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16화
제46장 염왕지계(炎王之計) (2)
“주, 죽여! 다 몰려가서 죽여! 이 일이 알려져선 안 돼!”
약장수처럼 두목 곁에서 떠들던 자가 모두를 선동했다.
스무 명의 사내들이 그 말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온갖 병기들을 흉흉하게 꺼내 겨누는 모습은 천상 산적이고 파락호다.
그 모습 어디에도 강호의 도의(道義)란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가 조서인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어쩌다 보물을 주운 평범한 무인이나 촌부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안 될 사람들이군.”
조서인의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콰직!
“끄아아악!”
조서인의 손속이 잔인해졌다.
굉료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창대로 손등을 찍어 버렸다.
손가락 뼈를 다 으스러뜨렸으니 평생 젓가락질도 힘들어질 것이다.
번쩍!
조서인의 손끝에서 은광이 뻗어나갔다.
일연적룡무 제이식.
십여 자루로 늘어나 버린 환창이 일순간에 주변을 포위한 산적들을 두드린다.
커다란 태풍이 강물을 휩쓰는 것과 같았다.
손목, 머리, 어깨, 허리, 다리.
압도적인 기세로 후려치는 창날에 넓적한 대도가 질그릇처럼 박살나서 주인의 몸에 파편이 박혔다.
“으아악!”
비명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조서인의 움직임은 한 줄기 바람과도 같다.
지이잉―.
조서인의 손안에서 빙빙 회전하던 창대가 뒤를 노리고 덤벼 오던 산적의 명치를 찔렀다.
“칵.”
창대에 전해지는 감촉이 묵직하다.
갈비뼈가 너댓개는 부서졌을 터.
조서인은 사내가 토해 내는 피가 섞인 기침을 비스듬히 피하며 창대로 목덜미를 후려쳤다.
이번엔 조가창법.
창법의 기본인 육합(六合)과 팔모(八母)를 정확하게 따르는 절도 있는 창격이 허공에 은색의 반월을 그렸다.
철검이 부러지고 갑옷이 찢어졌다.
옆을 노리던 창봉은 반토막이 났으며 붕붕 휘돌리던 유성추는 정확히 창날에 찍혀서 허공에서 무게추가 박살이 났다.
“이 무슨?”
사람들이 경악하는 것도 당연하다.
조서인은 그야말로 양 떼 속의 호랑이처럼 압도적이었다.
단 한 순간도 멈추거나 머뭇거리는 법이 없었다.
일 초식부터 십 초식까지.
앞으로 전개할 움직임이 다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것처럼 한 시도 쉬지 않고 스무 명의 산적들을 풀처럼 베어넘겼다.
“으아아!”
마지막의 마지막.
약장수처럼 바람을 잡던 사내가 발악하듯 창을 찔러 온다.
어찌 보면 이 사내야말로 싸움의 근본적인 원흉이나 다름 없다.
건곤조화신공의 유장한 내력이 은빛 창날을 단단하게 감쌌다.
패원강과 싸울 때에 비하면 그야말로 태양 앞의 반딧불처럼 미약한 진기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아서야 쓰겠는가?
콰직!
“끄아악!”
찔러 오는 창끝을 은자창의 창끝으로 마주 찔르자, 달변을 토해 내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절규하면서 부여잡은 손목이 힘없이 덜렁거린다.
쇠로 된 창날이 우그러진 채 바닥에 뒹굴었다.
“자, 잠깐……!”
뻐억!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애원하려던 간신배 같은 사내는 조서인에게 창대로 얻어맞고 바닥에 처박혀 기절했다.
“스으읍. 후우우―――.”
조서인은 창날에 묻은 피를 털어낸 뒤 호흡을 가라앉혔다.
싸움은 고작 반각 만에 모두 끝났다.
주변에는 온통 신음하고 정신을 잃어버린 산적들만 한가득이다.
멀리서 지켜보던 행인들이 하나같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조서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낙일창이 엄청난 고수라더니.”
“진짜였네. 진짜배기야.”
