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24화
제47장 마왕지협(魔王之俠) (3)
소호의 변모는 극적이었다.
성자(聖者) 같던 전륜법광이 이제는 핏빛으로 보일 만큼 빨갛게 변했다.
눈빛도 다르다.
야생의 짐승처럼 섬뜩한 살기가 흐른다. 아래로 늘어뜨린 양손에는 새하얀 서리가 갑옷처럼 뒤덮었다.
“네놈, 그 모습은 뭐냐? 그게 하늘이 내린 정파 최고의 무인의 모습인가?”
고흠의 질타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후우우우우.”
소호가 길게 내쉬는 숨이 허공에서 얼어붙는다. 숨결이 하얀 가루가 되어 눈처럼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소호는 빙긋 웃었다.
그가 핏빛으로 눈을 빛내며 웃는 모습은 옛날이야기 속의 요괴(妖怪)처럼 섬뜩하다.
잘생긴 얼굴로 천진난만한 웃음에 섬뜩한 혈향이라니. 요악하고 치명적인 매력이다.
“으음.”
정면에 서 있던 나찰마도 정옥상이 침중하게 칼을 붙잡았다.
주변을 막아선 청화도대의 무인 중에는 겁에 질려 주춤주춤 물러서는 자들도 있었다.
소호는 자신이 밖에서는 어떻게 보이는지 알 수 없다.
그는 내면의 싸움만으로도 바빴다.
‘이거구나. 여기가 한계점이야.’
집혼기에서 흘러드는 힘이 감당할 수 있는 수치를 넘어섰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이 세상에 대가가 없는 힘은 없다.
소면 한 그릇을 먹더라도 동전을 내야 하는 게 당연하듯, 강대한 힘을 쓰려면 그에 걸맞은 노력과 대가를 지불해야 계산이 맞다.
그런데 소호는 그동안 집혼기의 힘을 별다른 제한 없이 써 왔다.
그 힘이 공짜였겠는가?
아니다.
나날이 충동이 강해지는 것을 느껴 왔다.
폭급해지는 성정.
자꾸만 모든 일을 힘으로 짓누르고 짓밟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을 이제까지 겨우겨우 참아 온 것이다.
그동안 ‘미래의 나’에게서 힘을 빌려온 대가였다.
이자가 비싼 염왕채를 빌린 것처럼 날이 갈수록 갚아야 할 빚은 커져만 갔다.
그 끝이 지금의 이 모습.
몸 안의 혼(魂)과 백(魄)이 진동한다.
그동안 집혼기를 사용하면 할수록 내면에 쌓이고 쌓인 무언가가 단단한 껍질을 부수며 마침내 밖으로 빠져나왔다.
“크아아아아!”
소호는 포효했다.
드드드—.
뿜어낸 기파만으로도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머릿속이 아찔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감각이 잔뜩 예민해져 솜털 위를 스치는 공기의 흐름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투툭! 투투툭!
근육이 부푼다.
온몸에 힘줄이 돋아났다.
특히 눈.
햇빛을 받아 형형색색으로 빛나던 세상이 흑과 백의 무채색 세상으로 변했다.
세상이 느리다.
크게 놀라서 칼을 높이 들어 올리는 정옥상의 모습이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천천히 보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이 온몸의 피를 타고 흘렀다.
“흐으.”
소호는 씩 웃었다.
차분했던 마음이 극도의 흥분상태에 돌입한다.
두근, 두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가 빠르게 돈다.
정옥상의 목덜미와 허리.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요혈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오오오———!
“본좌가 상대한다!”
고흠은 칼날의 너비가 손바닥만 한 칼을 뽑아 들었다.
고흠의 명령에 정옥상과 청화도대가 황급히 비켜서려는 찰나.
한순간.
소호는 공간을 접은 것처럼 한순간에 정옥상의 앞에 나타났다.
쒜에에엑!
무릎을 굽혀 발을 한 번 굴렀을 뿐인데, 곧바로 나찰마도 정옥상의 목덜미가 눈앞에 있었다.
살짝 손가락을 굽힌 호권으로 강하게 내리친다.
정옥상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대경하여 대도를 휘두르지만 이미 늦었다.
선수는 소호가 취했고, 정옥상은 그 격차를 줄이지 못했다.
쩌어어엉!
“크윽?”
정옥상의 대도가 우그러진다.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검신일체를 이룬 그가 무기를 보호하지 못했다.
정옥상이 약한 게 아니다.
소호가 강했다.
대도가 우그러지고, 정옥상의 목덜미의 살점이 찢어졌다.
콰직!
어깨.
쇄골이 부러진다.
그나마 전력을 다해 상체를 젖힌 덕분에 죽음은 면했으나, 단 한 번 손속을 교환한 것치고는 치명적인 손해다.
“비켜라!”
고흠이 나섰다.
정옥상을 향해 추격타를 날리려는 소호에게 막강한 염왕기를 휘둘렀다.
극양무극도(極陽無極刀).
비폭참(飛暴斬).
화아아악!
