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54화 (683/686)

22권 23화

제47장 마왕지협(魔王之俠) (2)

“순욱의 빈 찬합을 주려고 했나 본데, 당신은 조맹덕이 아니고 저는 순문약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조맹덕이고 당신은 장각에 가깝지 않아요?”

“하하핫!”

태양염왕 고흠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치이익.

술상에 놓인 음식들이 갑자기 지글지글 끓기 시작했다. 고흠의 감정이 격해지자 자연스레 주변이 한여름이라도 된 것처럼 공기가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지금 본좌와 적양문을 도적 떼에 비유하는 것인가?”

그는 즐거워서 웃은 게 아니었다.

극심한 분노.

나지막한 목소리 아래에 활화산 같은 분노가 깔려 있었다.

장각은 후한말 황건적이라는 도적 떼를 이끄는 수장이었다.

지고한 태양염왕이 어찌 도적 떼에 비유되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투툭. 툭.

공기가 밀려 나간다.

그들이 앉아 있는 정자가 삐걱거리며 흔들렸다.

술상 위에 올라와 있던 어향육사가 연기를 피워 내기 시작했다.

소호는 지글지글 끓기 시작하는 어향육사를 태연하게 젓가락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따뜻해서 좋네요.”

고흠의 시선이 뜨겁다.

당장이라도 불태워 죽여 버릴 것 같은 박력이 그의 전신에서 뿜어나왔다.

소호는 마치 그런 압도적인 기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술병을 잡았다.

그러자 고흠이 뿜어지는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고오오오————.

숯가마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고흠의 기파가 어찌나 강했던지 입구에서 보초를 서듯 서 있던 나찰마도 정옥상이 신음을 흘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태양염왕은 화경을 넘어선 고수였다.

심기상인.

그는 그저 상대를 죽이겠다는 일념만으로도 내상을 입힐 수 있는 수준의 무인이며, 그가 내뿜는 살기는 실제로 막강한 화기(火氣)를 동반한다.

우우웅—.

소호의 몸에서도 전륜법광이 흘러나왔다. 막강한 화기가 전륜법광의 벽을 뚫기 위해 용암처럼 이글거렸다.

기이이잉——.

밀려드는 해일을 방파제로 막아 내는 것과 같다.

쪼르륵—.

소호는 강렬한 염왕기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태연히 술을 따랐다. 따뜻해진 소홍주로 입을 축이니 오묘한 맛이 났다.

탁.

소호는 다시 술잔을 내려놓았다.

거대한 태양, 그 자체가 되어 버린 듯한 고흠에게 태연하게 되물었다.

“술은 좀 차가워야 맛있더라고요. 너무 그렇게 뜨거워지시면 술을 못 마실 것 같은데요.”

“재밌군.”

쾅!

고흠은 손바닥으로 술상을 내리쳤다.

어향육사와 몇 가지를 제외한 안주 대부분이 접시가 뒤집어져 상 위에 쏟아졌다.

“본좌를 도적 떼 취급한 이유를 설명하라. 그렇지 못하면 죽일 것이다.”

“원래 죽이려고 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렇고?”

“…….”

“위압하려 하지 말아요. 안 통하니까.”

강호에서 손꼽힐 만한 무인을 앞에 두고도 소호는 태연자약했다.

고흠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뒤쪽에 서 있던 정옥상은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소호를 노려보았다.

“적양문은 불과 십 년 전에는 강호에 두각도 나타내지 못하던 국경 근처의 작은 문파였잖아요? 그랬던 곳이 대체 어떻게 갑자기 북경을 장악할 만큼 커졌나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적양문에 대해서 좀 알아봤어요.”

고흠이 미간을 좁힌다.

대답은 없었다.

“난세의 틈을 놓치지 않고 거병한 일. 사교(邪敎)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을 규합한 일. 어때요? 황건적이랑 생각보다 공통점이 더 많죠?”

“사교?”

“칠성태극교의 도움을 받았잖아요?”

“…….”

“칠성태극교의 교주와 만난 뒤에 적양문주의 무공이 갑자기 강해졌다면서요? 밀거래의 규모가 커져서 큰돈을 만지게 된 것도 다 칠성태극교랑 손을 잡은 뒤에 벌어진 일이었고요. 그들과 손을 잡은 후에 적양문이 밀무역하는 물건이 갑자기 확 늘었다던데, 우연은 아니죠?”

“……재밌군.”

“저희 군사는 이렇게 말했어요. 적양문은 칠성태극교에서 모종의 무공을 제공받았고, 각종 귀한 영약들과 금전적 혜택을 지원받았을 확률이 높다. 칠성태극교가 마음을 먹는다면 적양문은 그들의 영향 아래 자유로울 수 없다.”

소호는 딱딱하게 뭉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적화검대의 피가 떡지고 굳어 있다가 가루가 되어 후드득 떨어졌다.

고흠은 침묵하고 있었다.

