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20화
제46장 염왕지계(炎王之計) (6)
조서인은 절을 끝내자마자 격한 기침을 토해 냈다.
“쿨럭! 쿨럭!”
폐부가 뒤틀리는 듯했다.
붕대로 감아 둔 복부에서 피가 점점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응급 처치만 했을 뿐 내상과 상처는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용의 내단이 그나마 나를 살려주고 있어.’
조서인이 지금 살아 있는 건 아직 다 녹여내지 못한 용의 내단이 몸 안에서 날뛰는 덕분이었다.
망가진 혈도 사이를 넘나들며 날뛰는 용의 기운이 조서인의 숨통을 틔워 준 셈이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막혀 버린 진기의 흐름은 머지않아 조서인의 숨통을 조여 올 것이다.
지금도 침상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을 뿐인데 그 오장육부가 제각각 비명을 지르지 않는가.
“곧바로 전이대법(轉移大法)을 시작하겠다. 호흡을 준비하거라.”
조서인은 정신없는 상황에 오로지 호흡에만 몰두했다.
장기린이 다가와 명문혈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마치 갑문을 연 것처럼 진기가 쏟아져 순식간에 조서인의 단전으로 흘러들어왔다.
‘아……!’
새로운 경험.
다른 사람의 진기임이 분명한데 똑같이 건곤조화신공의 묘리를 따른다.
진기의 흐름이 점점 빨라진다.
소주천에서 자연스레 대주천으로 넘어갔고, 온몸을 휘돌며 손상된 혈도들을 밀어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상처를 수복시키기 시작했다.
‘집중, 집중하자.’
인생에 다시 없을 기회.
목숨을 살리고, 더욱 높은 경지로 올라설 기연이었다.
조서인은 한없이 자신의 호흡에 빠져들었다.
***
파란 하늘 위에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소호는 문득 섭주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소호가 은자촌에 다녀왔던 때의 이야기다.
조서인은 은자촌에 잘 녹아들어서 아버지의 유일한 제자가 되었다. 은자촌은 소호가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었다. 과거에 소호가 하던 역할은 조서인이 모두 이어받았다.
대석 삼촌의 장작 패기.
추묵환 할아버지가 하는 더덕 캐기.
그리고 커다란 적왕에게 여물을 주는 일까지.
조서인은 소호의 빈자리를 잘 채워 주었다.
그때 이유 모를 충동에 휩싸여 아버지에게 대들었고, 그 후에 자신은 어머니 진휘연에게 등짝을 얻어맞았다.
전에 없던 사건.
사춘기의 일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큰 사건이 소호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그 후에 여러 가지를 찾아보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집혼기.
집혼기가 문제였다.
그리고 왕진이 비밀리에 운영하던 장원에 쳐들어가 간옹을 만나면서, 소호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호 형, 정말로 하실 거예요?”
“응.”
“후회하지 않겠어요?”
“응.”
“후우, 알겠어요. 그럼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욕을 많이 먹겠지만 짧은 방법이에요. 다른 하나는 좀 오래 걸리고 까다롭지만 끝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는 방법이죠. 어떤 걸 할래요?”
“짧은 거. 무조건 짧은 거.”
“정말요?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패 대협에게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어요.”
“괜찮아. 빨리 해내야 해. 무상은 알아서 모든 걸 잘 수습할 거야.”
“패 대협을 믿으시는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진행해 보겠습니다.”
섭주해는 최선을 다해 주었다.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 가며 노력하느라 수명이 줄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르는 사람은 주해에게 욕도 많이 할 것이다.
그 모든 게 소호의 결정 때문이라는 건 모른 채 말이다.
‘미안해, 주해야. 나 때문에.’
소호는 핏빛 혈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있다.
소호의 신(神).
소호와 똑같이 핏빛 혈광이 흐르는 눈을 지닌. 새하얀 털을 지닌 백호가 말이다.
“너는 점점 커지네. 뭘 먹고 커지는 거야? 그동안 내가 죽인 사람들?”
그르릉—.
범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산천초목을 뒤흔드는 법이다.
개가 소변을 지리고, 멧돼지가 도망치게 만드는 위압적인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 호랑이 아니던가.
하지만 소호는 그저 웃음만 지었다.
