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21화
제46장 염왕지계(炎王之計) (7)
“이 무슨……!”
막하승은 소호의 도발적인 발언에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크게 놀라 자신의 검을 꽉 붙잡았다.
‘저게 뭐지? 무형기가 갑옷처럼 온몸을 감싸고 있다니……?’
경지에 이른 무인은 일반인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막하승은 소호에게서 그것을 보았다.
천하를 뒤덮는 패기.
인지를 벗어난 초월적인 무언가가 소호의 온몸을 휘감고 있지 않은가.
그 기운은 사람의 몸을 뒤덮은 갑옷 같기도 했고, 기이한 짐승이 사람의 등에 업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섬뜩하다.
막하승은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꼈다.
그의 주군.
태양염왕의 염왕기로도 위험할 것 같은 것은 착각일까?
‘어찌 저런 젊은 나이에……!’
튼튼한 방벽과도 같았던 수백 명의 적화검대가 이제는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목책처럼 불안하게 느껴졌다.
“적화검대! 대염왕절진(對炎王絶陣)을 펼쳐라!”
그 말에 적화검대 대원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적양문의 이대 무력 집단인 그들은 종종 태양염왕 한 사람과 적화검대 전체의 비무를 하곤 했었다.
천하에 손꼽히는 절대 고수를 상대로 하는 절진을 연습해 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막하승은 그걸 펼치라고 한다.
즉.
천무련주를 태양염왕과 같은 급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스르릉—.
채챙!
결연한 태도로 적화검대가 소호의 전방과 좌우에 사선으로 포진한다.
왼손에 찬 비구를 내밀고, 오른손으론 검을 앞으로 겨눈다.
공방이 조화된 자세였다.
개미 떼가 적을 상대하듯, 잘 훈련된 조직력이 모두를 한 몸처럼 이었다.
소호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칼끝을 비스듬히 아래로 내렸다.
“나는 적양문이 이런 계책을 써 주길 기다렸어요.”
빙긋 웃은 소호는 막하승이 인상을 찌푸리며 뭔가를 말하기 전에 바람처럼 돌진했다.
쒜에에엑———!
한 번 땅을 박찼을 뿐인데 나아가는 속도가 섬전과도 같다.
바람에 소맷자락이 펄럭인다.
새하얀 비단 장포가 햇빛을 받아 화려하게 빛난다.
채애앵!
비스듬히 내리친 일도를 적화검대가 검으로 막아 내는 순간, 소호는 손바닥으로 칼등을 누르고, 반보를 앞으로 내디디며 우측 팔꿈치로 상대의 머리를 후려쳤다.
푸확!
작렬하는 타격.
융통무애하게 전신에 흐르는 진기가 팔꿈치의 타격 부위를 중심으로 폭발했다.
잔인할 정도로 많은 피가 반대쪽으로 터져 나간다.
기우뚱.
상대가 쓰러지기 전에 이미 소호는 다음 상대로 넘어갔다.
파라락!
미끄러지듯 움직인 소호가 또다시 일도를 내리친다.
이번엔 두 명이다.
아직 상황을 다 따라잡지 못한 적화검대가 다급하게 합격술을 발휘해 두 명이 한 몸처럼 움직여 소호를 막으려 들었다.
소호는 웃었다.
두 명?
그걸로는 부족하다.
좌우 양쪽 중에 하나를 선택해 빠져나갈 것처럼 상체를 살짝 비틀자, 적화검대의 검수들은 깜짝 놀라면서 소호의 움직임에 대처하려 들었다.
찰나의 순간.
세상 모든 것이 흑백으로 변한다.
상승의 영역이었다.
소호는 그 둘의 호흡을 뺏는 절묘한 시점에 몸을 낮춘 채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었다.
적화검대가 아차! 하는 순간에는 이미 늦었다.
소호가 궁보를 밟으며 스쳐 지나간 뒤에는, 두 사람의 허리가 잘리며 동시에, 똑같은 위치에서 피를 뿜어냈다.
“좌측! 뚫렸다!”
“모여라! 벽을 쌓아!”
“빠르다! 셋 이상 달라붙…… 컥!”
시퍼런 칼날이 번뜩일 때마다 피가 터져 나온다.
볏단을 베듯 순식간에 베면서 지나가는 소호의 속공에 적화검대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잘 훈련된 조직력을 사용하기도 전에, 소호가 절묘하게 파고들어 빈틈을 헤집고 다니는 탓이다.
쩌어엉!
푸확——!
피가 튀고 손목이 날아간다.
섬뜩한 살기가 천하를 뒤흔들고 있었다.
“하아아앗!”
소호가 마치 맹수처럼 포효했다.
소호는 칼뿐만이 아니라 전신이 흉기였다.
가까이 붙으면 주먹과 손바닥을 같이 쓰는 복룡권이, 조금 떨어진다 싶으면 발뒤꿈치로 내려찍는 강뢰각이 터져 나온다.