소호는 손끝으로 술잔을 톡톡 두드렸다.

“나만 알고 있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하오문도, 개방도 다 짐작은 하고 있더라고요. 정보를 다루는 문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을걸요?”

“그래서?”

고흠은 억지로 부정하지 않았다. 민망해하거나 난감해하지도 않았다.

대단히 위험한 사실을 순순히 인정한다.

어쩌면 소호를 이미 다 잡은 물고기로 여기는지도 몰랐다.

“그래. 칠성태극교는 우릴 도왔다. 십 년 정도 전의 일이지. 그게 어쨌단 말인가? 정작 천무련은 만들어진 지 고작 십 년도 안 된 곳이 아니던가? 역사를 논할 자격이 있던가?”

“역사를 논할 생각은 없어요. 중요한 건 앞으로의 강호 무림이죠.”

“무슨 뜻이지?”

“적양문주. 당신은 칠성태극교의 수하입니까?”

“뭐라?”

고흠의 대답에 따라 소호가 앞으로 할 행동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었다.

“칠성태극교라는 곳은 얼핏 오두미교 같은 도교 문파 같지만 알면 알수록 위험한 곳이더군요. 상회도 많이 운영하고 있고, 몰래 무인들도 많이 길렀고. 적양문은 뭘 원하는 거예요? 칠성태극교의 밑으로 들어갔어요?”

“헛소리. 우린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요?”

고흠은 마치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기분 나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좋은 일이었다.

“서로 동등한 관계라는 거죠?”

“그들은 영약과 돈을 투자하고, 우린 북경 무림을 장악하면 그들의 중흥을 돕기로 했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는 동맹이다.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처럼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그럼 동맹으로서 적양문주의 목표는 뭐예요?”

“…….”

“칠성태극교랑 연합해서 사도천하(邪道天下)를 이룬다? 사파와 마도인들이 천하를 지배하겠다?”

“그래. 안 될 것도 없지.”

고흠은 천하를 전란에 빠뜨릴 만한 야망을 당당하게 드러냈다.

앞날이 훤히 보인다.

그가 저런 마음으로 강호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르겠는가?

이미 그는 북경 무림에 정파가 함부로 진출할 수 없게 공고한 성벽을 쌓은 사람이었다.

능력은 충분했다.

태양염왕이 만일 도의와 협은 뒷전으로 한 채 오로지 힘의 논리를 숭상하는 자들, 사파와 마도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만한 깃발을 들어 올린다면?

“위험한 생각이네요…….”

“나도 하나 묻지. 혼자서 여기까지 온 건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그리고 그 용기가 가상해서 기껏 준 시간을 칠성태극교 따위를 물으며 허비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지?”

소호는 고흠이 태양염왕이라는 별호답게 성정이 불같을 거라 생각했으나 그는 의외로 냉철했다.

고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자리는 끝이 났다는 듯, 단단한 바위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천무련은 정무관을 여기저기 지어서 정파의 무인들을 늘렸다. 천무련에게 투자를 하는 상회와 정도의 문파들 또한 천무련이 강호의 패권을 가질 거라 믿기에 천무련을 지원한다. 세상이 원래 그렇지 않던가?”

어차피 이 세상은 경쟁의 연속.

아직 싸움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이미 암중에선 더한 싸움도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지 않던가.

그런 게 강호이고 무림이다.

약육강식에 정파와 사파는 없다.

후기지수들이 협객인 척 산적과 악인들을 토벌하는 것만 강호가 아니었다.

“적양문주. 그쪽에서 생각하는 강호에 천무련의 자리는 있어요?”

고흠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저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가 있겠는가? 그 술잔이 텅 빈 것처럼 우리가 천무련에 내줄 하늘은 없다.”

드드드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술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흠의 작고 단단한 체구에서 거대한 기파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스으으—.

소호가 술잔에 따라 놓은 술이 뜨겁게 끓으려고 했다.

술잔에 술이 있는데 비었다고 한 것은 태워 버리겠다는 뜻이었던가?

“난 내 것을 지킬 겁니다.”

소호도 지지 않는다.

혈광이 섞인 전륜법광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역근경 진기.

견고한 내력이 술잔을 덮었다.

까드득!

우우우우웅!

술잔을 뚜껑으로 덮으려는 사람과, 그 뚜껑을 통째로 불덩어리에 집어넣어서 술을 태우려는 사람의 대결이다.

절대 고수 두 사람이 본격적인 싸움에 앞서 무형기만으로 서로를 견주어 보는 것이기도 했다.

팽팽한 긴장감도 잠시.

소호의 손바닥 아래 놓여 있던 술잔이 쩍! 하고 금이 갔다.

태우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두 사람의 내공이 충돌하자 그 힘을 버텨 내지 못한 것이다.

“흐음.”

“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고흠의 두 눈이 활활 타오르고, 소호는 진중한 얼굴로 깨진 잔 안을 보았다.

