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48화 (677/686)

22권 17화

제46장 염왕지계(炎王之計) (3)

“왜 놀라는 것이오?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지 못했던 건가?”

청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는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고, 입술은 굳게 다물었다.

조서인은 가만히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려 보았다.

그가 낙일창이라는 별호를 얻을 때쯤의 일이다.

청조는 살수로서 만박서생의 목숨을 끈질기게 노렸었다.

조서인은 그런 만박서생을 지켜 주었고 청조는 조서인에게 이 일에 더는 관여하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그때는 몰랐다.

청조가 따르는 ‘그분’이 소호였는지 말이다.

“소호…… 아니, 섭주해가 시켰습니까?”

“아무도 내게 지시하지 않았소. 나는 천무련이 아니라 그분만을 따르니까.”

“그럼 소호가……?”

청조는 충격을 받은 듯한 조서인의 얼굴을 보며 비웃었다.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하더니 헛소리였군. 어디 그분이 그런 걸 부탁할 분이던가?”

“……!”

“그 안심하는 얼굴이 더욱 역겹소. 친구의 무엇을 의심했으며, 무엇에 안심하였는가.”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후벼 판다.

청조의 말은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당신에게 분명히 경고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가 해 온 일들을 돌아보시오. 고집불통에 외골수. 당신은 당신이 해 온 일들이 옳다고 진심으로 생각하시오?”

“나는…….”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지는 법이다.

극심한 내상.

피폐해진 심상으로 끝까지 신념을 지켜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조서인은 마음을 굳게 잡았다.

“친구가 옳지 않은 길을 간다면 막을 겁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습니다.”

“그 옳고 그름은 누가 정하는 거요?”

“내가 정합니다. 누구나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 이것이 협의지도에 맞는 일인가, 아닌가. 누구나 느낄 수 있어야 협입니다.”

협이 아니기에.

소호가 의롭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을 원치 않기에, 조서인은 그 어떠한 벽에 부딪히더라도 마음을 꺾지 않는다.

“말이 통하질 않는군.”

십 보.

열 발자국이 떨어진 거리에서 청조는 멈춰섰다.

“그분은 늘 어둠 속에서 살아오던 내게 빛과 같았소. 이 지독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셨지.”

청조는 신을 믿는 신자처럼, 열정적인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그분이 가는 숭고한 길을 돕겠다고 천지신명께 맹세했소. 나와 함께 온 저들도 모두 마찬가지요. 다 같은 생각이지. 앞으로도 우리는 그분이 손을 더럽히지 않도록 만들 것이오. 그분의 앞길을 막는 것은 무엇이든 부술 것이며, 그분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자는 갈기갈기 찢어 저잣거리에 머리를 내걸 생각이오.”

극도의 충성심.

광신적인 신념.

그것이 지금의 청조를 설명하는 말이다.

조서인은 그의 눈빛에서 어둡게 들끓고 있는 광기의 불꽃을 분명히 보았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친구가 아니오. 그분의 명예를 더럽히는 배신자이며, 쓸데없는 고집으로 대사(大事)를 망치고 매사에 그분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장애물이오.”

“내가…… 소호의 장애물이라고……?”

“그렇소.”

조서인은 은자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청조의 목소리에 열기가 더해 갔다.

서늘한 살기가 흐른다.

평범한 행상으로 위장하고 있던 청조의 부하들이 제각각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었다.

싸움 직전의 공기가 피부를 따끔따끔하게 찌르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제거한다면 그분은 나를 미워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감수하겠소. 미움을 받으며 손을 더럽히는 것 또한, 내가 맹세한 바이니.”

열정.

신념.

희생.

청조는 진심으로 자신을 숭고한 대의를 위한 순교자로 믿고 있었다.

“낙일창 조서인. 무상 패원강에게 내상을 입고, 수십 명의 조무래기들을 상대하면서 내상은 점점 더 심해졌지. 내가 왜 당신이 숲에서 쓰러져 자고 있을 때 죽이려고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아시오?”

“……!”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도 보고 있었다니.

큰 충격이다.

청조는 처음부터 조서인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확실히 죽일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서인의 머리 위와 바닥 아래에 칼날이 교차했다.

채애앵——.

“……!”

서걱!

조서인은 본능적으로 몸을 튕겨 머리 위에 떨어지는 칼날을 막았다.

하나는 막았으나, 지둔술을 펼쳐 바닥에 땅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던 살수의 칼날까진 피하지 못했다.