모든 것을 지켜보았으니 행인들 사이엔 소문이 퍼져나갈 것이다.
낙일창은 혼자서 스무 명이 넘는 무인들을 반각도 되기 전에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고수라고.
이미 격이 다른 고수라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공을 지녔다고 알아서 소문을 내줄 것이다.
“으음.”
가슴이 뻐근하다.
준비 운동도 안 될 만큼 약한 조무래기들을 상대했음에도 온몸이 아팠다.
‘역시,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어.’
통배권의 후유증은 아직도 유효했다.
조서인은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당당한 얼굴로 자리를 떠나갔다.
북경으로 향하는 조서인의 고된 여정.
그 시작을 알리는 첫 행보였다.
***
천무련이 비밀리에 쉬쉬한다고는 하지만 문상전이 무너지고 패원강이 중태에 빠진 사실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천무련에 파란을 일으킨 사람이 낙일창이라는 소문은 순식간에 강호 전역에 퍼져 나갔다.
유명세가 커지면 좋은 점은 이제부터는 어중이떠중이 약자들은 덤비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쁜 점은 그 반대다.
이제부터 당당하게 덤비는 자들은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강자들이 분명했다.
“우린 화봉쌍살(華峯雙薩)이라고 한다. 나는 큰형인 화보살이고, 여기 동생은 봉보살이다.”
쌍살의 살은 죽일 살(殺)이 아니라 보살 살(薩)자를 쓰는 자들이었다.
조서인은 그들을 잘 몰랐지만, 기주의 화봉쌍살이라고 하면 명문 무파 출신들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합격술의 고수다.
나이는 삼십 대 중후반쯤으로 보였다.
화보살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자는 이름에 꽃 화자가 들어가듯 상당히 잘생긴 사내다. 반대로 봉보살이라 소개된 자는 산봉우리처럼 뾰족한 민머리에 커다란 덩치를 지닌 곰 같은 인상의 호한(豪悍)이었다.
누가 봐도 두 사람은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을 것처럼 달라 보였는데 형제라는 점이 신기했다.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묻곤 하니 미리 말하도록 하지. 우리 둘은 한 어머니의 배 속에서 나온 친형제가 맞다. 아버지도 같은 분이야.”
분위기를 풀려는 건지.
아니면 태생적으로 유쾌한 성격인지.
씩 웃으면서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밉지는 않다. 그러나 조서인은 웃을 수 없었다.
지난번의 대산왕 굉료를 시작으로 지금껏 이렇게 찾아온 자들만 백 명이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서인이라 하오.”
화봉쌍살의 태도가 정중했기에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지만, 출신이나 별호까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이름 석 자뿐이지만 이제는 만나는 사람마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름이다.
“강호에 명성이 높은 낙일창을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우리는 ‘창’을 무척이나 싫어하지. 그래서 낙일창의 창도 부러뜨리고 싶은데 잠시 시간을 좀 내주겠소?”
“……창을 왜 싫어하시오?”
“창중의 창. 창의 명문가인 양가창에 원한이 있거든.”
정중하지만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화보살과 봉보살은 불가(佛家)의 선장(禪杖)을 하나씩 들고 있었는데 그 끝의 둥그렇고 속이 텅 빈 부분이 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특이한 기병(奇兵)이다.
조서인은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묵묵히 창을 들었다.
“양가창이라…….”
조서인은 무산학관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비참할 정도로 가난했던 어린 시절.
그나마 조서인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은 양가창의 가주뿐이었다.
몰락한 무가의 자식이었던 조서인을 양가에 초대해 신세계를 보여 주던 기억.
잊을 수 없다.
조서인은 아직도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했다.
“양가창에 원한을 가진 사람. 창을 싫어하는 사람과의 대결이라면 거절하지 않겠소.”
“모든 창수는 양가창과 알게 모르게 관련이 있다더군. 그대도 그러한가?”
“관련이 없지는 않소.”
“역시!”
화봉쌍살의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우리 둘은 합격술로 싸우겠네.”
“알겠소.”
