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18화
제46장 염왕지계(炎王之計) (4)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대체 어떻게……?”
청조는 자신이 큰 상처를 입고 죽어 가는 것도 잊어버린 듯했다. 당황하여 숨까지 헐떡인다.
당연하다.
무쌍귀 장기린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사신(死神)이 눈앞에 있다.
어찌 태연히 서 있을 수 있겠는가.
‘사부님.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조서인 역시도 온갖 의문에 휩싸였다.
이곳은 어떻게 알고?
은자촌에서 왜 여기까지?
온갖 의문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고 싶지만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조서인은 그저 청각에만 의존한 채 촉각을 곤두세웠다.
“제자의 위기다. 나서는 건 당연한 일.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물러나라.”
짧은 말 속에 담긴 위압감이 엄청났다.
청조는 말을 잃어버렸다. 천하 만물이 숨을 죽이는 듯했다.
바람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멀리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들렸다.
고요한 침묵도 잠시.
청조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결연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비각 살수 전원. 기필코! 조서인을 죽여라.”
비정한 결단.
어긋난 신념이 폭주했다.
파바바바바밧——!
스무 명의 살수들이 일제히 몸을 띄우는 소리가 벌 떼의 날갯짓처럼 선명히 들렸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조서인은 자신을 죽이기 위한 청조의 진심 어린 살의에 압도되었다.
기이하고 집요하다.
가슴이 울렁거려 토하고 싶을 정도의 집념이었다.
하나 이곳엔 장기린이 있다.
사람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무신이 제자의 죽음을 지켜볼 리 만무했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군.”
장기린의 평가는 짧았다.
철컹—.
쇳소리가 들리고.
고오오오오————.
공기가 뻥 뚫리는 듯한.
가파른 협곡 아래에 흐르는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났다.
푸화아악—!
콰드득!
콰직!
그 후엔 전력을 다해 달리던 마차 두 대가 서로 부딪쳐 박살 나는 것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흐읍!”
“끄아악!”
비명이 들려온다.
“흐흐흐. 흐하핫!”
청조가 미친 듯이 웃었다.
대체 어떤 싸움이 벌어진 건지.
어떤 광경이 펼쳐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끝났다는 사실이다.
처참한 굉음 끝에 조서인의 코끝으로 진한 쇠 냄새가 들어왔다.
“아…….”
하늘만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조서인의 시야에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새하얀 백창의를 입은 중년 사내다.
한쪽 귀가 없고 사나운 눈매를 지녔으나, 그 눈빛만큼은 명경지수처럼 차분하다.
“사…… 사부……님…….”
우우웅—.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기운이 조서인을 감쌌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어느새 장기린의 얼굴이 가까워져 있었다.
“허공섭물로 사람을 나르는 건 두 번째군. 제자야. 걱정하지 말고 잠시 자거라.”
“사부……님…… 감사…….”
인사를 다 하기도 전에 장기린은 수혈을 짚어 버렸다.
점멸하는 시야.
조서인은 무저갱과도 같은 어둠 속으로 깊게 침잠해 들어갔다.
***
“으음.”
천무련의 총군사 문상 섭주해는 안 그래도 창백한 피부색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마치 올 것이 왔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게 보고를 한 사람은 묵묵히 서서 섭주해의 대답을 기다렸다.
따앙— 땅! 땅!
밖에서는 무너져 버린 문상전을 다시 짓느라 인부들의 고함 소리와 망치질 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천무련 전체가 소란스럽다.
패원강이 빈사 상태에 빠지고, 문상전이 무너진 충격을 아직도 수습 중이다.
모든 사람이 달라붙어서, 최대한 빨리 수습해야 조직이 돌아간다.
섭주해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부군사. 다시 한 번 말해 주세요. 누가 나타났다고요?”
그의 목소리엔 어떠한 충격도 받아들이겠다는 듯한 결연함이 있었다.