칼 한 자루에 하늘 위에 떠 있는 태양을 오롯이 담으면 이러할까?
새파란 칼날 위로 샛노랗게 빛나는 극양진기가 흐르는 바람과 만나 거센 불꽃을 일으켰다.
존재감이 거대했다.
마주치는 순간 폭발.
그렇기에 비폭참이다.
콰아아아아!
공기가 터져 나갔다.
폭발.
폭음.
뿌옇게 피어오른 수증기 사이를 뚫고 소호가 질주한다.
소호는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처럼 뛰어들어 손바닥 장저로 고흠의 칼날을 옆에서 후려쳤다.
쩌어어엉!
절영귀검 막하승은 장저로 칼날을 후려친 이 일격으로 호흡이 무너지고 내상까지 입었었다.
그러나 고흠은 달랐다.
칼날을 단단하게 감싼 극양진기가 선명한 강기 이상으로 튼튼하게 칼날을 지킨다.
그뿐인가?
칼날을 후려친 충격을 그대로 흡수해 버리면서 다시 일격.
염열수라참(炎熱修羅斬).
정자에서 맨손으로 시전했던 무공을 이번엔 날카로운 칼로 다시 한번 선보였다.
푸화아아악!
천하가 절반으로 쪼개진다.
치솟는 불길이 소호의 온몸으로 훅— 끼쳐 들었다.
치이익.
소호는 양손을 교차시켜 고흠의 칼날을 붙잡았다.
맨손과 칼날?
그게 비교나 되겠는가.
심지어 칼을 휘두르는 쪽은 천하를 논하는 절대 고수. 태양염왕이다.
맨손 따위 잘려 나가야 마땅하지만 소호의 양손에 담긴 무시무시한 힘이 검의 날카로움을 이겨 냈다.
까드드득!
극음진기로 서리가 끼려던 칼날이, 다시 극양진기를 만나 수증기를 뿜어내며 녹아내리기를 반복했다.
“이놈……!”
고흠이 미간을 좁힌 채 자신의 몸만큼이나 긴 칼을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그걸 막다니. 네놈, 사람이 맞나?”
젊은 나이에는 이룰 수 없는 경지.
거기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드는 혈광까지 두르고 있으니 소호는 사람이 아니라 요괴처럼 보였다.
터엉!
소호는 땅을 박찼다.
붙잡은 칼을 쭉 당기면서 태극권의 묘리를 살려 칼을 옆으로 내팽개쳤다.
촤아아악!
빗나간 일격에 땅바닥이 갈라진다.
거인이 곡괭이를 내리친 것처럼 땅이 일직선으로 쭉 갈라지며 폭발하듯 불꽃이 타올랐다.
소호는 그 틈에 몸을 튕겨 거리를 좁혔다.
쒜에에엑!
고흠은 커다란 칼을 버들가지처럼 가볍게 휘두르는 자였다.
곧바로 방향을 바꿔 소호의 목을 노려 온다.
수평의 일격.
소호는 그 전에 더 가까이 다가가 금나수의 수법으로 고흠의 손목을 붙잡으려 들었다.
“감히!”
우스운 일이다.
절대 고수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으려 하다니.
고흠은 코웃음 치며 더욱 기세를 올렸고, 손목을 잡으려던 소호의 손을 칼 손잡이로 쳐 냈다.
터엉!
손목을 부러뜨리고도 남을 힘이지만 소호는 호신강기만으로 버텨 냈다.
그 순간 고흠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그럼 이것도 버텨 보라는 듯 펼쳐지는 고흠의 절기.
염열수라참이다.
콰아아아아아!
거대한 불꽃과 함께 떨어져 내리는 일격은 마치 유성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걸 몸으로 받는다는 건 자살행위이지 않겠는가.
소호는 큰 걸음으로 옆으로 돌아갔다.
촤아아악!
피했지만, 피하지 못했다.
태양염왕이 전력을 다한 염열수라참은 마치 통배권과 비슷했다.
공간을 격하고 내공으로 상대를 타격한다.
분명히 옆으로 이동했음에도, 막강하고 날카로운 기파가 소호의 가슴을 베고 지나갔다.
푸화악!
비단옷이 잘려 나간다.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상체의 혈도에도 큰 타격을 입었건만, 소호는 마치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캬하아앗!”
날카로운 기합성.
사나운 기세로 소리를 지른 소호가 오히려 집혼기의 귀기를 더욱더 끌어 올렸다.
꽈아앙!
염열수라참에 휩쓸린 공간에서 폭탄이라도 쏜 것처럼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소호는 일부러 반 호흡을 늦춘 뒤 불꽃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었다.
파지직.
머리카락과 옷을 태우는 극양의 불꽃 속에서 발을 번쩍 차올렸다.
찰나의 순간.
아직 칼을 내리치는 중인 고흠과 눈이 마주친다.
빙글.
마치 허공에서 한 바퀴 구르듯 몸을 회전시킨 소호가 발뒤꿈치로 고흠의 칼등을 강하게 짓밟았다.