“더 묻거나 따지지도 않는 건가? 과연! 대범하군! 명성을 떨칠만해!”
화보살은 감탄한 듯 선장을 들었다.
거구의 봉보살도 선장을 들고 나란히 섰다.
싸움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터엉!
봉보살이 거구의 육체로 먼저 부딪쳐 온다.
가까워지니 그의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것이 보였다.
어깨로 들이받을 것만 같은 기세의 돌격.
봉보살의 몸에 창이 닿을 때쯤에 그는 선장을 휘둘러 조서인을 왼쪽으로 밀어내려는 듯이 움직였다.
쩌엉!
은자창을 가볍게 휘둘러 봉보살을 떨쳐냈다.
꽈아앙!
땅이 움푹 팬다.
가볍지 않은 내공을 담았기에 쉽게 떨쳐낼 거라 생각했는데, 봉보살은 천생신력을 발휘해 묵직하게 받아 냈다.
‘힘이 강해. 상상 이상이다.’
조서인이 약해진 상태라 그런 걸까.
손에 느껴지는 충격만으로 따지자면 마치 대미미가 생각날 만큼 완력이 강했다.
봉보살은 어깨와 승모근을 부풀리면서 끝까지 달라붙었다.
선장을 휘두르는 기세가 험악했다.
도끼로 나무를 패는 듯한 모습.
정교하지는 않지만 막강한 힘이 실려 있으니 쉽게 상대할 수 없다.
조서인은 반보 물러서서 긴 창으로 몸을 찌르려다가 움찔 멈춰섰다.
파라라락―.
어느새 비조처럼 빈틈으로 파고든 화보살이 선장을 휘두르는 척을 하다가 둥그런 고리를 조서인의 창끝에 쑥 걸어 버렸다.
“잡았다!”
채애앵!
화보살이 창에 고리를 거는 순간, 봉보살도 창에 고리를 걸었다.
끼릭―.
끼기기긱―.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조서인의 창을 사이에 두고 양옆에서 선장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조서인은 자신이 사냥감이 되어 버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화보살과 봉보살은 냉정한 사냥꾼이었다.
그들은 조서인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그의 반응을 대비하고 있었다.
까드득!
조서인이 강하게 힘을 줘도 창에 걸린 고리가 빠지질 않는다.
왼쪽을 빼려 하면 오른쪽에서 힘을 준다.
반대로 오른쪽으로 빼려 하면 왼쪽에서 힘을 줘서 버틴다.
화보살과 봉보살의 조화가 기가 막힐 지경이다.
두 사람 사이에 전음으로 끊임없이 대화를 하나 싶어서 목울대를 자세히 봤는데, 그들은 전음을 서로 주고받지 않았다.
그저 눈빛과 습관.
합격술을 함께 단련한 오랜 경험으로 서로의 마음을 자연스레 아는 것처럼 보였다.
채애앵!
조서인은 허리를 돌리고 창대를 힘차게 튕겨 보았다.
한 발 물러서려는 순간 화봉쌍살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한 걸음을 움직이면 딱 한 걸음을 다가온다.
조서인은 생각보다 화봉쌍살이 상대하기 까다로운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화접목의 경지가 높구나. 태극검을 상대하는 것 같아. 그런데 이런 식이면 공격은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의문은 금방 풀렸다.
봉보살이 다시 조서인을 향해 돌진해 온 것이다.
까드득―.
창대에 걸린 선장에서 삐걱거리는 쇳소리가 났다.
창대에 그 큰 몸을 기대더니, 봉보살은 그 길고 두꺼운 다리로 번개 같이 각법을 날려왔다.
‘이건……!’
무기를 붙잡아 두고 발로 걷어찬다.
예전에 도박장의 문지기와 겨뤘을 때 본 것 같은 극도로 실전적인 초식이었다.
후우웅―.
조서인이 철판교의 수법으로 상체를 젖히자 코앞으로 봉보살의 넓적한 발바닥이 지나갔다.
촤아악―.
동시에 화보살은 바닥을 빗자루로 쓸 듯 하단차기를 날려왔다.