“무쌍귀 장기린입니다. 그는 안휘에서 북경으로 향하는 관도에서 갑자기 나타났고, 낙일창을 죽이려던 청조와 비각살수 스물다섯 명이 그 자리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싸움 장소는…… 폭약이라도 터진 것처럼 마차가 박살 나고 땅이 뒤집어져 있었다고 하는군요.”
“아니, 도대체 왜?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셨죠?”
섭주해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삼산현을 지켜보던 하오문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어요?”
“하오문과는 대미미가 ‘실종’된 후로는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있습니다.”
“하긴 그렇겠네요. 개방은요? 개방도 은자촌을 유심히 보고 있던데. 그쪽에서도 누가 나왔는지 전혀 몰랐대요?”
“개방도…… 방익지 사건 이후로는 그리 자발적으로 협조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질문 하나 대답하는 데 한 세월이 걸리는군요. 다음 주쯤은 되어야 은자촌에서 누가 나왔는지 알려 줄 것 같습니다.”
“하아, 정보 집단 두 곳의 미움을 받고 나니 이렇게나 일하기가 어려워지네요.”
부군사 제갈성은 뛰어난 사람이었다.
나이는 삼십 대 초반.
강호오공자 중 한 명으로 불릴 만큼 외모가 번듯하고, 상단전이 극도로 발달한 섭주해와 비교될 만큼 두뇌도 뛰어난 사람이 바로 제갈성이다.
제갈성은 복잡한 안색으로 섭주해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대뜸 물었다.
“총군사, 우리 이제 서로를 꽤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우리가 처음 만나서 논검비무로 승부를 겨뤘던 게 벌써 몇 년 전이니까요.”
“그럼 이제 솔직하게 말해 주시지요. 당신은 제가 패배를 인정하고 천무련에 들어오도록 만든 사람이 아닙니까?”
제갈성은 명문인 제갈세가 출신답게 자존심이 강한 사내였다.
섭주해를 만나기 전까지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머리가 좋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내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일은 흔치 않다.
섭주해는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제가 솔직해 보이지 않았나요?”
“보기에는 솔직해 보입니다.”
“그래요? 그런데요?”
“하나 묻지요. 총군사, 일이 이렇게 될 줄 모르셨습니까?”
“……몰랐죠. 알았다면 제가 대비를 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보고 아는 것을 총군사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폭주하는 청조를 버리신 건 아니고요?”
“…….”
“그 침묵,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군사는 참, 어렵네요.”
“은자촌에서 여기로 정보가 오기는 힘들지만, 여기서 은자촌으로 정보를 보내는 건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그렇지요?”
“…….”
전서구가 날아오지 못한다고 해서, 이쪽에서 보내지도 못하는 건 아니다.
섭주해는 또 한 번 침묵했다.
제갈성은 아예 의자를 끌어와서 섭주해의 건너편에 앉아 버렸다.
“제가 이해가 안 되는 건 그겁니다. 조서인을 버리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은자촌에 서신은 왜 보냈습니까? 이미 버렸다면 청조의 폭주를 가만히 내버려 뒀어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총군사의 의중을 알아야겠습니다. 대체 우리가 어느 쪽으로 가는지 알아야 저도 이책(二策), 삼책(三策)을 짜서 만약을 대비하지요.”
제갈성의 눈빛은 진지하고 진솔했다. 그 모습 어디에도 섭주해를 비난하거나 평가하는 구석은 없다.
두 사람은 똑같이 정도 문파의 대연합(大聯合)을 이끄는 지자(知者)들이었다.
협의에 목숨 거는 순정한 ‘무인’들과는 달리 온갖 것들을 관리하고 최대한 옳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회색 지대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조서인은 이미 내 손을 떠났어요.”
“운에 맡기신다는 겁니까?”
“이렇게 말해 볼까요? 우리 군사들은 서로 책략을 다듬을 때 모든 걸 확률로 말하지요? 정사대전이 일어날 확률은 칠 할. 각지에서 사파들이 적양문에 동조하여 들고일어날 확률은 사 할 미만. 정파가 천무련의 깃발 아래 모두 집결할 확률은 육 할. 이런 식으로요. 그렇죠?”
“예. 그렇지요.”