검게 칠한 칼날이 비 온 뒤의 죽순처럼 바닥에서 쑥 솟구친다.

발목에서부터 종아리 중반까지 피부가 쩍 갈라진다.

“흡.”

완전히 허점을 찔린 셈이다.

눈앞에 있는 청조만 경계하다가 암습에 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발목이 잘리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이제 빠르게 도망치는 건 선택지에서 사라져 버렸다. 뼈아픈 손해다.

으득—.

조서인은 근육에 힘을 줘서 최대한 출혈을 막았다.

이를 악문다.

고통은 기합으로 이겨냈다.

허공에서 유려한 동작으로 창대를 돌려 바닥을 내리찍었다.

푹—.

뼈와 살을 가르는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바닥이 꿈틀거린다.

파아앗!

다시 한 번 솟구치는 칼날을 창대로 후려치면서 이번엔 더 강한 힘으로 창날을 땅속에 박아 넣었다.

쒜에에엑———!

문제는 지금 이곳에 살수가 두 명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관도 안쪽에서 세 명의 살수들이 튀어나왔다.

하나같이 몸놀림이 가볍다.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암습을 가한 살수들은 다섯 명.

거기에 행상으로 가장한 무리까지 합하면 청조까지 합해서 스무 명이 추가된다.

이 정도면 살수들의 습격치곤 대규모 살행이다.

‘대체 어떻게?’

다급한 순간이지만 조서인의 머릿속을 꽉 채운 것은 그를 습격한 살수들에 대한 의문이었다.

땅까지 파서 기다리기엔 시점과 장소가 너무 절묘하지 않은가.

그들은 조서인이 화봉쌍살이랑 어떻게 싸울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지쳤으며, 어디쯤에서 숨을 고르며 휴식을 취할지 다 예상을 했다는 건가?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촤아악—.

푸확!

고민할 틈은 없었다.

조서인은 어깨가 찔리고, 허리를 베였다.

고통이 점점 강해진다.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통배권의 내상이 지금까지도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챠하앗!”

살수들의 칼날은 빠르다.

찰나의 찰나를 가로지르는, 그런 감각적인 정교함이 있다.

그건 일반적인 무인들과는 다른 박자다.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한 박자.

심장이 쿵쾅거리는 그사이.

흩날리는 바람에 살짝 눈을 감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눈길을 빼앗기는 그런 찰나를 노리고 덤벼드는 자들이 살수가 아니던가.

채애애앵!

조서인은 창을 크게 휘둘러 공간을 만들어 낸 뒤 오히려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옷깃이 잘려 나간다.

예상보다 검술이 훨씬 정교했다.

촤아아악!

팡!

단검이 날아오고, 뒤쪽에선 올가미를 던졌다.

발목을 노리고 채찍도 날아왔다.

채찍은 한 발을 들어 피하고, 단검은 쳐 내고, 올가미는 창끝으로 긁듯이 올가미를 휘저어서 빼냈다.

둘러싼 다섯 명에게서 수십 번의 공격이 찰나에 날아왔지만 조서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묵묵히 쳐 내고, 비껴 내고, 떨쳐 냈다.

최악의 상황.

약해진 몸 상태로도 철벽과도 같은 방어를 선보인다.

조서인은 채찍이 회수되기 전에 창끝으로 찍어서 잘라 내고, 올가미를 던진 자의 명문혈과 목덜미를 창대로 찔렀다.

빠박!

짧게 끊어치는 이중 타격에 목이 비정상적으로 꺾인 살수가 무너져 내린다.

찌이잉—.

처음에 입은 하체의 상처 때문인지 다리가 떨렸다.

바깥쪽에서 상단처럼 위장한 채 포위하고 있던 살수들은 바로 그 순간에 참전했다.

짐수레를 덮고 있던 천을 벗겨내자 그 안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커다란 쇠뇌를 겨누고 있는 세 명이 드러났다.

“쏴라!”

피슈슉—.

촤르르르륵—.

마치 작살과도 같은 두꺼운 화살이 조서인과 다섯 명의 살수들을 향해 날아왔다.

세 개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화살 뒤에 묶여 있던 그물이 어부의 어망처럼 허공에서 펼쳐졌다.

확 펼쳐진 그물이 눈앞을 채우는 모습은 마치 벽이 하나 세워진 것처럼 압도적이다.

“이런?”

어깨와 허리가 검에 베였을 때도 당황하지 않았던 조서인이 처음으로 당황했다.

