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53화 (682/686)

22권 22화

제47장 마왕지협(魔王之俠) (1)

홍장희는 머릿속의 사고가 사태를 따라가지 못했다.

“어, 저기……. 예?”

피를 뒤집어쓴 괴인이 그를 가만히 응시한다.

눈이 마주치자 홍장희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딱히 눈살을 찌푸리거나 기분 나쁜 내색을 하는 게 아닌데도 괴인에게는 절로 상대방을 움츠리게 만드는 위압감이 있었다.

홍장희는 잔뜩 긴장했다.

혹시 말실수라도 한 것일까?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휘두르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제가 몸을 많이 움직이고 나니 배가 고파서요. 소면 한 그릇 주세요.”

“아…… 예. 예!”

괴이한 외양과는 달리 말투는 생각보다 친절했다.

홍장희는 피범벅만 아니었다면 꽤 잘생긴 청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황급히 객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홀로 남은 피범벅의 괴인.

소호는 멍하니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흐리네.”

날이 우중충했다. 온몸에 뒤집어쓴 피는 슬슬 엉겨 붙어 끈적해지고 있었다.

손을 옷자락에 쓱쓱 닦아 보았는데 빨간 물이 빠지질 않는다. 옷도 이미 다 피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객잔 주인이 도망가려나? 배가 많이 고픈데. 도망치면 어쩌지?’

객잔 주인이 겁에 질린 모습을 보니 도망치고도 남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이 도망치면 주방에 가서 직접 뭘 만들어야 하나? 이럴 줄 알았으면 소면 만드는 법이라도 배워 볼 걸 그랬네.’

은자촌이 그립다.

강운찬의 소면을 한 그릇 먹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길 잠시, 소호는 뜬금없는 선물을 받았다.

“손님, 여기, 그……. 수건입니다. 따뜻한 물에 적셨습니다.”

등봉객잔의 주인은 소호를 매우 무서워하면서도 손바닥만 한 나무통에 수건을 담아 건네주었다.

소호는 멈칫했다.

“저 주시는 거예요?”

“예. 그…… 편하게 식사를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이 더러우면 음식 맛도 더러워지는 법이지요.”

소호는 물끄러미 나무통 안의 수건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무명천이지만 따뜻한 온기가 모락모락 피어나오는 물 안에 담겨 있는 모습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든다.

객잔 주인을 쳐다보니 그는 눈이 마주칠세라 벌써 객잔 안으로 도망친 상태였다.

“따뜻하네.”

소호는 수건으로 꼼꼼히 손과 얼굴을 닦았다.

수건은 금방 새빨갛게 변했다.

그래도 물을 짜내면서 계속 닦으니 손톱 밑을 제외하곤 핏물이 대부분 빠졌다.

객잔 주인은 그리 오래지 않아 소면을 한 그릇 말아 왔다.

새빨간 국물 위로 노란 면발이 김을 모락모락 피워 내고 있었다.

면 위에는 잘 익은 청경채가 올라와 있고, 그 옆에는 고기를 갈아서 볶은 것 같은 고명도 듬뿍이다.

“저희 어머니께서 사천 출신이셔서…… 호북과 사천으로 가면 이렇게 마라를 넣어 매콤한 국물로 소면을 만듭니다. 혹시 입맛에 안 맞으시면, 저기, 마라를 좀 줄여서 다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소호는 평소 자신이 알던 소면의 모습과 달라 잠시 놀랐지만, 소면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른 마라 향이 식욕을 돋웠다.

고기 고명과 청경채를 면발과 함께 집어서 단번에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흐음.”

매콤한 향이 입안에 가득 퍼진다.

육 향이 좀 세지만 누린내는 마라가 다 잡아 주었다.

면발은 탱탱한 찰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씹으면 쫄깃하게 끊기지만 씹을수록 국물과 섞여 고소한 향이 올라온다.

갈아서 볶은 고기도 훌륭하다.

매콤한 마라 국물에 고기 기름을 더해 주니 식감이 만족스럽다.

소호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운찬 삼촌의 소면이 아닌 이상, 안 그래도 피 냄새에 절어 있는 소호에겐 이렇게 마라 향이 강한 소면이 오히려 더 맛있게 느껴졌다.