어차피 저 호랑이는 소호에게밖에 안 보인다.
실험은 끝났다.
정말로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고, 실제로 위력도 가할 수 있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소호의 눈에 보이는 저 호랑이를 본 사람은 없다.
딱 한 사람.
유일하게 섭주해만 호랑이의 존재 정도는 눈치챘었다.
“거대한 사념이 보입니다. 귀신과는 달라요.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네요.”
남해검문 검신의 신기(神氣)를 이어받은 섭주해기에 볼 수 있는 것이다.
술사들의 영역이라고 봐야 했다.
소호는 그에 대한 소양은 없지만 간옹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간옹은 말했다.
신내림 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신내림 의식을 치르면서 황실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면, 그 ‘한계’와 ‘제약’이 신을 제어할 수 있게 도와줄 거라고 말이다.
도철이 그랬고 도올, 궁기, 혼돈이 모두 그랬으니 백호도 안 될 게 뭐 있겠냐는 말투였다.
결론은 황실에 충성을 맹세하라는 소리였다.
자유로운 강호의 무인에게 진짜 황금 갑옷을 입는 황실의 신수가 되라니.
백호대장군.
이름은 좋다.
솔직히 말하자면 소호도 잠시지만 고민이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마음이 바뀐 건 이번 전쟁에 참가하면서다.
주기진.
그 무능력한 사내를 황제로 모시라고?
우스운 소리다.
황제의 매력은커녕 비루함과 무능력함만 잔뜩 보여 준 그는 토목의 변으로 오이라트에 잡혀가 버렸다.
최근에는 적국인 오이라트에서도 쓸모가 없어져서 되돌려보내진다는 말이 나돌고 있으니, 그가 얼마나 무능한지 알만한 일이다.
그런 자를 섬기라?
천무공자 장소호가?
오십만 대군을 이끌고 나갔음에도 적국에게 잡혀가는 그 무능력한 황제를?
“안 될 일이지.”
그렇기에 이곳까지 왔다.
마지막 불꽃.
광기와 제정신을 넘나드는 소호의 흉포한 힘을 ‘올바른 곳’에 쏟아 넣기 위해서.
히히힝—.
소호가 탄 말이 더 이상 움직이기 싫다는 듯이 투레질을 했다.
“가기 싫어? 겁이 나?”
히히힝—.
“그래. 그럴 만하네. 살기가 저렇게 넘실거리는데.”
북경의 외곽.
넓은 관도에 수백의 무인들이 열을 맞춰 서 있었다.
하나같이 일당백의 기세를 뿜어내는 무인들이었다.
모두 일류의 경지를 넘었고, 실전 경험이 풍부한 분위기를 풍겼다.
온몸에 새겨진 흉터와 섬뜩한 눈빛, 그리고 잘 갈린 칼처럼 정련된 기세가 소호를 쏘아보고 있었다.
“천무련주.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갑소이다. 본인은 여기 적화검대를 이끄는 막하승이라는 사람이오. 혹시 들어 본 적이 있소이까?”
소호는 천천히 적화검대의 무인들을 둘러본 뒤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사파제일검을 다툰다는 절영귀검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죠.”
“후훗, 알아주니 영광이외다. 사실 나는 그대와 인연이 있는데, 그것도 알고 계시오?”
“저랑요?”
“나는 살수 출신이외다. 일야회라는 이름의 살수 문파 출신이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소. 일야회에는 두 명의 신(神)이 있는데, 한 사람이 일야회의 전대회주인 묵신(墨神)이고, 다른 한 사람은 당대의 회주인 월신(月神)이라오. 나는 월신과 같은 사부님을 모셨소. 어둠의 신. 묵신께서 나의 사부님이셨지.”
중원 제일의 살수 문파 일야회.
그리고 그곳에서 은퇴하여 은자촌에 있는 묵신이라는 사람의 제자라는 소리였다.
“아아.”
소호는 그제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절영귀검은 묵신 할아버지의 제자였군요.”
“살수 문파에서 손을 씻고 나온 지는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관심은 두고 있었소. 그런데 최근에 죽은 듯이 은거했던 묵신이 일야회로 되돌아왔다더군. 그는 염치도 없이 돌아오자마자 일야회에 한 사람을 지키라고 명령했다고 했소. 그게 누구냐면…….”
