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15화
제46장 염왕지계(炎王之計) (1)
조서인은 꿈을 꾸었다.
모든 것들이 마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선명했다. 화창한 햇빛과 몸을 살랑살랑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콧속으로 파고드는 풀 내음과 옆에서 까르르 환하게 웃는 소호까지. 조서인은 이게 꿈인 걸 알고 있으면서도 멍하니 그 모습을 다시 한 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백검회라는 단체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들은 가면을 쓴 무인들이었고 왕진을 타도하겠다면서 백린탄이라는 흉악한 암기를 마구 사용하여 강호를 어지럽혔다.
그때의 조서인은 어렸다. 무산학관에서 오랫동안 공부만 하다가 처음으로 소호와 함께 무림에 출두했을 때가 아닌가.
두 사람 모두 소년다운 정의감에 불타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에 의미가 있는 무언가를 해내고 싶었다.
그런데 세상일이란 참 기묘하여 예측할 수가 없다. 백린탄에 대한 정보를 쫓다 보니 무림의 세계가 아니라, 술법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도인(道人)을 만나게 되었다.
낙양 북방의 백단장(伯端莊).
호광진인이라 불리는 노인은 대단한 도력을 지닌 도사였다. 그는 소호와 조서인을 자신의 장원 안에 들여보내 주었고, 그곳에서 신묘한 힘을 선보였다.
“패도(覇道)의 핏줄을 타고났으나 그 안에 담긴 것은 순전한 협(俠)인가. 허나 협기를 가진 이는 역사에서 영웅이 되기도 했고, 천하에 둘도 없을 흉신악살이 되기도 했다. 네가 어느 쪽 길을 갈지는 너의 마음에 달려 있을 터. 처음엔 네가 지닌 신기(神器) 때문에 망설였으나 만나 보길 잘했구나.”
당시 호광진인이 소호에게 해 준 말이다. 그 날 호광진인은 소호에게 기묘한 술법으로 무언가를 보여 주었는데, 나중에 소호가 말해 주길 두 가지 광경을 보여 주었다고 했다.
하나는 허허벌판에서 황제가 어떤 험악한 무리에게 황금색 용포가 강제로 벗겨지는 비참한 광경이라고 했고.
다른 하나는 평화로운 산간 마을에서 객잔 앞을 빗자루로 쓸고 있는 중년의 사내의 모습이었는데 그 사내가 아버지 장기린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래. 그러고 보면 그때 용포의 꿈은 토목의 변이었구나.’
허허벌판에서 황제가 잡혀간, 대륙사에 유래 없는 사건이 그 광경이라고 생각하면 딱 맞춰진다.
호광진인은 정말로 닥쳐올 미래를 보여 주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광경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언제를 보여 준 것이며, 그 사내는 정말로 장기린이었을까?
조서인이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그 시절의 꿈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호광진인이 연단술과 무공의 기원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고, 그들은 그 가르침이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멍하니 백단장을 빠져나온다.
원래의 기억대로라면 여기서 끝이다.
두 사람은 이 이후에 그들을 덮쳐 온 의문의 무인들과 싸움을 벌인다.
그런데 백단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조서인은 왠지는 모르겠으나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원래 기억 속에선 그 당시에 가만히 서서 배웅해 주었던 호광진인은 주로 소호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바로 이 순간.
호광진인은 조서인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조서인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아이가 패도의 핏줄 아래 순전한 협기를 타고 난 것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아이야. 너의 짐이 무겁겠구나. 정명한 마음에 용의 기운을 가진 너로서도 힘들 것이다. 마음을 열거라. 그리고 너 자신을 믿거라. 그렇게 하면 그 아이를 구할 길이 열릴지니.”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호광진인이 검지와 중지를 모은 검결지로 조서인의 이마를 살짝 짚듯이 밀었다.
세상이 점멸한다.
오 층 전각에서 떨어지는 듯한 끝이 없는 추락감.
그 후.
조서인은 눈을 떴다.
“허억. 허억.”
조서인은 허우적거리면서 팔을 휘저으려다가 극심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머릿속이 멍했다.
심장이 뻐근하다.
엉덩이 아래에서 올라오는 냉기 때문에 하체가 굳어 버린 것 같았다.
서둘러 손으로 땅을 짚자 풀잎 위에 차갑게 맺혀 있던 이슬들이 손끝을 적셨다.