강뢰각(降雷脚).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각법 일타가 칼등을 땅에 박아 버렸다.
터어엉!
경이로운 동작이다.
일반적으론 감히 시도할 수 없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을 소호는 마치 신들린 듯이 성공시켰다.
소호는 칼을 짓밟고, 반대쪽 발로 진각을 내디딘 뒤, 양손을 모아 고흠에게 내밀었다.
고오오오오!
온 세상이 느려졌다.
소호는 손목과 손목을 붙였다.
짐승의 발톱처럼 날카롭게 세운 열 개의 손가락이 제각각 칼날처럼 예기를 발한다.
“호생(虎生).”
고오오오오!
도철과 백설지가 자신들의 신(神)을 깨우는 방식으로 용생(龍生)을 썼다면, 이제 소호는 내면의 범을 깨운다.
호랑이의 송곳니와 같은 그의 손가락에 새하얗게 서리가 낀다.
백호아(白虎牙).
푸화아아악!
고흠의 상체에 커다란 원이 생기고, 그 뒤에 마치 태양을 그리듯 열 개의 직선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백호아가 직격했다.
손가락 열 개를 감싼 강기.
백색의 극음진기가 유형화되어 상대를 갈기갈기 찢는다.
“큭.”
고흠이 전신에 두르고 있던 호신강기는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피부가 잘려 나가고 피가 솟구친다.
아니.
피가 솟구치다가 얼어붙는다.
열 개의 자상(刺傷) 위에 열 개의 서리가 내렸다.
고흠은 피를 토하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호를 바라본다.
“내가. 사람이 맞냐고?”
콰드득!
점점 가슴을 파고드는 소호의 강기를 막기 위해 고흠이 칼을 손에서 놓고 소호의 손목을 붙잡았다.
드드드드—.
극양의 기운과 극음의 기운이 다시 한 번 부딪쳤다.
두 사내의 맞닿은 손에서 뿌연 수증기가 미친 듯이 피어올랐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이……놈……!”
“신수(神獸). 백호(白虎)다.”
더듬더듬.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
완전히 귀기에 휩싸인 소호가 짐승 같은 몸놀림으로 고흠을 공격했다.
콰직!
푸화악!
터엉!
칼을 잃어버린 고흠은 중상을 입은 몸으로, 그것도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소호를 상대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절대 고수로서의 저력을 발휘하는 고흠이다.
그는 맨손으로 삼백 초나 버텼다.
백 초를 넘겼을 때 손목과 발목이 부러졌고, 이백 초를 넘겼을 때는 오른쪽 눈과 볼살이 찢겨 너덜너덜해졌다.
그럼에도 고흠은 막강한 투기를 뽐냈다.
전신을 활활 태우며 허공으로 치솟아 무시무시한 무공을 연이어 펼쳤다.
두 사람 모두 능공천상제를 쉽게 펼치며 허공에서 싸움을 지속했다.
콰과과광!
봉황타 정상에 포격을 맞은 듯 움푹 팬 구덩이가 수십 개나 생겨났다.
하지만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십 성의 염왕기를 양손에 두르고 극양무극도의 성취를 뽐내던 고흠은 결국 밑동이 베인 나무처럼 서서히 쓰러졌다.
피를 토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극도의 탈력 상태에 빠져 안색이 하얗게 질린 고흠이 숨을 씨근거렸다.
“이런 놈에게……!”
최후의 순간까지 다시 한 번 염열수라참을 펼쳤으나 무공이 끝까지 전개되지 못했다.
이미 귀기에 사로잡힌 소호가 무심하게 정권을 쏘아낸다.
퍼억!
가슴이 우그러진 고흠이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안 된다!”
나찰마도 정옥상이 날 듯이 달려와 소호에게 칼을 휘둘렀다.
구천지옥도법.
사나운 절초가 소호의 요혈을 내리고 쏟아져 내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청화도대의 모든 무인이 핏발 선 눈으로 소호라는 이름의 마왕을 죽이겠다며 달려들었다.
소호는 웃었다.
즐겁다는 듯이.
“하하하하핫!”
귀기 어린 웃음이 봉황타를 뒤흔들었다.
수백 대 일의 싸움은 그렇게, 경천동지할 폭음과 함께 더욱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
손님 하나 없이 한산한 등봉객잔을 묵묵히 지나쳤다.
큰 키.
선한 이목구비를 지닌 긴 머리의 청년이 성큼성큼 봉황타를 올랐다.
은색 창을 등 뒤에 비스듬히 맨 그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보는 곳은 오로지 정상뿐이다.
경사가 높아 험한 산길도, 이끼가 껴서 미끄러운 바위도 그는 한 걸음에 뛰어넘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청년의 얼굴은 굳어져만 갔다.
폭음과 열기.
그리고 진한 피비린내가 벌써부터 풍겨 왔다.
“소호.”
낙일창 조서인.
봉황타의 정상에 다다른 그는 공황 상태에 빠진 한 무리의 무인과 마주쳤다.