“장기린. 맞죠?”
“호오?”
소호는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막하승은 흥미로워하며 수긍했다.
“그렇소. 무쌍귀 장기린이었지. 누굴 죽이는 게 아니라 지키라니. 살수 문파에 호위 임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소. 심지어 그자는 북경의 자금성으로 진격을 하는 무시무시한 인물이었소. 워낙 특이한 일이다 보니 살수계에 소문이 널리 퍼져 버렸다오.”
“그렇군요.”
“그런데 재밌는 건. 묵신은 그러면서 일야회에게 한 사람에 대한 청부는 맡지 말라며 금지를 시키기도 했다는 것이오. 늙은 묵신이 노망이라도 난 것인가? 다들 이해할 수 없었지. 전대회주가 나타나 누군가의 청부는 받지 말라며 윽박지르다니. 그 또한 일야회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오. 자, 천무련주. 아까 무쌍귀를 맞췄든 이번에도 맞춰 보시오. 그게 누굴 것 같소?”
소호는 이번엔 대답하지 않았다.
막하승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바로 그대였소. 천무공자 장소호. 재밌는 일이오. 지켜 달라 한 사람도 장씨고, 청부를 받지 말라고 한 사람도 장씨군.”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막하승은 장기린이 소호의 아버지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재밌는 일이라고 소호는 생각했다.
묵신 할아버지가 장기린과 소호를 지키기 위해 한 일이 오히려 소호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으니 말이다.
소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막하승을 바라보았다.
막하승은 차가운 얼굴로 자신의 검에 손을 얹었다.
“나는 적양문의 사람이오. 내가 알게 된 모든 일은 태양염왕께 보고할 의무가 있지. 그 모든 것을 알게 된 태양염왕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막하승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성이 장씨인 천무련주는 너무 위험하다. 하남의 풍운객잔 말고는 적양문은 그 어떤 곳에서도 눈치를 봐서는 안 된다고 하시더이다.”
스르릉—.
채채챙!
소호가 서 있는 관도 양측에서 사납게 검을 뽑아 든 무인들이 백 명이나 뛰쳐나와 소호의 주변을 포위했다.
정면엔 이백 명의 적화검대.
양옆과 뒤에는 적양문의 무인들이 포진했다.
“홀로 이곳에 온 용기. 참으로 놀랍소. 원래대로라면 비밀 협약답게 정중히 반겨야 마땅하나, 그대의 숨겨진 내력이 우리가 그럴 수 없게 만들었음을 부디 이해해 주시오. 태양염왕께서는 아쉬운 마음을 담아 맞은편 자리를 비워 놓고 술을 석 잔 마시겠다 하셨소.”
막하승이 손짓을 하자 주변을 포위한 무인들이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발동작, 눈빛.
검을 잡은 손길에서 그들이 진심으로 살의에 불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만 죽어 주시오. 천무공자.”
막하승이 손을 내리쳐서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히히힝—.
소호는 절묘한 시점에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이 깜짝 놀라 앞발을 들고 뛰어올랐다.
소호는 그 순간 말 등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파라락—.
소맷자락이 바람에 떨린다.
소호는 뒷짐을 진 채 마치 허공에 보이지 않는 계단이 있는 것처럼 천천히 땅에 내려섰다.
“능공천상제……?”
주변에서 소호의 고절한 신법에 대해 감탄하며 신음했다.
명령을 내리려던 막하승이 호흡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가 당황하는 사이, 소호는 손을 휘둘러 허공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다.
휙—.
“적양문주에게 맞은편 자리를 계속 비워 두라고 전하세요.”
“……무슨 뜻이오?”
소호는 환하게 웃었다.
“내가 직접 가서, 적양문주의 피로 석 잔을 마실 테니까.”
화아아악————.
막강한 존재감이 천하를 뒤덮는다.
소호의 두 눈에는 허공에 떠 있던 호랑이 신이 자신의 몸에 깃드는 모습이 보였다.
새빨간 혈광.
섬뜩한 핏빛이 섞인 불가의 전륜법광을 뿜어내며, 소호는 자신의 칼을 거침없이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