“으음.”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웠다.

국물까지 싹 다 마신 뒤, 소호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음식 한 그릇의 행복은 어떻게 이렇게 큰 것일까.

“객주님이세요?”

“예? 아, 네, 네. 제가 객잔 주인 홍 가(家)입니다.”

“객잔을 운영하면 어때요? 즐거워요?”

소호가 얼굴에서 피를 닦아 낸 덕분인지, 객잔 주인은 처음보다 한결 마음이 편해 보였지만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는지 당황하며 대답했다.

“즐겁기만 하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이 생활이 좋습니다. 음식을 만들고 봉황타에 오르는 객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그런 평범한 삶이 좋지요.”

“평범한 삶……. 결국 아버지가 옳았네요.”

“예?”

“아뇨, 잘 먹었습니다.”

소호는 품 안에서 전낭을 꺼내 동전을 꺼내려다가, 마음을 바꿔서 전낭을 통째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손님?”

“잘 먹었습니다.”

“손님, 전낭을 두고 가셨습니다!”

“의자도 더럽혔고, 바닥도 더럽혔네요. 그리고 따뜻한 수건. 고맙습니다.”

소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을 올랐다.

뒤에서 전낭을 열어 본 객잔 주인이 경악하여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금자가…… 한가득……!”

객잔 주인이 쫓아오려는 기색이라 소호는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봉황타.

태양염왕과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

화창한 봄에 보는 봉황타도 절경이지만 겨울이 다가오는 지금도 군데군데 피어 있는 들꽃들 사이로 여백의 미가 가득해 또 다른 풍취를 자아냈다.

북경의 북서쪽.

수십의 산봉우리들이 늘어서 있는 산맥에서 유난히 우뚝 솟은 높은 봉우리가 봉황타였다.

북경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보니 평소에도 그리 많은 사람이 다니는 곳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봉황타로 가는 길목에 유난히 사람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봉황타의 정상으로 가는 길목을 무서운 인상을 지닌 사파의 무인들이 단단히 틀어막고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호가 가파른 경사를 한참 오를 때쯤, 그를 발견한 적양문의 무인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웅성거리면서 내려와 마치 벽을 쌓듯 정렬한 채 소호를 기다린다.

특히 가장 앞에 있는 자들은 가슴에 파란색 수실로 꽃을 새긴 채 허리에 칼을 차고 있는 무인들이었다.

청화도대.

적화검대와 함께 적양문을 단단히 떠받치고 있는 기둥 같은 존재였다.

“천무련주? 어떻게 여길?”

청화도대의 대주.

나찰마도 정옥상이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버럭 소리쳤다.

“적화검대는? 막하승은 어찌 되었나!”

소호는 태연하게 웃었다.

“내 몸이 피범벅인데,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아요?”

“이노옴!”

정옥상은 불같은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불혹의 나이가 지났음에도 싸워야 한다고 판단이 되면 먼저 칼을 휘두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내다.

양강진기 특유의 내력이 불꽃처럼 활활 타오른다.

그는 구천지옥도법을 당장이라도 쏟아낼 것처럼 눈을 부릅뜨며 대도를 붙잡은 손을 꿈틀거렸다.

그의 부하인 청화도대도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분기탱천하여 당장이라도 소호를 씹어먹을 것 같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날 죽이려고 계책을 꾸밀 때는 언제고 이젠 나를 역적 취급을 해요? 너무들 하시네.”

소호는 가만히 서서 그들을 쭉 둘러본 뒤 다시 한 번 웃었다.

“적양문은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하나 봐요?”

“막하승의 피를 묻히고 온 놈이 어떻게 손님이 되겠느냐! 내가 막하승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죽이지는 않았으니까.”

“……뭐?”

“팔 하나만 잘랐어요. 그 사람 사부님이 나랑 좀 인연이 있어서.”

“……!”

“당신은 다릅니다. 혹시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나랑 인연은 없죠?”

“이놈……!”

“덤비면 죽을 겁니다.”

대범함.

차분함.

