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50화 (679/686)

22권 19화

제46장 염왕지계(炎王之計) (5)

단어 하나를 말했을 뿐인데 목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실제로 목소리도 다 갈라져서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났다.

그의 하나뿐인 사부님.

장기린은 그런 조서인을 보며 나직하게 웃었다.

“기다려라. 물을 주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서인은 그사이에 눈을 뜨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눈꺼풀이 단단하게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눈앞에 사부님이 있는데 눈도 뜨지 못하다니.

당황스러운 일이다.

그나마 손에 건네지는 물 한 잔의 온기가 안정을 되찾아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조서인은 물을 받아 들자마자 허겁지겁 삼켰다.

물이 너무나도 달다.

바짝 말라붙은 땅에 물을 뿌린 것처럼, 삼킨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온몸에 스며드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물을 다 마시고 나니 장기린이 이번엔 물에 적신 천을 손에 건네주었다.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멍하니 들고 있으니, 장기린이 그의 손을 붙잡아 수건으로 눈두덩이를 닦아 주었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으면 눈꺼풀이 붙어 버리지. 너무 급하게 뜨면 상처가 생길 거다. 문질러 가면서 천천히 눈을 뜨는 게 좋다.”

“예……!”

수건을 건네주는 장기린의 손바닥은 무척이나 단단했다.

장기린이라는 존재는 조서인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든든한 방패와도 같다.

눈이 뜨이자 비로소 조서인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창밖에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빛이 눈부시다.

뿌옇게 흐려 보이던 시야가 점점 맑아지자 이곳이 산속의 오두막처럼 낡은 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모든 것이 느껴졌다.

그가 누워 있던 곳은 평평하긴 했으나 낡을 대로 낡아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 침상이었으며, 성인 남성이 일어서기만 해도 대들보에 머리가 닿을 것처럼 작은 집이었다.

특이한 점은 벽면에 온갖 말린 풀들이 수십 가지나 매달려 있다는 점이다.

풀을 으깨고 짓이기는 막자사발도 있고, 그 외에 쇠로 만든 집게와 같은 알 수 없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숨을 들이마시니 진한 약 향이 폐부로 스며든다.

“사부님, 어떻게 저를……. 아니, 그 전에,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끄럽습니다.”

정신을 차리자 부끄러움이 엄습했다.

천하에 상대할 자가 없다던 장기린의 무공을 이어 놓고 이런 빈사 상태가 되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당히 이겨 내라고 배웠건만 지금의 모습은 그와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심지어 그 모습을 사부에게 직접 보이다니 이보다 더 부끄러울 수는 없는 일이다.

못난 제자를 보고 실망하시지는 않았을는지.

조서인은 덜덜 떨리는 몸으로 무릎을 꿇으려 했지만 장기린이 만류했다.

“위기에 처한 제자를 버려두는 사부가 어디에 있겠나? 그보다 아직은 회복이 덜 되었으니 함부로 움직이지 말거라.”

장기린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손길로 조서인을 다시 침상 위에 앉혀 버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복부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상당했다. 청조의 검에 관통당한 그 상처다.

물 한 잔을 더 받으면서 조서인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부끄럽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된다.

그리고 그 모습에 또다시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나는 아직 아이였던가. 사부님이 오셨다고 이렇게나 마음이 풀어지다니.’

다 컸다고 생각하며 강호를 제 맘대로 종횡했는데 아직도 한참 멀었던 모양이다.

이리저리 안색이 급변하는 그를 보며 장기린은 어떤 생각을 한 것일까.

그는 가만히 침상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조서인의 건너 쪽에 의자를 끌고 와 차분하게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장기린의 시선이 조서인에게 닿는다.

조서인은 죄스러운 마음에 차마 그 시선을 마주 보지 못했다.

“사람은 늘 과거를 잊어버린다. 그건 옳지 않은 일이지. 날 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듯. 죽을 때까지 완벽한 사람 또한 없다.”

“……!”

“하지만 완벽해지기 위해 노력은 할 수 있지. 나 또한 그렇다. 돌이켜보면 몸서리칠 만큼 부끄럽고 되돌리고 싶은 순간들이 존재한다.”