모두가 일격 필살이다.
몸에 닿는 순간 죽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손오공이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남무공을 집대성한 승천무(昇天武)가 무인들의 요혈들을 정교하게 물어뜯었다.
이성과 야성의 조화가 놀랍다.
잘 훈련된 무공의 정교함과, 피를 원해 미친 듯이 달려드는 야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콰직!
소호는 바닥을 짚고 전갈처럼 뒷발을 올려 등을 노리던 무인의 턱을 날려 버렸다.
그 상태로 춤을 추듯 몸을 튕겨 허공으로 솟구친다.
파바바밧!
적화검대 네 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검을 찔러 왔다.
채채챙!
소호는 박도의 검배를 어깨에 댄 채, 마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듯 빠르게 회전했다.
적화검대의 검들이 소호의 몸을 찌르지 못하고 튕겨 나온다.
도리어 적화검대가 찌른 검기가 오롯이 다시 돌아와 그들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슛—.
검을 찔렀던 네 사람은 똑같은 위치를 찢긴 채 피를 뿜으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흐르는 피가 심상치 않았다.
동맥을 건드린 게 분명했다.
“이, 무슨……!”
적화대의 무인들은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무력?
바로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다.
차라리 일 장이 넘는 길이의 도강 같은 것을 뿌려 댔다면 그리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소호는 그러지 않았다.
동작을 하나씩 떼 놓고 보면 조금 빠를 뿐이지 적화검대의 무인들도 할 수 있는 동작들이다.
그런데 그 조화가 놀랍다.
숨 쉬는 시점 하나, 손끝의 움직임 하나도 버릴 게 없다.
완벽.
소호는 하늘이 내렸다는 천무의 칭호는 아무나 받을 수 없다는 걸 몸소 증명하는 중이다.
촤르륵—.
소호는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또다시 미끄러지듯 적화검대의 무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채채채챙!
한바탕 칼춤을 추고 나면 쓰러지는 것은 오로지 빨간 옷을 입은 무인들뿐.
누구 하나 소호의 옷깃도 스치는 자가 없었다.
핏빛이 섞인 전륜법광을 뿜어내며 홀로 수백을 상대할 만한 무력을 뽐내니, 그야말로 인세를 벗어난 영웅이다.
“변진(變陳)! 거리를 벌려라!”
결국 더는 참지 못한 막하승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달려왔다.
“천무련주!”
막하승의 별호는 절영귀검.
그림자도 벨 것 같은 귀신같은 쾌검이 날아들었다.
사파제일검을 다툰다던 강호의 소문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듯한 신법으로 다가와, 섬전 같은 기세로 검을 찔러 온다.
검신일체.
검과 하나된 무인이 찔러 오는 검격은 소름 끼치도록 날카롭다.
“하핫! 일야회 신법으로 나를 상대하겠다고?”
소호의 목소리가 거칠다.
피를 보았기 때문일까.
거칠고 잔인한 전투에 취해 난폭해져 있었다.
두 눈에서는 혈광이 번뜩였다.
크허엉———.
어디선가 호랑이의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쒜에에엑———!
막하승의 절영검이 소호의 가슴으로 찔러 오는 순간, 소호의 상체가 기묘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막하승이 처음 다가올 때와 똑같이 아지랑이처럼 상체가 일렁이더니 절영검을 피해 낸 것이다.
“……!”
막하승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소호가 일야회의 신법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응용.
소호는 신법을 통째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하체는 가만히 둔 채 상체만 일렁거렸다.
평생 동안 막하승이 일야회의 신법을 써 오면서 상상도 못했던 방식이다.
소호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하체를 낮추는 궁보(弓步).
몸을 탁 튕기더니 순식간에 막하승의 사각지대로 파고든다.
쒜에에엑—.
사람만 일렁거리는 게 아니다.
소호는 휘두르는 칼마저도 일렁거리면서 눈을 현혹했다.
서걱—.
막하승은 자신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간 칼을 보면서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장기로 도리어 상처를 입었다.
그것도 막하승 본인은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그건 상승 경지에 이른 고수인 그라도 평정을 유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쒜에에엑—!
막하승은 절영검의 섬뜩함을 가감 없이 뿜어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그 짧은 찰나에 목을 세 번이나 찔러 온다.
강기에 휩싸인 협봉검은 지독할 만큼 날카롭다.
쉬이이익—.
바람을 가르고, 땅을 가르고, 소호의 소맷자락도 잘라낸다.
집요하게 쫓아오는 검끝은 마치 독이 잔뜩 오른 독사와도 같았다. 당장이라도 소호의 목을 베어 낼 것 같은 살기가 가득했다.
휘리릭—.
소호는 그 순간, 갑자기 들고 있던 박도를 허공에 집어 던졌다.
막하승이 놀란다.
소호의 의도를 읽을 수 없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다.
박도가 풍차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허공으로 치솟았다.
본능적으로 칼을 향해 눈이 가려는 찰나.