새벽녘.
어스름하게 떠오른 햇빛이 나무들 사이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관도 인근의 숲속에서 야생동물처럼 밤을 지새운 것이다.
그는 손에 묻은 물기로 얼굴을 문질렀다.
흐리멍덩했던 잠기운이 싹 달아난다. 차가운 이슬이 그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잠들었었구나…….”
목소리가 갈라진다.
조서인은 헛기침을 하려다가 꾹 참고 마른침만 삼켰다.
천무련에서 나온 뒤로 그를 쫓는 자들이 많았다.
격전을 일으킬 만한 상대는 없었으나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쫓아오다 보니 자잘한 싸움은 지겹도록 겪었다.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하게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조서인은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강호에서 명성을 높이려는 자들.
천무련에 과잉 충성을 하는 자들.
거기에 돈과 명성의 냄새를 맡고 쫓아오는 장사치들과 사파 흑도의 고수들까지.
어찌나 지겹게 뒤를 쫓아오는지 피로를 풀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산속에 숨어 잠시 나무에 기댔던 것뿐인데도 이렇게나 깊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이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몸 관리를 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면서 추룡이 호되게 호통치는 모습이 저절로 상상되었다.
‘이 이상은 무리다. 지금은 잠시라도 조용히 숨어서 쉬어야 해.’
조서인은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스으읍――, 후우―――.”
어스름했던 하늘이 화창하게 밝아질 때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운기조식을 아무 데서나 하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지금은 마음 놓고 내상을 다스리기에는 너무 탁 트인 곳인 데다, 이곳이 아니어도 누군가가 운기조식 중에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주화입마에 빠져서 정말로 큰일을 당할지도 몰랐다.
조서인은 서둘러 여정을 계속했다.
다행히 융통무애하게 전신을 흐르는 진기들이 끊임없이 몸 안을 회전했다.
운기조식을 할 때보다 느리긴 하지만 이대로면 조금씩라도 회복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그 꿈은 뭐였지?’
조서인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꿈치고는 너무 선명했다.
기억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갑자기 호광진인에 대한 꿈을 꾸다니.
그게 몇 년 전의 일인데.
“마음을 열어라. 나 자신을 믿어라.”
마지막에 들은 말을 멍하니 되뇌어 본다.
조서인은 등 뒤에 매고 있는 은자창을 꽉 붙잡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여정을 서두르던 조서인은 관도로 나오자마자 말을 타고 있는 한 무리의 사내들과 마주쳤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지나가던 행인들이 멀찍이 떨어져서 길을 텄다.
조서인은 묵묵히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상대는 스무 명.
모두가 말을 탔고 털이 남아 있는 동물 가죽을 갑옷처럼 상체에 두르고 있었다.
“나를 찾아왔소?”
두목으로 보이는 험상궂은 인상의 거구가 인상을 찌푸렸다.
숫자가 스무 명이나 있는데도 상대가 겁을 먹지 않으니 당황한 것이다.
“그 삐까번쩍한 은색 창을 보니 네놈이 낙일창이렸다!”
조서인은 순순히 긍정했다.
“그렇소.”
“긴말은 않겠다. 그 창을 내놓고 썩 꺼지거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 주마!”
“그대는 누구요?”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두목의 곁에 있는 자가 약장수 같은 목소리로 그의 업적을 줄줄이 읊었다.
“하남에 칩거하던 은거 기인께 무공을 익혔고, 장뇌산에서 산적이 되어…… 아니, 산의 영웅님이 되어 지나가는 행인들을 지켜 주시다가, 최근에는 인근의 산채를 다섯 개나 평정하여 대산왕(大山王)이 되신 흑살창(黑殺槍) 굉료 대인이시다!”
굉료는 머리를 산발로 풀어헤친 데다 앞머리가 상당히 벗겨져서 북방 이민족처럼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부하의 설명이 마음에 드는지 가슴을 쫙 펴고 거드름을 피웠다.
“낙일창! 네놈이 나이에 맞지 않은 명성을 떨치고 있다고 들었다. 목숨을 구하고 싶다면 그 보창(寶槍)을 내게 넘겨라!”
“……창 때문에 나를 찾은 것이오?”
“창을 얻는 김에, 어린 나이에 있을 수 없는 명성을 얻은 네 실체를 까발리는 것도 좋겠지.”
