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이거다.
상대의 무공이 아니라 무기를 노린다면 그건 강기 대 강기의 힘 싸움이 되어 버린다.
“흐읍!”
패원강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아아압!”
튕겨 나간 검이 아직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땅에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고오오오오―――.
패원강은 오른손을 계란을 하나 잡고 있는 것처럼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비스듬히 서 있는 자세.
오른손을 허리춤에 붙이고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며 기를 모으는 듯한 동작이 조서인의 눈에 확대된 것처럼 크게 들어왔다.
‘통배권!’
얼마 전에 조서인은 소호에게 한 번 호되게 당해 본 적이 있다.
그렇기에 한눈에 알아보았다.
엄청난 양의 내공을 한 방에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무공이 바로 통배권이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리는 듯했다.
온몸의 감각들이 위험하다고 소리친다.
쿵.
조서인은 진각을 밟으며 은자창을 양손으로 잡았다.
‘정면으로 꿰뚫는다.’
창(槍)이란 그런 존재니까.
어떠한 벽이든.
어떠한 적이든.
뾰족하게 가다듬은 창날로 모조리 꿰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창이니까 말이다.
일연적룡무 제삼식
콰아아아아아――――.
심창의 깨달음을 담은 찌르기가 패원강을 향했다.
“통배권.”
패원강의 권격이 결국 정면을 격타한다.
마치 댐의 한쪽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패원강의 엄청난 내력이 해일처럼 쏟아져 나왔다.
창과 권.
심창(心槍)과 신권(神拳)이 정면에서 부딪쳤다.
번뜩이는 섬광.
고요한 침묵 끝에, 문상전의 건물과 그 주변을 둘러싼 담벼락이 일제히 무너져 내렸다.
쿠구구궁!
땅이 진동한다.
조서인은 고요하게 창을 양손으로 붙잡은 채.
패원강은 오른손을 앞으로 내뻗은 채.
그렇게 두 사람은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 있었다.
“과연.”
먼저 입을 연 것은 패원강이다.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천하에 나를 맞상대할 자는 천무련주 한 사람뿐이라 믿었건만, 여기 이곳에 또 한 사람이 있었군.”
구파일방의 후계자가 자신을 인정해 준다.
조서인은 격세지감을 느꼈다.
“그는 저 높은 곳에 있는 존재가 실수를 하나 해서 나타난 것 같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런데 자네는 아니군. 사람인데. 실력으로 여기까지 올라왔어. ……나와 같다.”
꾸욱―.
패원강이 창백한 안색으로 주먹을 꽉 움켜쥔다.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으나 시간이 다해 가고 있었다.
패원강이 말하는 ‘그’가 누군지.
그가 왜 하늘의 실수라고 부르는 조서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니. 나는 당신과 같지 않소.”
“특별하다는 소린가……?”
“그 반대요. 무산학관의 둔재. 또래 친구들의 비웃음을 사던 내가 여기까지 온 건,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운이 따라 주었기 때문이오. 세상을 돌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한 것도 도움이 되었지.”
장기린이 그를 거둬 주지 않았다면?
추룡이 그를 끌고 다니면서 세상 경험을 시키고 성장시켜 주지 않았다면?
그가 이런 곳에서, 천하 최고의 후기지수에게 이런 인정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운이라……. 세상 경험…… 하핫, 재미있군!”
껄껄 웃은 패원강이 입에서 피를 주르륵 흘렸다.
파르르 떨리는 어깨.
아지랑이처럼 뜨거운 김을 뿜어내는 그의 육신이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펄떡 경련했다.
촤아악―.
패원강의 상의가 갈가리 찢겨 나갔다.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한 침투경과 내상이 밖으로 뿜어진 것이다.
패원강은 무릎을 털썩 꿇고 고개를 푹 숙였다.
툭. 툭.
그의 입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무상!”
크게 놀란 섭주해가 달려온다.
천무련의 무인들도 마찬가지다.
지금껏 애써 참고 있던 비학조와 청죽조의 무인들이 패원강의 주변을 철저히 둘러싼 채 조서인을 향해 적의를 뿜어냈다.
‘아프다. 통배권이…… 혈도를 찢어 놨어.’
조서인은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온몸의 혈도마다 누군가가 두꺼운 단검을 쑤셔 박아 놓은 것처럼 통증이 심했다.
안색이 창백해졌을 것이다.
그래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조서인은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하며 창을 수습해 비스듬히 아래로 늘어뜨렸다.
“조서인.”
패원강이 죽지 않았음을 확인한 섭주해가 깊은 고뇌에 빠진 얼굴로 다가왔다.
“무상을 쓰러뜨린 너를 붙잡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걸로…… 너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내 손을 벗어났다.”
섭주해의 목소리는 씁쓸했다.
“이제부터 나가면 너는 많은 것에 쫓기게 될 것이다. 정말로, 감당할 수 있겠나?”
“물론.”
조서인은 단호하게 답했다.
“난 친구를 만나러 가려는 것뿐이다.”
잠시 시선을 마주한 뒤, 조서인은 묵묵히 등을 돌렸다.
“그래, 너는 늘 그렇게 말했지.”
온갖 감정이 다 뒤섞인 섭주해의 중얼거림이 나직하게 들려온다.
조서인은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이제 천무련의 방벽은 넘었다.
남은 것은 소호 한 사람뿐.
‘간다. 소호야. 기다려.’
조서인의 시선은 소호가 적양문과 만남을 가지러 갔다는 북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