쩌어엉!
막하승의 코앞까지 다가간 소호가 손바닥 장저로 막하승의 검날을 올려 쳤다.
“크흡!”
천근의 힘이 담긴 역근경진기가 전륜법광과 함께 소호의 양손을 휘감고 있었다.
수강기(手罡氣).
왼손으론 검을 올려치고 오른손으로 검날을 후려쳤다.
까아아앙!
검날이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휘청였다.
“컥.”
검날이 부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급하게 진기를 끌어 올린 막하승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허를 찌르는 대처.
상상도 못한 창의적인 한 수다.
소호의 싸움 방식엔 규칙이 없다.
초식이니, 상성이니.
그 어떤 규칙도 그를 얽매지 못한다.
소호는 맹수처럼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라, 경직되어 있는 막하승의 어깨를 발뒤꿈치로 내리찍었다.
터어엉!
사람의 몸을 밟았는데 마치 쇳덩이를 밟은 것처럼 반탄력이 강했다.
찰나의 순간.
소호와 막하승의 눈이 마주친다.
막하승은 호신강기로 각법을 막아 냈다.
하지만 다음 한 수는 그걸로도 막지 못한다.
휘리릭—.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져 내리는 박도를 한 손으로 붙잡고, 바닥으로 내려서면서 그림같이 깨끗한 동작으로 수직 내려 베기.
서걱!
검을 잡고 있던 막하승의 오른손이 팔꿈치 부근에서 잘려나갔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막하승은 믿을 수 없는 얼굴이다.
단지 검날을 손바닥으로 얻어맞아 잠시 경직되어 버린 실책 하나 때문에.
그 작은 실책 하나가 순식간에 그의 주력인 오른손을 앗아갔다.
“크아아악!”
소호는 물 흐르듯 움직였다.
소림호권.
강기가 실린 주먹을 가볍게 움켜쥔 뒤 장저로 상대를 범처럼 내리찍는 일격이다.
비명을 지르는 막하승의 어깨에 천 근의 위력이 담긴 소림호권이 작렬했다.
뻐어억!
막하승은 버티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커헉!”
그 와중에 막하승의 피가 소호의 옷을 적셨다.
흰옷을 피로 적신 소호.
그 앞에 막하승이 힘없이 무릎을 꿇고 있다.
소호는 살기를 품은 맹수처럼 뜨거운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절영귀검, 적화검대. 겨우 이 정도인가?”
비록 막하승이 쓰러졌다고 한들, 적화검대는 포기하는 성격의 무인들이 아니다.
“죽여! 반드시 죽여야 한다!”
“저자를 염왕님께 보낼 수는 없다.”
그들은 결연하게 검을 세우며 자신들의 가슴에 새겨진 붉은 꽃을 손으로 두드렸다.
“크아아아아!”
“죽여라! 대주님을 구해라!”
사방을 포위한 수백의 무인들이 소호를 향해 벌 떼처럼 달려든다.
그 무시무시한 인파 속에서 소호의 칼은 양중호(羊中虎)처럼 다시 한 번 춤을 췄다.
***
북경 외곽에 있는 등봉객잔(登峰客棧)은 인근 봉황타(鳳凰陀)로 향하는 등산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곳이었다.
봉황타는 상당히 산세가 깊은 산봉우리인데, 봄이 되면 매화가 화사하게 피어나는 절경으로 유명했다.
허허벌판의 길목에 존재하고 있어서 손님이 없을 것 같지만 생각보단 장사가 꽤 잘 되는 편이었다.
물론 등산객을 상대로 하는 만큼 편차가 커서 잘될 때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가도, 장사가 안 될 때는 하루에 손님 한 명 보기도 힘들 만큼 한가하기도 했다.
등봉객잔의 주인인 홍장희는 평범한 사내였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조리법으로 장사를 하고 객잔도 하나 운영하고 있지만 그 외에는 특출한 구석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손님이 하나도 없는 등봉객잔 안의 탁자를 닦고 있다가 터벅거리는 발소리를 듣고 두 귀를 쫑긋 세웠다.
오늘처럼 한가한 날 마수걸이를 해 주는 손님은 귀중하다.
그날 하루의 운세를 결정해 주는 손님이기 때문이다.
“어서 옵쇼! 식사는 하셨……?”
한달음에 뛰쳐나가 살살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려던 홍장희의 얼굴이 굳었다.
온통 핏빛.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에 절은 괴인이 터덜터덜 걸어와 그의 앞에 섰다.
“아…… 으으……. 저기…….”
홍장희는 코를 찌르는 피 냄새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간 객잔을 운영하면서 온갖 꼴을 다 봤다고 자부했는데, 걸을 때마다 피로 발자국이 남을 정도로 피에 절은 손님은 처음이었다.
덜덜 떠는 그를 힐끗 본 그 괴인은, 객잔 밖에 깔아 둔 유일한 탁자에 털썩 앉아 버렸다.
“소면 하나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