“사부님께서요……?”

무신이나 다름없는 장기린이 몸서리치게 부끄러운 순간들이라니.

조서인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물론이다. 믿기지 않는 건가?”

“상상이 되질 않습니다.”

“싸움이 있었던 날에는 늘 만신창이였지. 북원의 수괴들과 싸운 뒤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포탄을 정통으로 맞아 반년이나 움직이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은퇴해서 객잔을 연 것 또한 그렇지. 당시 내가 방심해서 반려인 휘연이 큰 상처를 입었을 땐……. 진심으로 모든 것을 후회했었다.”

“아…….”

“그렇다 한들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 그 기억들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법이야. 완벽해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건 기억을 하는 거다. 실수를 기억한다는 건 반성을 한다는 것이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소리다.”

조서인이 아는 한,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무인이 자신의 실수들을 고백하고 있었다.

“사부님…….”

장기린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모든 말들이 피폐해져 있었던 조서인을 위로한다.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당장이라도 무언가가 울컥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사부에게 빈사(瀕死)의 모습을 보인 것이 부끄럽다? 아서라. 완벽을 기하기엔 너는 한참이나 미숙하다. 다치고 실수하는 건 젊은 자들의 특권과도 같은 거다.”

“사부님……!”

얼핏 엄격해 보이지만 너는 불완전해도 괜찮다는 말이니, 이보다 더 따뜻한 위로는 없다.

조서인은 꽁꽁 얼어붙었던 만년설이 녹아내리듯 경계가 허물어져 버렸다.

뚝. 뚝.

다 큰 성인 남성.

그것도 경지에 오른 무인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눈물을 흘렸다.

“저는……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사부님, 사부님과의 약속대로 저는, 저는……. 소호가 잘못하고 있는 걸 막으려 했을 뿐인데……. 미미와도 싸우고……. 주해와도 싸운 데다……. 이제는 뭐가 옳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잘하고 있는 걸까요? 고집만 부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머릿속으로는 이게 옳다고 확신하고 있음에도, 세상 모든 사람이 그가 틀렸다고 손가락질을 한다면?

그건 정말로 옳은 일일까?

모두가 싫어한다면 그 신념을 밀고 나갈 의미가 있는 것일까.

“서인.”

장기린의 목소리는 새벽녘에 어스름하게 깔린 밤안개와 같았다.

차갑지만 포근하다.

그에게는 모든 것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감춰 줄 것 같은 안정감이 있었다.

“네게 해 줄 말이 있다.”

침묵이 흐른다.

목소리에 담긴 무게감이 범상치 않았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조서인은 그제야 장기린의 얼굴을 처음으로 자세히 보게 되었다.

조서인은 장기린의 얼굴을 보고는 너무나 놀라 울던 것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왜 몰랐을까?

장기린은 전에 없이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기절하기 전에 보았던 장기린의 모습과는 또 다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처럼 잔잔한 눈빛은 여전하다.

그런데 눈가의 주름이 짙어진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기운도 예전과 달랐다.

‘약해지셨어……?’

도대체 왜?

어째서인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조서인은 양손으로 무릎을 꽉 움켜쥐었다.

“경청하겠습니다, 사부님.”

장기린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집혼기라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사십 년 전에 최초로 만들어진 집혼기 중 하나를 몸에 이식받았고, 황실을 지키는 신수가 되었다. 기린이라는 이름은 거기서 나온 것이지. 영락제가 지어 준 이름이라 들었다.”

“아…….”

“지금 생각해 보면 집혼이라는 개념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 사람의 혼백을 모아서 어쩌겠다는 건가? 그런 것을 한 사람의 몸에 들이부어 강한 힘을 가지면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그게 점점 강한 힘이 된다고? 그게 이치에 맞을 거라 생각했는가?”

장기린은 전에 없이 신랄한 어조로 비판을 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다만, 세상에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도 힘을 원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로 많을 뿐.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희생만 낳은 실패한 실험이었고, 생존자는 백택과 나. 두 사람뿐이었다. 그건 그걸로 끝났어야 했어. 그런데 그때 살아남은 한 기술자를 왕진이 찾아내면서 두 번째 신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흉이라 부르더군.”