일시적으로 발을 띄워 하단 차기를 피한 뒤, 잠시 창을 놓고 양손의 쌍장으로 바닥을 뒤로 후려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놓칠 뻔한 창은 금방 다시 붙잡았다.
“과연.”
상대하기가 까다롭다.
만약 조서인이 초식의 싸움만 고집한다면 하루 밤낮을 싸우더라도 화봉쌍살은 끈질기게 버틸 것이다.
이들은 집요했고, 사냥감을 몰아붙이는 재능이 있는 자들이다.
기공(氣功)을 쓰지 않고는 승부를 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소.’
고오오오―――.
조서인이 여유가 있을 때 만났다면 좋았을 것이다. 무공의 약점을 극복하는 일, 창술을 발전시킬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는 건 조서인이 매우 좋아하는 수련이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조서인의 상황은 최악에 가깝다.
건곤조화신공의 유장한 내력이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창으로 흘러 들어갔다.
은자창.
은빛 창날에 강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쩌어엉!
한 마리의 용처럼 창대가 용틀임을 했다.
꿈틀.
좌우로 몸을 떨자마자 양옆에서 강하게 옥죄던 선장 두 개가 일거에 끊긴다.
“흐읍!”
“이런!”
화봉쌍살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쩌어엉!
뻐억!
화보살은 선장이 반으로 뚝 부러진 채 허리를 얻어맞았다.
봉보살은 창대에 어깨를 얻어맞으면서도 꾸역꾸역 거리를 좁혔지만, 조서인이 창대를 걷어차서 그 반동으로 턱을 올려치는 순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크으윽.”
“으음.”
터엉!
조서인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로 걷어차는 화보살의 발을 맨손으로 덥석 붙잡았다가 뒤로 밀어 버렸다.
바닥을 나뒹굴 화보살의 안색이 시체처럼 하얗다.
갈비뼈가 세 개나 부러졌으니 지금 숨 쉬기도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덤벼온 것이다.
“중간까지…… 좋았는데…….”
화보살이 숨을 헐떡인다.
조서인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창을 회수했다.
“화봉쌍살. 강했소. 그러나 창수들에게 무조건 싸움을 거는 건 고치는 게 좋을 것이오. 무척이나 강한…… 그런 사람도 있으니.”
“본인의 이야기인가?”
“아니오. 나보다 강한 창수들이 내가 알기로만 세 명이나 되오.”
“흐흐. 천외천인가. 충고까지 해 주시고……. 물러터졌군. 고맙소……. 많이 배웠…….”
화보살은 끝까지 말을 마치지 못하고 뒤로 벌렁 넘어갔다.
조서인은 쓰러져 있는 화봉쌍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습격해 오긴 했으나 악한 자들은 아니었다.
괴짜였을 뿐.
“으음.”
가슴이 저리다.
조서인은 후회했다. 기공을 써서는 안 되었는데 또 쓰고 말았다.
온 몸에서 혈도들이 날뛰는 게 심상치가 않았다.
“이건…… 위험한데…….”
화봉쌍살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쯤 조서인은 철요대에 넣어 두었던 구명환을 꺼내 꿀꺽 삼켰다.
하나뿐인 명약인지라 더 버텨 보려 했으나 여기가 한계였다.
관도의 나무에 손을 짚고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지나가던 행상인들이 슬금슬금 조서인에게로 다가왔다.
그들 중 가장 앞에서 쟁자수처럼 짐을 매고 있는 자의 얼굴이 어쩐지 눈에 익다.
동네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어딜 가나 한 명쯤은 있을 법한 평범한 중년 남성의 얼굴이다.
“이런.”
그런데 그 사내의 얼굴을 보고 조서인은 폐부가 싸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싸움이 연이어진 극한의 상황.
몸속의 내공이 날뛰는 이때, 저런 최악의 살수를 만나다니.
“청조…….”
야조탑이라는 이름의 살수 문파 출신.
천무련에 들어간 특급 살수.
청조(靑鳥)가 조서인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