날아온 화살들이 조서인이 아니라 양옆에 있던 살수들의 몸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채앵—.

조서인에게 날아온 화살은 창대로 비스듬히 쳐 냈다.

퍼버벅!

살이 뚫리고 피가 튀는 모습이 섬뜩하다.

다리의 상처 때문에 빠르게 움직일 수 없던 조서인은 그 후에 치솟는 그물을 속절없이 뒤집어썼다.

잘라 내면 되겠거니 했는데 그물의 재질이 생각보다 단단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구렁이처럼 온몸을 조여 온다.

조서인은 청조와 그 주변의 살수들을 보았다.

동료가 자기들이 쏜 화살에 꿰뚫리고,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데도 지켜보는 자들의 시선은 너무나 냉정하다.

토끼를 사냥할 때도 저것보다는 시선이 따뜻할 듯싶었다.

“청조…….”

쒜에에엑——!

청조는 바로 그 순간 움직였다.

결정적인 순간.

목숨이 경각에 달한 바로 그때 청조는 번개 같은 몸놀림으로 검을 찔러 왔다.

화아아악———.

조서인이 건곤조화신공으로 마지막 힘까지 모두 끌어 올린 것은 바로 그 때다.

콰드드득——!

은자창이 회전하고, 쇠 재질이 섞인 그물이 갈기갈기 찢겨 나간다.

청조는 비조처럼 빠른 신법으로 조서인의 공격을 피해 냈다.

빨랐다.

감각적인 무예.

평생 동안 지속한 살행으로 다져진 날카로움이 그 동작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푸욱—.

청조의 검이 복부를 관통했다.

조서인은 차가운 검날이 피부에 닿는 순간부터, 내장을 관통해 뒤로 빠져나가는 것까지 모든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호흡이 어긋나며 역류한 피가 입술 사이로 울컥 흘러넘친다.

“큭.”

위기의 상황.

극한의 찰나일수록 조서인은 인내심을 발휘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한발 더 나아가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게 바로 지금이다.

그의 사부가 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립한 무공이, 그리고 추룡에게 배운 실전의 요령들이 온몸에 살아 숨 쉬며 그 시점을 말해 준다.

‘한 번 더!’

조서인은 손목의 혈도를 한 번 더 폭발시켰다.

콰아아아———.

그물이 칭칭 감긴 창대가 엄청난 기세로 회전했다.

조서인은 이를 악물었다.

청조는 창끝은 피했으나, 정작 자신들이 던졌던 그물의 파편은 피하지 못했다.

촤아아악!

그물에 손목이 휘감긴 청조가 휘청— 중심을 잃는 순간.

조서인은 창을 손에서 잠시 놓았다가 다시 붙잡았다.

창대를 짧게.

그 상태로 청조의 옆구리에 창을 세게 박아 넣었다.

푸욱!

“후우, 후우.”

손의 감각은 확실했다.

조서인은 가쁘게 숨을 토해 냈다.

청조의 움직임도 멈춘다.

온 세상이 침묵하는 이때.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서로를 향했다.

“역시, 당신은 위험하다.”

청조는 눈을 번뜩였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음에도 차가운 눈빛에는 변화가 없다.

‘끝인가?’

조서인은 마지막을 직감했다.

이제는 정말로 한계다.

몸에 난 상처가 몇 개인지 셀 수도 없다. 그물을 찢느라 폭혈공으로 혈도를 폭발시켰으며, 몸 안의 내공은 엉망진창이다.

청조는 옆구리가 관통당한 상태에서 조서인의 가슴을 걷어찼다.

반동으로 복부에서 검이 빠져나간다.

텅.

등에 닿는 땅바닥이 너무나 차가웠다.

“큽.”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고개도 돌릴 수가 없다.

고통스러워하는 청조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마무리를, 후우, 지어라.”

그의 명령에 살수들이 벌 떼처럼 달려온다.

개미 떼에 잡아먹히는 말벌처럼 이렇게 최후를 맞이하는가?

그러나.

북경으로 향하는 관도.

은자촌에서 달려온 한 사람은 조서인의 최후를 지켜볼 마음이 없었다.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

차분하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에 분노가 담겨 있었다.

“당신은?”

청조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놀란 것은 조서인 또한 마찬가지다.

숨도 쉬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있다.

꿈에서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한 사람을.

조서인은 충격과 반가움에 몸을 떨었다.

‘사부님?’

장기린.

무쌍귀가 다시 강호에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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