자신을 적대시하는 사파의 정예 무인 수백 명을 눈앞에 두고도 웃을 수 있는 배포라니.

정옥상은 하도 기가 차서 오히려 화가 수그러드는 모양이었다.

애매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소호는 쐐기를 박았다.

“적양문주가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다면서요? 건너 쪽 자리를 비워 뒀다는데, 어서 들어가고 싶으니 비키시죠?”

사실 정옥상이 함부로 칼을 뽑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곳에 적양문주.

태양염왕이 있기 때문이다.

정옥상이 망설이는 사이, 봉황타 정상에 남아 있던 무인이 다급하게 뛰어와서 외쳤다.

“들여보내라고 하십니다. 술잔이 비어 있다고요.”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씹어 뱉듯이 말하는 정옥상의 곁을 지나치며 소호는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 빨리 구하러 가는 게 좋을 거예요. 막 대주가 피를 많이 흘렸거든요.”

“이놈……!”

정옥상은 신경질적으로 부하들에게 외쳤다.

“청화이조는 곧장 적화검대에게 가서 부상자를 수습하라!”

“예!”

적양문의 무인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소호는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과 함께 봉황타의 정상으로 향했다.

정옥상은 소호의 뒤에서 세 걸음 정도 떨어진 채 묵묵히 쫓아왔다.

봉황타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인근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에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다 내려다보이기 때문이다.

구름을 바닥 삼아.

삐죽삐죽 솟아 있는 산봉우리들을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봉황타다.

특히 호젓하게 세워져 있는 정자는 사방이 뻥 뚫려서 절경을 감상하기 편했다.

정자의 한 가운데에 술상을 차려 놓고 맛있는 술을 마시다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이런 곳에서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경치를 즐긴다면 황제가 부럽겠는가.

“천무공자?”

“네, 제가 천무공자입니다. 적양문주.”

천무련주는 천무공자로.

태양염왕은 적양문주라 서로가 서로를 한 단계 낮춰서 불렀다.

태양염왕 고흠은 체구가 크지 않은 사내였다.

전형적인 무골이 아님에도 무공에 대한 재능과 노력으로 이 자리까지 온 사내다.

키도 작고 팔도 그리 길지 않다. 그럼에도 극도로 단련된 근육이 금강석처럼 온몸을 덮고 있는 모습은 그를 더욱 큰 인물로 보이게 만들었다.

“피 냄새가 진하군. 얼마나 죽였나?”

“막 대주 빼고 전부.”

“안타깝군.”

고흠은 잠시 침묵했으나, 그에 대해 분노하거나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정자 밖에서 대기하던 정옥상이 분기탱천하여 살기를 뿜어낼 뿐이다.

고흠은 묵묵히 손을 뻗어 술병을 들면서 소호에게 자리를 권했다.

“계책을 썼다는 자책감에 술을 석 잔 마실 생각이었으나 그럴 필요가 없어졌군. 한 잔만 권하겠네.”

우우웅—.

술병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마치 누군가가 손으로 잡고 따라 주는 것처럼 소호가 들고 있는 잔을 채워 주었다.

자연스러운 허공섭물이다.

이미 내기가 외기에 간섭하여 주변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재밌는 건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고흠이 극양의 진기를 지녔기 때문인가?

그가 허공섭물로 따라 준 술이 소호의 술잔에 닿는 순간 모조리 기화가 되어서 사라져 버렸다.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믿기 힘든 신기(神技)였다.

냄비에 물을 조금 넣고 하루 종일 끓이기만 한 것과 같다.

물은 어느새 뜨거운 수증기가 되어 뿌연 안개를 만들어 냈고, 알싸한 술 냄새만 소호의 코끝을 스쳤다.

“재밌네요. 술을 받았는데 술이 없다니.”

“내 마음이 그렇다네. 주고 싶은데 줄 수가 없군.”

고흠은 무표정하게 술병을 내려놓았다.

소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잘됐네요.”

“그런가?”

“막 대주한테 약속했거든요. 저는 적양문주의 피로 석 잔을 마시겠다고.”

“흐음.”

고흠의 입술 끝이 올라갔다.

“생각보다 더 당돌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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