‘도철! 도올! 혼돈! 궁기!’

그 이름들을 어찌 잊을까.

조서인도 선명히 기억하는 자들이었다. 강호에서도 유명했다. 특히 도철이라 하면 아직까지도 이를 바득바득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인간을 벗어난 것처럼 강한 자들.

대부분은 소호의 손에 죽은 것으로 소문이 난, 간악한 왕진의 시대를 상징하는 흉악한 장수들이다.

“나는 도철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만나자마자 나를 잡아먹겠다고 말하며 광기에 휩싸여서 덤볐었지. 그 모습이 항상 마음에 걸렸었다. 왕진을 죽인 뒤에 나는 동생의 도움을 받아 겁쟁이 간옹이라 불리던, 초창기의 집혼기를 만든 자와 만날 수 있었다.”

“그 간옹이라는 자가 살아남은 기술자입니까?”

“그래. 그자는 정신이 이상해져 있더군. 내 기억에 그런 자가 아니었는데, 그때는…… 광기에 가득 차 있었다. 그자는 순순히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두 번째 집혼기는 첫 번째와는 다르다고 했다. 왕진이 애초에 나를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나를 적이자 양식으로 삼도록 만들었다고 하더군.”

“적이자 양식……?”

조서인은 그 순간 번뜩이는 기억이 있었다.

소호가 은자촌에 왔을 때의 이야기다.

집혼기의 힘이 폭주한 소호는, 마치 짐승처럼 굴면서 장기린을 물어뜯을 기세로 적대감을 표출했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소호의 해사한 인품을 생각하면 그렇게 악을 쓰며 덤벼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런데 만약 집혼기에 이미 그런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면?

장기린을 보기만 해도, 도철처럼 폭주하며 덤벼들도록 만드는 귀물이 집혼기였다면?

“그래서…… 그때……!”

조서인은 모든 기억의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간옹은 한 번 집혼기와 동화된 자는 흡수한 영혼을 모두 토해 내기 전까지는 풀려날 수 없다고 하더군. 그리고 더 위험한 말을 했다. 신(神)을 만나는 의식을 때에 맞춰 치르지 않으면 술법적으로 큰 고난을 겪게 된다는 이야기였지.”

“신……이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술법적인 고난이라는 것도 무엇입니까?”

“신은 나 자신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법칙이기도 하다. 술법적인 고난은 신병(神病)과 비슷하다고 했지. 중요한 건.”

장기린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 나갔다.

“소호는…… 이제 고난을 겪을 것이고, 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점이구나.”

“아……!”

집혼기가 폭주하면 폭주할수록, 소호는 장기린을 보자마자 광기에 휩싸여 덤비게 될 것이다. 장기린이 소호를 직접 만날 수 없는 이유였다.

“너는 틀리지 않았다. 소호는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고, 그걸 막으려 한 사람은 소호의 그 많은 지인 중에 너 한 사람뿐이야.”

“사부님……!”

“그래서 나는 네게 모든 것을 넘겨주려 한다. 어찌 보면 천명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진 것을 물려주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장기린의 시선이 조서인에게로 향한다.

아들.

장기린은 조서인을 제자가 아니라 아들이라 말하고 있었다.

“네게 소호를 구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만약의 때가 왔을 때 네게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좋겠구나.”

“제가…… 그럴 수 있을까요?”

“물론이다. 너는 내 하나뿐인 제자. 무쌍귀 장기린의 힘을 이은 아들이다.”

“……!”

장기린은 손을 떠는 조서인을 향해 나직하게 웃어 주었다.

“그 힘으로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너를 존중할 것이다. 이곳에서 본래 만나기로 했었던 신의(神醫)가 없는 것 또한 천명일 테지. 네 목숨을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전하도록 하겠다.”

조서인이 입은 빈사의 상처 또한 천명의 일부인 것인지.

자신의 운명을 깨닫게 된 조서인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 덜덜 떨리는 몸으로 장기린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사부님의 말씀.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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