굉료의 부하가 또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굉 대인께서는 청성파의 허세만 가득한 도사 놈들을 때려잡아 혼쭐을 내주신 적도 있다! 정파의 허명 따위에는 주눅 들지 않으신다! 게다가 오면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낙일창은 천무련과도 척을 졌다던데? 그러니 누가 구해 줄 거란 건 꿈도 꾸지 말거라!”
굉료의 부하는 제법 머리가 민활하게 돌아가는 자인 듯했다.
지금 상황에 대한 인식이 제법 뚜렷했다.
무공의 경지에 대해서는 까막눈인 것 같지만 말이다.
‘천무련의 비호가 없으니 자기들이 창을 뺏어 보겠다는 건가. 보물이 굴러다닌다 이거지?’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딱 맞다.
조서인은 화가 난다기보단 허탈했다. 실제로 그동안 쫓아와서 귀찮게 하던 자들도 다들 이 정도 수준의 생각밖에 하질 않았다.
“당신들이 산적이라면, 혹시 녹림수로맹주님도 이 일을 알고 있소?”
“흥! 낙일창 사건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본데, 그런 건 다 과장이 섞인 걸 다 안다. 녹림수로맹과 안면이 좀 있다고 한들 우리와는 상관이 없어. 우리 대산왕께서 다 늙어빠진 노인네가 대장 노릇 하는 연맹 따위의 눈치를 볼 것 같으냐!”
이번에도 굉료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건 좀 심각한데.’
조서인은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추묵환 어르신께서 산채의 지배력을 잃어 가시는 건가? 눈치 안 보고 때려눕힐 수 있다는 건 좋긴 한데.’
여러모로 씁쓸한 이야기였다.
“하나 더 묻겠소.”
“낙일창은 말이 많구나!”
“별호가 흑살창이라고 했는데, 내 창은 보다시피 은색이오. 그럼 별호랑 안 맞게 되는 건데, 당신이 가져가 봐야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건……. 창이 은색이긴 한데…….”
처음으로 부하의 말문이 막혔다.
대신 대산왕이자 흑살창이라 불리는 위대한 굉료가 껄껄 웃으면서 호탕하게 소리쳤다.
“낙일창은 바보로군. 그깟 색깔이야 검은색으로 칠하면 그뿐이지 않은가!”
굉료의 부하들에게서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과연!”
“맞는 말씀이십니다. 두목!”
“낙일창은 생각이 짧구나!”
대부분이 조서인을 비웃는다.
굉료는 한참을 웃은 뒤 두툼한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신음했다.
“생각해 보니 그냥 은색으로 남기는 것도 좋겠군. 은살창이라. 그 별호도 괜찮아 보이는데.”
“그런가. 잘 알겠소.”
조서인은 더 이상은 말을 섞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소중한 은자창을 검게 칠하는 꼴은 도저히 볼 수가 없군.”
휘리릭―.
조서인은 은자창을 뽑아 말 위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굉료를 겨누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오.”
“이놈! 감히 나에게 하는 말이냐!”
“명심하시오. 그리고 다른 자들에게도 알리시오.”
쒜에에에엑―――!
“흐읍?!”
일연적룡무의 번개같은 찌르기가 굉료의 허리띠를 끊어 놓고 물러났다.
히히힝―.
깜짝 놀란 말이 앞다리를 들고 펄쩍 뛰어서 굉료가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조서인은 팔목의 힘만으로 창을 이리저리 휘둘러서 굉료의 몸을 두드렸다.
퍼버버버벅!
“끄아아악!”
굉료는 제법 맷집이 좋아서 처음에는 벌떡 일어섰지만, 그의 ‘흑살창’은 일격에 반으로 뚝 부러져 버렸다. 굉료는 삼 초식도 버티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닥만 데굴데굴 굴렀다.
아무리 혈도가 상해서 약해졌다고 한들, 조서인의 경지는 이런 산적들이 넘볼 만한 수준이 아니다.
다급하게 말에서 뛰어내려 덤비려던 나머지 부하들이 점점 거세지는 조서인의 몽둥이찜질에 깜짝 놀라 주춤거렸다.
조서인은 용의 겁화가 타오르는 듯한 강직한 눈빛으로 모두를 쏘아보았다.
“실력이 부족한 자. 보물을 가질 수 없는 법이오. 목숨이 아깝다면 더 이상 나를 쫓지 마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