박빙(薄氷)의 내공 대결 끝에 잔이 깨지고 말았다.

소호가 이기지 못한 셈이다.

고흠은 자신이 천하를 노린다고 할 만한 무공을 지녔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과연.’

소호는 고흠을 인정했다.

고흠 또한 소호를 새삼 다시 본 듯했다.

“그 나이, 그 수준이라니. 놀랍군.”

우두둑—.

고흠이 손끝을 오므린다.

조법과 권법 사이.

손가락 끝으로 내공이 집중되고 있었다.

“칠성태극교는 암약 단체더군요. 항상 숨으려고만 하고, 하는 행동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어요. 옛날에 누군가에게 호되게 당했는지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죠. 이번에 큰맘 먹고 손을 잡은 적양문이 무너지면? 그 어떠한 사마외도도 최소한 십 년은 함부로 나설 수 없게 될 테죠. 그래서 내가 이곳에 온 겁니다.”

“무슨 뜻이지? 적양문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말인가?”

“네.”

사도(邪道)를 걷는 수만의 무인들을 결집시킬 깃발.

적양문만 무너지면 강호 무림은 평화로워질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소호는 이곳에 왔다.

집혼기의 폭주가 예정된 지금.

그가 지닌 힘을 가장 필요한 곳에서, 치명적인 한 수로 쓰기 위해 그는 이곳에 있다.

“하!”

감히 적양문을 무너뜨리겠다는 말까지 듣고 태양염왕은 참지 못했다.

소호의 목적을 듣자 고흠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다.

콰장창!

발길질을 한 것도 아닌데, 그저 본격적인 기파를 드러낸 것만으로도 술상이 반으로 쪼개지며 정자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콰드드드!

태양염왕 고흠의 양쪽 발이 나무로 된 정자를 파고들고 있었다.

천 근.

아니, 만 근의 무게를 지닌 사람처럼 두 발이 통나무 바닥을 짓이긴다.

막강한 기파.

태양과도 같은 극렬한 열기가 한순간에 실제로 강한 압력을 갖고 사방으로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아!

정자의 지붕이 터져 나갔다.

기둥이 부러지고, 바닥은 산산조각 났다.

태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찰나의 순간.

고흠이 수도(手刀)를 비스듬히 아래로 내리쳤다.

염열수라참(炎熱修羅斬).

태양염왕의 무공.

극양무극도(極陽無極刀)의 절초가 천하를 절반으로 쪼갠다.

터엉!

소호는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튕겨서 일어난 것도 아니고, 땅을 짚고 일어난 것도 아니다.

앉은 자세에서 일어서는 데까지 필요한 최소한의 힘으로 일어나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주먹을 수도에 맞부딪쳤다.

쩌어어어엉!

맨손과 맨손이 마주쳤는데 쇳덩이끼리 후려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앙!

두 사람 사이에서 폭발한 내력의 폭풍이 박살 난 정자의 파편을 사방으로 날려 보냈다.

봉황타 정상의 지형을 바꿀 정도의 충격이었다.

“후우.”

과연 강하다.

태양염왕.

북경에 존재하는 수많은 무파를 파죽지세로 쓰러뜨리며 얻은 별호라고 하던데, 왕(王)의 칭호는 과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직 부족하다.

별호에 신(神)이나 무쌍(無雙)이 들어가도 납득이 될 정도의 무공이었다.

‘이 정도의 극양진기라니. 대체 어떻게 단련했을까?’

태양염왕의 손 주변이 온통 새빨갛게 달아오른 숯처럼 열기가 들끓었다.

소호는 세 걸음을 물러났고, 고흠은 두 걸음을 물러섰다.

“염왕님을 지켜라!”

나찰마도 정옥상이 날 듯이 뛰어서 고흠의 앞을 가로막았다.

채채챙!

청화도대의 시퍼런 칼날들도 일제히 소호를 겨누었다.

일 대 다수의 싸움이다.

소호는 정옥상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 너머의 고흠만 쳐다보며 말했다.

“부하들은 물리는 게 좋을 겁니다.”

졸지에 자신도 ‘부하들’에 들어간 정옥상이 얼굴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옥상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절영귀검보다 조금 나은 정도에 불과하다.

천하를 가르는 싸움에 끼어들 수준은 아니었다.

소호는 양손을 모았다.

마치 도철이 그러했듯, 손목과 손목을 모아 마치 짐승의 발톱처럼 손끝을 굽혔다.

파스스스—.

열 개의 손가락에 새하얗게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한여름처럼 공기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든 태양염왕 고흠과 정반대의 힘이었다.

극음진기.

과거 소호의 인연이었던, 백설지에게 전해 받은 집혼기의 힘이다.

양손에는 극음진기의 발톱을 두른 채.

소호는 하늘에 떠 있던 호랑이의 신을 다시 한 번 몸으로 불러들였다.

고오오오오——.

소호의 주변에 섬뜩한 무형기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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