“크게 싸운 친구가 있습니다. 다시는 얼굴도 보지 않겠다면서 서로 악담을 하고 헤어졌어요. 그런데 얼마 후에 어떤 살수가 그를 노릴 확률이 육 할쯤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부군사는 어떻게 하실래요? 직접 구하러 가기엔 서로 사이가 너무 좋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도 아닙니다. 육 할의 확률이에요. 그런데 그 친구가 죽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자니 그건 경우가 아닌 것 같아요.”
섭주해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저는 결정했습니다. 청조가 습격할 확률이 육 할이라면, 습격을 했을 경우 조서인이 죽을 확률은 팔 할쯤 되니. 친구의 도리로……. 그걸 좀 낮춰 보자고요.”
“그래서 은자촌에 서신을 보낸 것이군요. 그가 죽을 확률을 낮추기 위해.”
“예.”
그제야 섭주해라는 사람의 생각을 이해한 제갈성이 탄식했다.
그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한동안 고민했다.
“그것 참, 절묘한 거리감이군요.”
“…….”
“지극히 군사다운 생각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압니다. 저도 알아요. 의리가 있고 정의로운 행동은 아니지요. 그랬으면 천무련의 힘을 다해서 청조를 막고 그를 구했을 테니까요. 이건 그저, 사람으로서 제가 해야 할 도리만 했을 뿐이지요.”
“어쩐지. 조금 전에 놀라는 건 진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심으로 놀랐어요.”
“산꼭대기에서 돌을 굴려 놓고 그게 그냥 굴러떨어질지, 산사태가 일어날지는 모르고 지켜본 것이었군요.”
“적절한 비유로군요. 부군사.”
“감사합니다. 총군사가 볼 때 어떻습니까? 산사태가 일어난 것 같습니까?”
”설마 그분이 직접 나올 줄은. 그리고 그렇게 빨리 도착해서 조서인을 무사히 구해낼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요. 예, 이건 확실히 산사태가 일어났네요.”
제갈성은 잘못된 한 가지를 지적해 주었다.
“아. 무사히 구해 낸 건 아닙니다. 목격자에 따르면 낙일창은 크게 상처를 입었다고 하더군요. 복부를 검에 찔려서 중상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섭주해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럼 결국 오 할이 되었군요.”
“총군사께서는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큰 상처를 입었다고 한들 그분이 직접 나왔으니 살아날 겁니다. 조서인이 여전히 우리의 일을 방해하는 걸로. 거기에 혹시 그분까지 가세하는 걸 상정해서……. 계책을 다시 짜야겠어요.”
지금껏 세워 놓은 모든 계획을 보강하고 수정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작업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제갈성은 앞으로 있을 어마어마한 작업들을 상상하면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이번 일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입니까? 다음으로 미루면 어떨까요? 적양문은 어차피 함부로 움직이기 힘들 겁니다.”
“…….”
“예, 그렇게 하지 않겠지요. 총군사는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일을 하는군요.”
“…….”
“그래요. 또 아무 말도 안 할 줄 알았습니다. 저는 일단 개방에 우는 소리 좀 하고 오겠습니다.”
제갈성이 웃으면서 떠나가고, 섭주해는 홀로 남았다.
망치 소리가 울려 퍼지는 문상전.
섭주해의 시선은 제갈성의 뒷모습에서 떨어지질 못했다.
***
“으음, 쿨럭! 쿨럭!”
조서인은 극심한 갈증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목과 코가 따끔거려서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눈을 뜨려고 했는데 눈꺼풀이 달라붙은 것처럼 눈이 떠지질 않았다.
조서인은 발작적으로 몸을 한 번 떨었다가 자신이 단단한 침상 위에 얌전히 바른 자세로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위에 눌리는 건가?’
순간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럴 리가 없다.
숨도 쌔근쌔근 잘 쉬어지고 귀신이 보인다거나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다거나 그런 상황이 아니다.
조서인은 건곤조화신공을 끌어 올려 내공을 확인하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예상보다 빠르군. 좋은 일이다.”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조서인은 놀라서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사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